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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알고있지만 둘이 어떻게 처음 만났고 윤솔은 어떻게 마음을 자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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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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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댔는데, 진짜 가만히 있을 걸.

 

 

서지완은 마구마구 쏘다닌 학기 초를 돌이키고 싶다. 다른 아이들이 학년 바뀐 새 환경에 낯설어 하는 와중 홀로 신난다고 활개 치지 않았다면 담임의 눈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임시 반장을 맡을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임시의 연장선으로 나간 반장 선거도 다른 아이가 당선되었을 테니까. 학년 구분 없이 전 학급 반장들이 주마다 가지는 학생회의를 마치고 텅 빈 교실로 돌아온 서지완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첫 단추를 잘 꿰었다면 방과 후 홀로 남아 재미없는 회의를 버티고 교실 문단속을 하는 일은 없었겠지. 받쳐 입은 반팔의 메이커 로고가 훤하게 보일 만큼 셔츠 단추를 몽땅 풀어헤친 서지완은 호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냈다. 철물점 이름 박힌 투박한 키링과 낡은 열쇠가 맞부딪친다. 그것과 꼭 닮은 문고리를 여러번 돌리며 문이 잘 잠겼는지 재차 확인하는 손에 쇠 비린내가 묻어났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 복도 가득 비슷한 냄새가 난다. 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짙어진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학교에 한참 지난 청소시간의 물칠 냄새가 남아있을 리 없다. 계단을 내려가는 서지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직 달력은 5월이지만 여름에 가까운 말일의 봄날, 겅중겅중 튕겨지듯 내려온 현관 바깥에서 비가 내린다. 따뜻했던 계절에 안녕을 고하듯 알알이 굵고 세찬 장대비였다. 그대로 맞고 가다간 쫄딱 젖겠네. 빗발을 가늠하기 위해 내밀었던 팔에 가득 맺힌 물방울을 쓸며 서지완이 핸드폰을 든다.

 

 

 

엄마! 나 학굔데 지금 비 오거든? 근데 우산 없어. 데리러 와!”

- 얘는 몇 신데 아직도 학교야! 서지완 또 정신 놓고 놀다가 학원 차 놓쳤지!

아 아니라고! 반장 회의했는데 방금 끝난 거라고!”

 

 

 

평소 학원을 빠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이번엔 일부러 아닌데. 꾸지람이 쏟아지다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로 전화가 끊어졌다. 서지완은 심통이 제대로 난다. 그렇잖아도 나와 있던 입술을 댓 발 내밀며 허공에 발차기를 하듯 쓩쓩 슬리퍼를 내던졌다.

 

 

엄마가 언제 올까 흰 양말 꼼지락거리며 핸드폰을 만지기도 몇 분. 액정에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뜬다. 되는 게 없다. 폰 꺼지면 더 혼나겠지. 결국 서지완은 핸드폰을 밀어두고 평소 관심 따위 두지 않았던 학교 현관을 훑는다.

 

 

어쩌구 올림피아드. 저쩌구 경시대회. 이름부터 지루한 별별 곳에서 받아온 트로피와 상패로 가득 채워진 진열장 옆 게시판에 학교를 빛낸 4월의 인물이란 문구가 바로 띄었다. 진열장 위 팔을 올려 턱을 괸 서지완이 게시판을 꾸미고 있는 조잡한 종이 장식을 툭툭 건든다. 내일이면 6월인데 왜 아직까지 4월에 머물러 있는 거람. 5월엔 학교가 그렇게 빛나지 않았나보지?

 

 

어떤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탔다며 호리호리한 여자애가 상장을 들고 있는 사진을 살피던 서지완은 이내 그럴 만하다 수긍한다. 수상사진 옆 작게 딸린 반명함에 푸른 날이 서있다. 길게 이마를 덮은 앞머리 바로 아래 말쑥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한편으론 잘 벼린 창을 두른 느낌이다. 서지완은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피한다. 증명사진이 차원을 넘어와 꼭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왜 네가 아직까지 학교를 빛냈다며 걸려있는지 알겠다. 누가 됐든 너를 이기고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너 같은 애는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2학년 3, 소속 학년과 반까지만 보이고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피려는데 팡 하고 우산 펼치는 청명한 소리가 현관을 울렸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애는 키가 컸다. 신장으로 아쉽다 느껴본 적 없는 서지완보다 반 뼘은 길쭉했다. 우산을 써서 더 그래보였다. 서지완은 자기도 모르게 발에 운동화를 끼우고 뒤축을 꺾는다. 실내에서부터 우산을 푹 내려쓴 여자애는 서지완을 슬쩍 피해 밖으로 나갔다.

 

 

서지완은 여자애가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다. 팔목에 걸린 조잡한 일회용 비닐우산이 움직임을 따라 대롱대롱 흔들렸다. 좋겠다, 우산이 두 개나 있어서. 아무렇게나 뒹굴던 슬리퍼를 줍던 서지완의 생각을 들은 것처럼 여자애가 별안간 멈춰 섰다. 쪽빛 우산이 살짝 들썩이다 휙 돌아 걸었던 자리를 다시 돌아온다.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냥 그렇구나, 싶었던 건데. 서지완은 제 발 저려 가슴이 콩콩 뛴다.

 

 

쭉 뻗은 다리가 빠르게 교차하며 다가온다. 새것처럼 깨끗한 신발이 성큼성큼 움직여 바로 앞에 멈췄다. 이 애는 여전히 우산을 접지 않는다. 빗방울이 표면을 타고 똑 떨어져 자국을 남겼다.

