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4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평소였다면 재생버튼이 보이는 순간 그저 스크롤을 내려 다른 읽을 거리를 찾았을 나였지만 종종 일어나는 별 이유 없는 변덕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빛이 최소화된 새카만 어둠으로 물든 어느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앉아있는 두 사람. 지나가는 이의 발소리도 들릴 것만 같은, 화면 속 두 사람의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적막함을 뚫고 흘러나온 여자주인공의 목소리에, 톤에, 말투에, 그 리듬에. 홀린 듯이 빠져들어갔던 아직도 기억이 선연하다. 술기운으로 뺨이 달아올라 술주정을 뱉는 여자를 보며 피식 웃는 남자를 보며, 나라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이에게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고. 꼭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화면일 뿐이었으나 어쩐지 꼭, 그날의 공기, 온도와 습도, 냄새 사소한 그 모든 것들이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에는 음악의 공백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공백이 마치 그 순간에 몰입하여 내 스스로 소리를 차단한 것 같은 순간이었다.
까만 어둠마저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 새벽, 5분이 채 되지 않던 영상을 수없이 되풀이했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그 남자의 기억법>을 만났다.
#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 때 오갔을 수많은 말과 일어났을 무수한 일들은 그 형체가 흐릿한데 그 때의 내가 받은 인상만 떠오르는 일들이 많다.
'무서웠다'든지 '따뜻했다'든지 '행복했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에 더해서, 나는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릴 때면 이제는 윤곽이 흐려진 장면들이 플래시백되는 동시에 곁에서 배경음악이 들리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영화 <캐롤>을 떠올리면 오프닝 음악과 함께 불안하고 우울하면서도 설레는 기분과 함께 두 배우의 눈빛이 떠올리곤 하며,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리면 두 주인공의 엇갈림 이후 다시 서로를 찾아 헤매고, 기어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찾아내던 그 마지막 장면과 함께 잔잔하면서도 어쩐지 점점 가슴이 먹먹해지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주제가가 떠오르곤 한다.
<그 남자의 기억법> 또한 나에게는 그렇게 기억되는 드라마 중 하나다.
아니, 사실 어떤 OST를 떠올려도 어떤 장면 하나쯤은 꼭 떠오르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많이 본 것도 이유의 굉장한 지분을 차지하겠지만, 삽입된 모든 노래가 모두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이 드라마의 큰 장점이 아닐까 한다.
드라마를 생각하면 '나의 오늘이 너의 오늘을 만나'의 기타 전주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흐른다. 동시에, 다르지만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결국 서로의 곁을 지켰던 그렇게 상대를 다시 오늘로, 내일로 데려오던 그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가며, 안온한 기분이 든다.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다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훈과 하진, 두 사람을 떠올리면 오리지널 스코어 중 '사랑이 느껴질 때'가 떠오른다. 각자의 아픈 기억을 안고서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이 가만가만히 서로의 마음에 들어오던 설렘과, 거친 풍랑 속에서 단단하게 서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 결국 서로의 오늘이 되어주는 그 지난하면서도 아릿한 과정을 나에게는 이 음악이 대변하는 듯한 까닭이다. 그래서 듣다보면 결국 마지막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은. 어쩐지 마음이 수런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되곤 한다.
#
드라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장면이었으나, 이 드라마는 내 생각보다 강렬한 색감을 가진 드라마였다.
밤을 비현실적일만큼 푸르게 보여주며 연극 속 조명같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냈던 2회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다만 항상 유효했던 것은 이 드라마가 색으로, 빛으로, 음악으로 많은 말을 전하고 있었단 거다.
2회의 엔딩씬이 평범한 밤거리를 배경으로 한 그 비현실적인 동화같은 그 색감과 연출은, 도리어 죽은 서연을 알지 못하는 이가 서연이 했던 말들을 내뱉는 거짓말같은 상황이 둘의 현실임을 돋보이게 해주었듯이 말이다. 그 때 하진이 건넸던 침묵 속에서 더 많은 대화가 오가는 법이라던 그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은 그 말을 '이해'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연출에 어떤 의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시청자로서 내 나름의 답을 내려보는 재미가 있었고, 크게 그 의도를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주던 순간-영이의 기억이 돌아오려할 때마다 서늘하고 파랗게 탈색되는 것 같던 화면의 색감이라든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제하고서 그냥 말 그대로 '배경'으로만 생각하고 보더라도, 그냥 눈으로 보기에 색감이 예뻤다.
또한 이러저러한 의도가 있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보아도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 표정에 집중해서 보고, 여러번 다시 보면서 색으로, 빛으로 전하려던 말을 추측해보기도 하면서 봤던 회차를 내내 돌려보면서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이 진짜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상관없이 이미 그 감정선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와닿았기에, '이건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작은 것들에도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보는 일들이 드라마를 해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 역시 1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드라마를 여전히 곱씹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
기억상실을 가진 이와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병을 가진 이의 사랑.
죽은 친구의 애인, 죽은 애인의 소울메이트 같았던 친구와의 사랑.
연예인과 앵커의 사랑.
둘의 사랑을 정의하는 단어들은 무던히도 자극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 자극적인 관계를 더없이 신중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둘의 접점이 서연이라는 것은 그저 말 그대로 겉으로 보이는 사실 중 하나일 뿐이다.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진짜 접점은 같은 상처를 지녔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자기 연민에 젖어있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 남들이 말하는 것보다 또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남의 아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
나는 이 드라마가 아픔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가 참 좋았다.