 

 

 

이거 쓸래?”

 

 

 

우산이 서지완을 향해 기울어지며 게시판에서 보았던 말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사월에 학교를 빛냈다는 이 애의 첫 말이 서지완에게 물음표를 남기자 신기하게도 빗줄기가 얇아진다. 빗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지는 걸 보니 틀림없다. 서지완은 사그라드는 소리를 쫓듯 두 손을 뻗는다. 불가항으로 우산 손잡이를 잡았다.

 

 

 

……, !”

우리 동갑인데.”

 

 

 

우산을 넘겨준 손가락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가리켰다. 서지완의 노란 명찰과 똑같은 색깔 속 촘촘히 자수 박힌 외자 이름이 짙푸르다. 오늘은 오월을 갈무리 짓는 날. 오월의 계절은 봄. 연둣빛을 거둬가는 마지막 봄비가 푸른 여름의 초입을 불러 알게 된 이름, 윤솔.

 

 

 

3반이니까 내일 줘.”

 

 

 

운동화 신지 말 걸. 아니지. 오늘 흰 양말 신었지. 그러고 바닥에 서있었지. 그럼 혹시 모르지, 양말에 더러운 게 묻었을지도 몰라. 그래 그것보단 운동화가 나았을 거야. , 그냥 슬리퍼 신고 있을 걸 그랬나봐. 나는 아까 왜 성질을 내선.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때 묻은 운동화가 부끄러워서, 그걸 이상하게 숨기고 싶어서, 서지완은 윤솔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손잡이만 꾹 쥐며 발을 굴렀다.

 

 

윤솔은 팔목에 걸어두었던 우산을 펼친다. 살이 구부러져 엉성하게 형태만 유지하는 비닐우산을 쓰고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중간치 갔을 즈음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가 햇살에 비쳐 투명한 우산이 오색으로 빛난다.

 

 

 

 

 

*

 

 

 

 

 

다음날 아침은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사복인지 교복인지 애매한 복장으로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하던 서지완이 앞으로는 단정하게 다니겠다며 온 집안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밥 따위 먹는 둥 마는 둥 서지완은 방구석에 던져두었던 리본까지 완벽히 찾고 현관에 섰다. 간밤 물티슈며 구두솔이며 온갖 걸 동원해 박박 닦은 운동화도 나름 깨끗해졌다. 매무새를 거울에 비춰보니 처음 교복을 입었을 때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제 정말 바깥으로 나서기만 하면 되는데 웬걸. 요란한 드라이기 소리가 난데없이 집안을 휘젓는다.

 

 

 

남의 우산을 왜 쓰냐고, !”

억울하다. 정말 억울해. 아빠가 빌려온 우산인 걸 알고 썼겠어?”

 

 

 

착착 진행되던 등교 계획은 잘 말려두었던 우산이 폭 젖어있는 걸 발견하면서 올스탑. 서지완은 씩씩거리며 우산을 말린다. 혹시 천이 상할까 찬바람으로. 윤솔이 빌려준 우산을 알뜰살피는 손길과 달리 아빠에게 돌아가는 목소리는 앙칼지기 그지없다. 분리수거를 위해 나온 이른 아침, 부슬비가 내리고 마침 현관에 튼튼한 우산이 있길래 썼더니 딸내미의 구박이 돌아왔다.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 없다던 말을 이렇게 절감한다.

 

 

 

아 몰라, 보상으로 용돈 줘.”

우산 주인은 따로 있는데 보상을 왜 우리 딸이 받지?”

왜냐면 내가 걔한테 맛있는 거 사줄 거니까~”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성난 얼굴은 오간데 없이 지우고 곰살맞게 애교 부려 용돈을 뜯어내는 딸을 보며 지완 모가 쯧쯧 혀를 찼다. 내 딸이지만 참 귀엽고 사특하기 짝이 없어.

 

 

우산을 빠짝 말리고 용돈까지 탔겠다, 팔랑팔랑 즐겁게 등교한 서지완은 가방도 벗지 않고 곧장 매점으로 향한다. 한동안 매대를 서성이며 고민하다 바깥으로 나온 서지완의 손에 곰모양 젤리 한 봉지가 들렸다. 설레는 기분으로 계단을 올라 자기 반은 그대로 지나쳐 3반 앞에 서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훑는다. 아무리 구석구석 살펴도 어제 보았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곧 종이 칠 텐데. 교실을 나가려는 아이를 붙잡고 윤솔을 물으니 맨 뒷자리를 가리켰다.

 

 

엎드린 윤솔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간 서지완은 발을 동동 구른다. 어떡하지. 자고 있나? 많이 피곤한가? 어제 우산 빌려줘서 고맙다고 말을 못했는데. 얼굴 보고 인사하고 젤리도 주고 싶은데. 푱푱 솟아오르는 생각들이 행동이 되어 윤솔을 방해할까 갈팡질팡하던 서지완은 책상 앞에 조용히 쭈그려 앉았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 젤리 봉지를 올려놓고 살포시 윤솔을 바라본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게시판에서 봤던 사진이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동그란 쿠션을 끌어안아 파묻은 옆선에 시간이 걸린다. 이른 아침부터 켜놓은 선풍기 바람에 윤솔의 잔머리가 느리게 흔들렸다. 그 외로 윤솔은 미동 하나 일절 없고, 새근새근 숨소리만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바꼭질을 한다. 꼭 아기 같네. 서지완은 아주 조용히 젤리 봉지를 뜯었다.

 

 

가장 일찍 등교한 뒤 첫 종을 기다리는 동안 선잠에 들었던 윤솔은 인기척을 느낀다. 어디서 아주 달달한 향기가 났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책상 위로 눈만 빼꼼 드러낸 토끼 같은 애가 웬 곰젤리 줄 세우기에 여념 없다. 폭신폭신한 머리 위로 쫑긋이는 귀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윤솔은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뭐지. 헛것을 보고 있나. 윤솔이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들자 젤리군단의 열을 맞추는 데 집중하던 서지완이 화들짝 놀란다.

 

 

 

, 깼어?”

 

 

 

무던한 눈빛이 서지완을 올려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서지완은 자기도 모르게 집고 있던 곰젤리를 쏠랑 입에 넣었다. 과일향이 가득 퍼진다. 이거 대체 뭐지. 윤솔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쿠션에서 몸을 뗀다.

 

 

 

…… 안녕! 어제 우산, 돌려주려고 왔는데.”

, 맞다. 우산.”

 

 

 

예쁘게 돌돌 만 쪽빛 우산이 달달 떨렸다. 서지완은 자기 손이 떨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우산이 일렬로 늘어진 곰젤리들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윤솔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이건 그냥…… 고마워서. 너 주려고 사왔다가……

 

 

 

오색 젤리 군단이 쿵짝쿵짝 윤솔을 향해 전진한다. 어색한 분위기는 나몰라라,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말랑한 몸을 들썩이는 것 같다. 미쳤나봐, 내가 왜 이걸 줄 세웠더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해 인과를 부연할 수 없는 상황이 머릿속에서 마구 엉킨다. 서지완은 밀려드는 생각에 헤매다 떠오르는 것 중 가장 커다란 하나를 꺼내 밖으로 덜컥 내뱉고 만다.

 

 

 

나 너 보러 계속 와도 돼?”

 

 

 

맥락이 춤을 춘다. 잠이 와 눈을 감았을 뿐인데 갑자기 달나라에 떨어져 토끼를 만난 것 같다. 저 장단에 어떻게 맞춰야할지. 윤솔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서지완을 찬찬히 살피다 뒷문을 흘끗였다. 시선을 따라간 서지완의 눈에 그제야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들어온다.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서지완이 푹 익는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만큼 큰 소리를 냈다.

 

 

 

그래! 알겠어. 그럼 니가 나 보러 와. 뭐든 괜찮으니까 나 필요할 때 꼭, 꼭 나 보러 와. 그러니까 내가 언제 필요하냐면…… , 너도 키 커서 애들한테 체육복 빌리기 힘들지 않아? 내가 빌려줄게. 맞네, 그러면 되겠다! 그치?”

 

 

 

윤솔에게 맞장구를 구해놓고선 서지완은 답을 듣지 않고 곧장 튀어나간다. 급하게 나가며 책상을 친 바람에 주홍 빛깔 곰젤리가 쓰러졌다. 그 위로 시원한 선풍기 바람이 불어온다. 윤솔은 서지완이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한 바퀴 빙글 돈 바람이 다시 찾아왔을 때 윤솔은 쓰러진 곰젤리를 집었다. 뭐지. 진짜 뭐지. 우물우물 젤리를 씹는 입안이 달다.

 

 

 

 

 

*

 

 

 

 

 

당장 2학년 수련회가 있는 까닭으로 도서관에서 해당 학년 반장들만 따로 모은 학생회의가 작게 열렸다. 그러나 수련회고 뭐고 서지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늘 아침 3반을 찾아가 윤솔에게 저지른 일이 계속해 반복된다. 알 수 없단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던 윤솔의 얼굴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다녔다. 쪽팔려 죽겠어. 처음 본 애한테 날 보러 찾아오라는 게 무슨 소리야. 서지완이 고개를 두 팔에 폭 묻는다. 윤솔은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이상하다 생각할까. 바보 같다 생각할까. 아니면 그냥, 그냥.

 

 

부끄러움에 잠겼다 수줍음에 떠올랐다 홀로 요동치던 서지완은 어찌저찌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름도 모르는 3반 반장에게 다가가 묻는다. 3반에 친한 친구가 있었지만 당장이 급했다. 안녕, 너희 반에 윤솔 있지.

 

 

 

윤솔? 우리 반 맞아. 난 걔랑 별로 안 친하긴 한데 왜?”

그래? ? 왜 안 친해?”

 

 

 

3반 반장은 뭐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냐며 난처한 얼굴을 하지만 서지완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기세가 맹렬해 무시하자니 피하는 사람이 더 민망할 지경이다. 반장이 헛기침을 하곤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윤솔은 되게 책 같애. 책도 만화책 소설책 그런 게 아니라 저런 거.”

 

 

 

쭉 뻗은 손끝에 전문서적이 가득한 000번대 책장이 걸린다. 척 봐도 제목부터 어려워 보이는 책들은 아이들의 손을 타지 않아 새것처럼 깨끗하다. 서지완의 곤란한 질문을 지켜보던 다른 반 반장애가 말을 얹었다.

 

 

 

맞아 나 걔랑 동창인데 걘 초딩 때도 그랬어. 뒷담이 아니라 왜 있잖아, 약간 다가갈 수 없는 느낌. 애가 착하고 멋있긴 한데 친해지려고 하니까 좀 벽 있고…… 뭐 그런?”

 

 

 

. 윤솔을 두고 표현한 문장에서 단 한 음절이 똑 떨어져 3반 교실 문에서 보았던 외부인과 겹쳐진다. 한껏 올라갔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서지완은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 000번 총류 책장을 훑었다. 그래도 이런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미적 감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정보 전달에만 충실한 표지로 가득한 무채색 책장. 윤솔의 잠든 모습을 내려 보았을 때처럼 조용히 책장을 살피던 중 가장 아래 칸 구석에서 크기부터 남다르고 색색이 화려한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서양근현대미술 거장전. 도록의 규격이 책장과 딱 맞물려 꺼내기도 버거웠다. 또 어찌나 두껍고 무거운지. 팔에 힘줄까지 돋으며 간신히 책장에서 빼냈다. 차마 책상까지 가지고 갈 힘은 없어 바닥에 펼쳐놓은 커다란 도록의 종이가 빳빳하게 광이 난다. 팔랑팔랑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작품들이 서지완에게로 솟아오른다.

 

 

서로 껴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인, 만화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색색으로 가득한 마을의 모습. 텅 빈 눈을 가졌지만 차분하고 온화한 색감의 초상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길쭉한 얼굴들.

 

 

미술책에서 보았던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도록을 가득 채운 그림들 사이 예쁘게 접혀 책갈피처럼 꽂혀있는 쪽지 하나가 나타난다. 서지완은 끌리듯 쪽지를 펼친다.

 

 

 

초현실주의 작가, 마르크 샤갈.

대표작 도시 위에서.

 

표현주의 작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대표작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로 적힌 작가 이름과 작품명 아래 해석이 빼곡하다. 서지완은 미술을 잘 모르지만 글씨체를 닮은 유려한 설명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내가 보았던 게 이거구나.

 

 

똑부러지는 도슨트와 함께 미술관을 돌은 듯 명쾌했던 도록 구경을 마친 뒤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었지만 안간힘을 써도 원래 자리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걸 여기에 둔 사람은 어떻게 꽂아 넣은 건지. 한참 낑낑대던 서지완은 결국 돌려 넣는 걸 포기하고 도록을 도서정리 카트에 두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도록은 제 책장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 도서관을 떠돈다. 며칠을 카트에 실린 채 이리저리 실려 다니는 한번 의식한 뒤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결국 도록 책등에 붙여진 청구기호를 살핀 서지완이 700번대 책장으로 카트를 민다. 전에도 아예 잘못 있던 거구나. 이게 왜 000번 책장에 있었을까. 정말 도서부 애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수레라지만 어쨌든 차는 차. 조심성 없이 딴 생각을 하며 돌돌 카트를 움직이던 서지완은 초조한 얼굴로 책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윤솔과 추돌사고를 내버린다. 엄마야, 오지랖 부려서 무면허 운전하다 일 쳤네. 가볍게 등을 콕 찍은 수준이었지만 서지완에겐 수십 중 대형 사고를 낸 것처럼 다가온다.

 

 

 

미안해, 괜찮아?! 어떡해 너 여기 있는 줄 몰랐어!”

 

 

 

괜찮다고, 괜찮다고. 윤솔은 수번을 반복했다. 그럼 서지완은 그 배로 미안하다 호들갑을 떤다. 누가 먼저 입을 다무는지 내기를 한 사람들처럼 한창을 실랑이하다 윤솔이 정말 괜찮다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해 간신히 서지완을 떼어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찾아든다. 뭐지. 별 거 안 했는데 왜 숨이 차지. 윤솔은 가쁜 숨을 돌리며 부딪쳤던 카트를 확인한다. 계속 찾아 헤매던 도록을 뜻하지 않게 발견한 윤솔이 두 눈을 동그랗게 키운다.

 

 

 

이거 내가 숨겼던,”

? 숨겼던?”

아니…… 하 그게……

 

 

 

옴싹달싹 입술을 움직이다 푹 고개 숙인 윤솔은 하얗게 드러난 뒷목을 주무르며 실토한다.

 

 

 

사실은…… 이거 나만 보고 싶어서 다른 데 숨겨뒀었는데…… 미안해.”

 

 

 

굳이 꺼내지 않았다면 서지완은 윤솔이 000번대 책장에 도록을 숨겼다는 걸 알 리가 없다. 무엇보다 서지완에게 사과할 일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난처해하는 윤솔과 쪽지 한 바닥을 빼곡하게 채울 만큼 열심히 작품을 설명하던 깨끗한 글씨가 겹쳐진다.

 

 

 

너 미술 엄청 좋아하는구나?”

 

 

 

윤솔이 목에서 서성이던 손을 내려 작게 말아 쥐었다. 흔들리던 시선의 축이 서지완에게 박힌다. 서지완은 조용히 기다린다. 어떤 의미나 꿍꿍이도 담지 않고 정말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맑고 검은 눈. 윤솔은 서지완의 물음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짧게 망설이다, 오직 본인에게만 억겁처럼 느껴지는 그 공백을 버티고 답했다.

 

 

 

, 좋아해.”

 

 

 

미대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진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매일매일 유명한 화가들의 도록을 보고, 작품을 외우고, 해석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거면 나는 미술을 좋아하는 거지. 다들 그런 거겠지. 나는 미술을 좋아하고 있지. 그렇지?

 

 

 

 

 

*

 

 

 

 

 

수련회 전날 밤까지만 해도 단출했던 짐가방이 아침이 되자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가방끼리 증식하는 것도 아니고 참 신기한 일이군. 서지완은 의심이 가득한 엄마의 눈초리를 피해 부리나케 달려 버스로 채워진 운동장에 도착한다. 아하하, 들킨 거 아닌가 모르겠네. 제일 큰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옷가지로 둘둘만 상자를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하다.

 

 

어쨌든 버스는 서지완과 문제의 상자를 태우고 운동장을 안전히 빠져나간다. 도심을 달리고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다 중턱에서 바퀴가 멈췄다. 수련원에 도착하자마자 엄한 척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교관들의 호령은 한 귀로 흘린다. 놀러왔냐고 혼내면 어쩔 거냐고요~ 우리는 여기 놀러 온 거 맞는데~ 서지완은 툴툴거리며 오직 밤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주 파티투나잇을 벌일 거야.

 

 

그러나 뉘엿뉘엿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자, 초대 받지 않은 밤손님이 들이닥치고 만다.

 

 

 

야 서지완 니가 반장이잖아, 저거 니가 잡아아아아악!!!!!!!!!!!!!!!”

 

 

 

이럴 때만 반장이래! 작렬하는 문장부호만큼 수많은 다리를 가진 벌레의 등장으로 서지완네 방이 발칵 뒤집힌다. 구두법을 파괴해야만 겨우 표현할 수 있는 우렁찬 비명이 방을 울렸다.

 

 

서지완이 완강하게 뻗대나 홀로 다수를 상대하기란 역부족이다. 최후의 순간에 다수결의 원칙을 말하는 민주주의는 열다섯 피도 안 마른 어린 애들에게도 적용된다. 결국 서지완은 혈혈단신에 쓰레받기랑 빗자루만 들린 채로 벌레와 사투를 벌이고 만다. 눈을 꾹 감고 어찌저찌 팔을 휘둘러 벌레 포획에 성공해 복도로 나왔는데, 정말 너랑은 항상 타이밍이 왜 이럴까. 서지완은 황망한 꼴로 말끔한 윤솔과 마주친다.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앞머리를 깐 윤솔의 이마가 옥돌처럼 반질반질했다. 야단인 와중 서지완은 그게 또 신경 쓰인다.

 

 

 

아으으, 솔이 안녕……! 으악!”

…… 안녕. 근데 너 빗자루 들고 뭐하는 거야?”

아 이거, , 안에 벌레에!”

 

 

 

서지완이 제 몸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리고 싶다는 듯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민다. 어쩌다보니 빗자루를 뚜껑처럼 덮은 쓰레받기를 윤솔 향해 내민 꼴이 됐다. 윤솔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서지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갠다.

 

 

 

줘봐. 내가 버려줄게.”

 

 

 

맞닿은 손이 잘게 떨렸다. 우산을 전해주었을 때처럼. 물론 서지완은 여전히 몰랐지만, 윤솔은 계속 의아하다. 뭐지. 이거 정말 뭐지. 그러나 떨림은 뒤로 하고 우선 서지완이 들고 있던 쓰레받기를 받아 바깥 풀숲으로 털어내려는데,

 

 

 

뭐야. 벌레 없는데?”

 

 

 

윤솔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에 띄지 않는 공포가 엄습한다. 고개를 내밀고 서지완의 벌레 수난기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튀어나간다.

 

 

벌레가 나온 방에선 잠을 못자겠다며 아이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서지완도 그 상자를 챙긴 가방을 소중히 끌어안고 이 방 저 방을 표류한다. 같은 반 다른 방에 비집고 들어가려 했지만 이미 다른 애들이 바글바글해서 서지완까지 끼었다가 교관한테 단박에 들킬 거 같았다. 그래, . 반장이니까 내가 양보해 준다. 서지완은 빛나는 희생정신이라 되뇌며 발걸음을 3반으로 둔다.

 

 

 

“1반 귀염둥이 지완이 3반 입장~”

 

 

 

막 잘 준비를 마쳐 불까지 끈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설 때부터 서지완의 온 신경은 사각 끝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윤솔에게로 향한다.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체감하게 된다. 혹시 네가 있는 거 아니야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있을 줄은. 서지완은 친한 친구에게 하루만 재워 달라 혼신의 연기를 펼치기 위해 동그랗게 올라가는 입매를 억지로 내리느라 아주 혼쭐이 났다.

 

 

아이들의 허락을 구해 문가에 이부자리를 펼치고 누웠지만 이대로 잠들기는 억울하다. 너네 진짜 잘 건 아니지? 서지완이 벌떡 일어나 핸드폰 조명을 킨다. 데굴데굴 굴러오자마자 분위기를 단숨에 휘어잡은 서지완의 주도 하 아이들이 방 가운데 동그랗게 모였다. 막 잠든 참이었던 윤솔까지 흔들어 끌어놓고서 서지완은 가방 지퍼를 지익 끄른다. 그토록 애지중지 숨겨왔던 작은 상자가 달칵 열렸다. 찹찹찹, 패를 섞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꽃놀이가 시작된다.

 

 

 

야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

 

 

 

상황과 전혀 들어맞지 않아도 일단 영화 명대사부터 날린 서지완은 자기 차례가 오자 새로 뽑은 패를 뒤집어 자신만만하게 이마에 붙인다. 아주 경쾌하게 착 소리가 났다. 내 패를 보여줘도 난 이길 수 있단 허세였다. 점수도 제대로 정리 못하고 있으면서 본 건 많아 가지고. 바로 맞은편에 앉은 윤솔이 씩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조명은 바닥에 둔 핸드폰 하나. 빛이 직선으로 천장을 때리느라 주변까지 밝히기는 모자람에도 유연한 미소가 뚜렷이 서지완을 관통한다. 서지완은 저항 없이 무너지고 만다. 마음이 덜컹이면서 빨간 꽃과 초록 새가 그려진 패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잘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목덜미가 화투의 빨간 뒷면만큼 붉어진다. 불을 꺼서 다행이었다.

 

 

서지완에게 빨간불이 켜져도 판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 진행된다. 놀이 규칙은 그 누구도 심지어 화투를 가져온 서지완마저 알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찌저찌 돌아갔다. 괜히 안다고 나섰다가 귀찮아질 게 빤해 모르쇠로 대강 어울리던 윤솔은 세 번째 판이 벌어질 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다.

 

 

 

너희 언제까지 놀 거야?”

? 벌써 자게?”

, 피곤해서. 시끄러워도 잘 자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아.”

 

 

 

조금만 더 같이 놀자고 붙잡을 틈도 주지 않는다. 가장 구석진 자기 자리로 돌아간 윤솔은 단단히 팔짱까지 끼고 이불을 덮었다. 가로 누워 돌린 등을 보고 서운하고 아쉬울 일이 아닌데, 한 번 스며든 눅눅한 감정은 깊은 파도처럼 밀려와 속상함마저 끌어낸다.

 

 

 

뭐야…… 윤솔 진짜 자?”

 

 

 

하나가 빠지자 흥이 팍 샌다. 사뭇 다른 분위기로 놀이를 벌이다 한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가 윤솔 앞에 쫙 펼친 손을 휘휘 저었다. 지켜보는 방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 바깥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만 작게 퍼진다. 윤솔은 아무 반응이 없다. 얘 정말 자나봐! 얼굴 근처에 뻗은 손을 거둔 애가 필통에서 매직을 꺼내 뿅 뚜껑을 뽑았다. 서지완은 음소거로 기함한다.

 

 

 

잠깐만 그거 뭐야. 너 지금 뭐 하려고?”

아 왜~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윤솔한테 장난치겠냐?”

야아, 자는 사람 얼굴에 낙서하면 그 사람 죽어!”

 

 

 

잠든 사람 얼굴에 낙서를 하면 밖으로 나왔던 영혼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돌아올 수 없어 영원히 잠든다더라. 항간에 출처 없이 나도는 도시전설로 매직 장난 결사반대, 항변하며 서지완이 호다닥 달려간다.

 

 

 

아 그렇게 장난치고 싶으면 나한테 낙서하든가!”

 

 

 

서지완이 뱉은 말을 거둘 새라 아이들은 득달같이 주위로 모여든다. 누구는 핸드폰을 들어 조명을 밝히고, 누구는 움직이지 못하게 팔과 어깨를 붙들고, 누구는 좀 더 수염을 길게 뺐으면 좋겠다 도안을 말하며, 누구는 펜을 쥐어 실행에 옮긴다. 일사천리로 역할분담까지 나눈 아이들은 한 마음으로 서지완을 연습장 삼는다. 까끌까끌하고 축축한 펜촉이 얼굴을 가로지르자 눈을 꼭 감은 서지완이 으으, 움찔거린다. 입을 꽉 다물고 집중하던 아이들에게서 어느덧 쿡쿡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야 지완아, 너 진짜 귀엽다. 이렇게 보니까 1반 귀염둥이 맞네. 매직의 촉감이 사라지자마자 얼굴을 확인한 서지완은 꺅 높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귀여운 비명을 기점으로 방 한가득 파안대소가 터진다.

 

 

 

소등 뒤 취침하라고 했는데 지금 시끄러운 방 어딥니까!”

 

 

 

분위기는 한 순간 얼음장이 된다. 방 밖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이들은 화투패며 매직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처리하지만 딱 하나, 이 방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서지완이 처치곤란으로 떠오른다. 신발장과 청소도구함만 달랑 있는 텅 빈 방엔 서지완을 숨길 곳이 없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교관이 쾅쾅쾅 문을 두드린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난리통에도 윤솔은 정말 잠귀가 어두운지 곤히 잠들어 있다. 철컥철컥 문고리가 헛도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뛴다. 에라 모르겠다, 서지완은 윤솔에게로 뛰어든다.

 

 

전등이 환하게 켜진다. 소란한 와중에도 애써 무시하며 꿈속을 누비던 윤솔은 바깥이 밝게 바뀌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면 바로 앞에 오색 곰젤리가, 잘 마른 쪽빛 우산이, 꿈을 담은 도록이, 매화와 휘파람새가 그려진 화투패가, 그러니까 서지완이,

 

 

 

너 지금 뭐하,”

쉿쉿, 우리 들켰어어……

 

 

 

서지완은 머리끝까지 뒤집어 올린 이불에서 손을 떼 윤솔의 입 틀어막는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서로가 뱉어내는 작은 숨결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이불 아래서 고개를 끄덕인 윤솔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코앞의 서지완을 눈 한 가득 담는다. 까맣게 칠해진 동그란 콧망울, 볼에 세 가닥씩 그어져 코를 중점으로 대칭 이루는 가느다란 수염. 뭐지. 저번에는 토끼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누가 봐도 고양이네. 얘 정말 뭐지. 너는 눈을 뜰 때마다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거기 이불에 숨어있는 애들 나와!”

 

 

 

우여곡절의 결말은 달밤의 체조로 장식된다. 서지완은 얼굴엔 고양이 그리고 토끼처럼 폴짝폴짝 뜀을 뛴다. 같은 방에 있던 아이들을 비롯해 원래 서지완의 방에 있다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까지 죄 잡아들여 모두가 다 죽상으로 운동장을 도는데 윤솔 홀로 아무 표정이 없다. 서지완은 마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괜히 찾아갔어. 처음 우산을 돌려주러 갔을 때 오지 말라고 한 거 지킬 걸. 만날 때마다 제 잘못 아닌 잘못으로 서로 민망한 상황만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도 더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자꾸만 커지는 게, 왜 이래.

 

 

다음날은 물론 마지막 날 밤까지 서지완은 근육통으로 온 몸이 욱신거렸다. 첫날 혼쭐이 난 뒤로 서지완은 놀러왔단 마음을 싹 접고 고분고분 수련회를 보냈다. 윤솔을 떠올릴 때마다 잔뜩 힘을 주고 긴장했으니 몸과 마음이 고단하지 않을 리 없다. 빨리 집 가서 쉬고 싶다. 벌레가 나왔든 어쨌든 절대 다른 방으로 건너가지 않고 배정 받은 방에서 잠들기 전, 벽에 착 붙어 일자로 다리를 올리고 통통통 두드리는 서지완에게 편지지가 팔랑팔랑 떨어진다.

 

 

 

고마운 사람한테 편지 써서 내래~ , 이런 거 오글거려 진짜.”

 

 

 

서지완은 드러누운 자세로 한동안 편지지를 쥐고 있다 바로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얘는 엄마, 쟤는 아빠. .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골몰하던 서지완은 슬그머니 손을 움직인다.

 

 

 

[To. 2학년 3반 윤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가. 2학년 3반 윤솔. . 이건 정말 아니야. 서지완은 지우개를 들어 간신히 정했던 수신인을 박박 지운다. 편지지의 분홍빛이 날아갈 만큼 아주 세게.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고무를 문댄 부분이 뜨겁다. 서지완은 쭉 엎드려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휙휙 돌리며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 손이 하얗게 뜰 정도로 꽉 잡곤 편지지에 흑연을 꾹꾹 눌렀다.

 

 

 

[솔이에게]

 

 

 

 

 

*

 

 

 

 

 

윤솔의 짝은 지난 한 달간 윤솔의 옆자리에 있으면서 세우게 된 가설이 하나 있다. 아무래도 1반 반장은 윤솔을 대상으로 과학 실습을 하는 것 같다.

 

 

수련회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1반 반장은 본인 때문에 교관한테 벌 받은 게 미안하다며 젤리 들고 윤솔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어제 젤리는 너무 조금 줬다며 또 찾아오고, 그 다음날은 새로운 맛이 나왔는데 그걸 못 줬다며 어색한 핑계를 댔다. 그렇게 칙칙폭폭 줄줄이 이어지는 젤리 열차는 습관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1교시 시작 전, 눈을 감아 부족한 잠을 채우던 윤솔은 더 이상 잠들지 않는다. 매일 아침 껴안던 쿠션은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윤솔은 조례 시작종 20분 전부터 시계를 본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시곗바늘의 장단에 맞춰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친다. 그리고 긴 바늘이 작은 눈금 다섯 칸 정도 움직였을 쯤에는 어김없이 서지완이 젤리 봉지를 들고 짠, 상쾌하게 등장한다.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민망할 정도로 부서져라 뒷문을 열면서.

 

 

1반 반장이 파블로프를 꿈꾸고 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 실험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제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들리면 윤솔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수준이다. 윤솔의 짝은 오늘도 서지완이 주고 간 젤리 봉지를 팡, 뜯는 윤솔에게 묻는다.

 

 

 

“1반 걔가 너한테 한 일이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젤리 조공하면서까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않아?”

…… 그치? 사과할 일은 아니긴 하지.”

 

 

 

나름 냉철하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맹하다. 이상해. 단내를 풍기더니 사람이 이상해졌어. 윤솔이 이렇게 무른 애가 아니었는데. 젤리를 하도 먹다보니 젤리동기화가 되었나.

 

 

 

걔는 그렇다 쳐도 넌 그걸 또 왜 모아?”

……몰라.”

 

 

 

윤솔의 책상 서랍이 젤리 봉지로 가득하다. 교과서 사이사이에 압화하듯 차곡차곡 꽂아둬 판판한 봉지들 가장 아래에는 작은 편지 봉투가 있다. 손을 서랍 안으로 넣어 봉투 끝을 만지던 윤솔은 짝에게 뭐라고 입을 벙긋하려다 그냥 삼킨다.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윤솔에게서 유의미한 추론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1반 반장한테는 한없이 곁을 내어주면서 그 외에겐 철옹성이다. 결국 윤솔의 짝은 윤솔과 1반 반장을 두고 세운 가설을 끝내 증명하지 못했다. 자리를 바꾸기도 했거니와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반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사적으로 윤솔과 서지완은 같은 반이 된다.

 

 

 

윤솔~!”

 

 

 

서지완은 3학년이 되면서 짝과 자리를 바꿀 때마다 자기 것보다 윤솔의 이름을 먼저 찾았다. 너무 간절히 바라서 그런지 프로그램은 윤솔과 서지완을 절대 붙여 놓지 않고 오히려 교실 끝과 끝으로 멀리 보냈다. 매달 대각으로 돌아가는 자리 배치에 인정머리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욕하기도 지칠 때쯤 둘은 짝이 된다. 하지만 잔뜩 신나 폴짝 뛰는 것도 잠시, 서지완은 윤솔과 책상을 붙인 한 달 내내 매일 카운트다운을 하며 어떡해 솔아 우리 좀 있으면 떨어져, 울망울망했다.

 

 

그래서 윤솔은 한 달이 지난 뒤부터 서지완에게 앞머리를 맡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서지완의 자리를 찾아가 갱지를 코 위에 대고 손길을 받았다. 아무리 서지완이 노력해 다듬는다지만 머리가 빨리 자라는 게 아니니 윤솔의 앞머리는 언제나 동동 떠다녔다. 그렇게 붕 뜬 기분으로 한 해를 보내고 중학교 교복을 입는 마지막 날, 윤솔의 롤링페이퍼에 적힌 [니는 앞머리 쥐 파먹은 것처럼 안 자르면 진짜 이쁠 텐데]. 서지완은 익명성에 분노한다.

 

 

 

아 누가 윤솔한테 이쁘다고 썼냐?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마지막인데 기분 좋게 헤어지자, ?”

지완아…… 너 화내는 포인트가 되게 마음 상하게 한다.”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너 안 이쁘다는 게 아니고!”

 

 

 

서지완은 경쟁자 색출도 멈추고 안절부절하며 색연필을 들어 윤솔의 롤링페이퍼를 꾸민다. 짱이쁜 윤솔. 낯간지러운 수식과 이름 주변에 방긋방긋 그려진 꽃잔치를 보며 윤솔은 결정했다. 서지완과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겠다. 윤솔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께 고집을 부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예고 진학을 염두에 두고 이사를 했던 터라 윤솔의 집과 새로 배정 받은 고등학교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윤솔은 첫차를 탄다. 어둑어둑한 버스정류장을 밝히는 가로등의 필라멘트를 가만히 들여 보다 윤솔은 핸드폰을 꺼낸다.

 

 

 

서지완 일어나, 학교 가야지.”

- 으응……

빨리 일어나서 세수해. 나 조금 있으면 버스 탈 거 같아.”

- ……헉 벌써?

 

 

 

핸드폰 너머로 우당탕탕 구르는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어스름 밝아오는 볕을 가로지르며 버스가 도착하자 가로등 불빛이 힘을 다한다. 윤솔의 발치에 매달려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그림자도 버스 바퀴 사이로 숨었다. 윤솔을 태운 버스가 힘차게 달린다. 차창 밖 악보의 오선처럼 죽 늘어진 전깃줄을 따라 아침 해가 도, , , 떠오른다. 희붐하게 퍼지는 아침햇살이 찬바람 부는 하늘을 포근한 병아리 색으로 칠했다.

 

 

햇살이 건반을 동당이는 소리가 더 높게 밝아올 무렵엔 잠에서 덜 깬 서지완이 버스에 오른다. 서지완의 자리를 맡아두던 가방을 무릎 위로 옮겼다. 버스에서 함께 자리한 내내 윤솔은 꾸벅꾸벅 조는 서지완에게 어깨를 빌려준다.

 

 

마구 들썩이던 버스에 내려서도 서지완은 여전히 흔들리며 좀처럼 맥을 못 춘다. 어제 밤늦게까지 전화하지 말 걸 그랬나. 윤솔은 서지완의 손을 잡는다. 샤갈의 그림처럼,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처럼, 사랑스럽게. 작품 외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윤솔에게 화가들이 연인을 향해 속삭이던 사랑의 은어가 들려온다.

 

 

 

샤갈. 그리고 벨라.

그녀의 둥글고 커다란 검은 눈은 나의 눈, 나의 영혼.

 

모딜리아니. 그리고 잔.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겠어요.

 

 

 

지완아 잠깐만. 나 도서관 들려야 하는데.”

 

 

 

낮은 음계에서 맴돌던 해가 어느덧 고도를 높여 윤솔을 널따랗게 감싼다. 햇살이 서지완의 뒷편에서 역광으로 들이친다. 서지완은 교문 앞에서 환하게 빛난다. 윤솔은 하릴없이 부신 눈을 감았다. 눈 밖 세상은 온통 주홍.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바라고 마는 햇빛의 색. 고대 회화에서 큐피드를 눈 먼 장님으로 그린 건 그런 이유일 거야.

 

 

 

아 진짜? 주번이라서 같이 못 가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수사적으로 변한다. 감정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싶어 하고 생동한 감각을 원한다. 비정형의 형체를 헤아리는 일만큼 허무맹랑하고 얼토당토않은 짓도 없지만 사랑은 분별심을 지운다. 피상적 표현의 한계에 번번이 씁쓸함을 품으나 놓지 않고 끊임없이 탐색하면 어느 날 찾게 되는 단 한 줄의 기쁨. 그 순간을 한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계속해 어휘를 늘리고 음표를 그리고 종이를 칠하며 정과 망치를 부딪친다.

 

 

이 모든 과정은 불가항. 그래서 사람은 예술을 한다.

 

 

 

윤솔~ 떨어져 있는 동안 나 보고 싶어서 어떡해? 먼저 가서 문 열어 놓을게. 빨리 와!”

 

 

 

윤솔은 용기를 내 아주 살짝 눈꺼풀을 든다. 사르르 부서지는 주홍빛을 마중물 삼아 트인 시야는 꽃망울이 피어나듯 활짝 만개하고. 나풀나풀 걸어가는 서지완의 뒷모습이 윤솔을 도화지 삼아 그려진다.

 

 

서지완과 함께 다닐 고등학교 도서관. 윤솔은 회빛깔 000번대 총류 책장은 서둘러 지나쳤다. 분류기호 700번 가장 아래 칸, 비밀 책장이 새로 만들어진다.

 

 

뭐든 시작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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