이 드라마 속의 선한 사람들은, 결코 남의 아픔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본인이 그것으로 아픔을 느낀다면 아픈 것이 맞다고 말해준다.
하진에 비하면 자신은 아픈 것도 아니라 말하는 하경에게도, 남보다 아프지 않다하여 니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그 아픔마저 어루만져 준다.
정훈의 병에 대한 태도 역시 그랬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조금 부러운 '능력'으로 다가올지 모를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낯선 이름의 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병'으로서 존재한다.
캐릭터가 가진 설정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는 1회에서 정훈이 과잉기억증후군을 통해 방송사고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딱 거기까지다. 기억으로 방송사고를 막은 순간에조차 정훈은 '불행히도'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느낀다고 말할 뿐이다. 더군다나 방송 도중 서연을 떠올리게 하는 하진의 대답으로 굳어버린 그의 모습에, 정훈의 병을 알고 있고 그를 아끼는 국장마저 병 때문이냐는 질문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의 직업에 도움이 되고 있음에도, 그저 이정훈이라는 존재를 불확실한 변수로 가득한 시한폭탄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병인 것이다. 정훈의 병을 알게 된 하진에게 던진 정훈의 말마저도 그에게 병이 아킬레스건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하진은 그를 감히 동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가 정훈과 가여워하지 않듯이.
그럼에도, 납치된 하진을 찾기 위해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의 기억력이 활용되지만, 그때에조차 작가는 그의 병이 '능력'처럼 보이는 것을 경계한다. 그가 멋지게 하진을 구해냈을 지언정, 결국 그의 추리과정은 드라마 속 형사들이나 탐정들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그의 병을 알고 있는 문성호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일 뿐이였던 것으로 그려낸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정훈은 결국 하진과 함께 행복한 오늘을 살게 되었으나 그렇다하여 그의 병이 나았다거나 이제는 축복처럼 느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보면 그 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다만, 이제는 그럼에도 내일로 나아갈 용기가 되는 오늘, 딱 그만큼의 행복이 그의 곁에 있을 뿐이다.
하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은 생각 없이 그저 즐겁게 산다고 할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때때로 기억이 비어있는 이의 불안은 시시때때로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그에 대해 하진 스스로가 자신을 바보같다는 듯 말하지만, 정훈은 기꺼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한다. 하진이 그랬듯, 그 역시 그녀의 상처를 멋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줄곧,
잊고 싶은 것을 잊지 못하는 것도,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잊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아픔을 느낀다면 아픈 것이라고, 아프다 해도 된다 말해주는 그 다정함이,
타인의 아픔에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이 드라마의 진중함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이어서 참 고마웠다.
#
언젠가 읽었던 소설 속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겪는다. 제대로 분노를 쏟아낼 수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수년이 흘렀다. 여전히 주인공은 세상 모든 죽음에 그의 얼굴을 덧씌우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지하철역에서 사람이 철로로 뛰어드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전철을 탄다. 그리고 말한다.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하면 그렇게 지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이다.
나는 하진을 보면, 어쩐지 저 이야기가 떠오르곤 했다.
잠시도 SNS를 놓지 못하는 그 모습이, 불안 앞에서 술이 섞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 모습이.
그렇게 다 잊고서도, 결국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방증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지난 날의 하진은 발레를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의 기간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평생 해온 것이나 다름 없었을 것을 서연을 구하려다 갑작스레 떠나보내야 했으니, 오히려 서연에게 화를 내던 그 지난 날의 선택은 어쩌면 건강한 애도였으리라. 왠 미친 스토커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애도에 충실했던 이유로, 하진은 서연을 잃어야했다. 그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았을 상실은 전과 같은 애도를 불가능케 했다. 그 애도로 또 어떤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므로. 그렇게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슬픔의 화살은 스스로를 향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잊어야만 했던 것이었고.
그래서일까, 하진의 아픔을 그리는 작가의 태도가 마음에 와닿았다.
작가는 아픈 기억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이들에게, 여전히 누군가를 애도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만하라 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미련하다 손가락질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그 아픔에서 회피한 순간에조차 온전히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잊은 하진에게 겹쳐지는 서연의 모습은, 도리어 아픈 것이 당연하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기억이 없어도 지워지지 않을만큼의 영향력이 있을 정도인데, 그런 사람을 잃었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 수 있겠느냐고-.
때문에 다시 마주한 상처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고 원망하고,
이제는 서연과의 기억을 추억하는 하진을 보며, 비로소 거기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 묵묵한 기다림에 괜스레 눈물이 났었다.
시간이 몇년인데 여태껏 왜 그러고 있나 싶게 미련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아픔으로 스스로를 상처내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 잃은 것이 그토록 아픈만큼 행복한 기억이었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하진을 그려준 것이 고마워서.
잊어야 살겠으면 잊어도 좋고, 내내 울더라도 기억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다고 여하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
내가 이 드라마를 그저 괜찮은 드라마로 스쳐지날 수 없었던 것은, 극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따뜻하고도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이 가장 큰 이유였다.
본인 나름대로 자신은 사랑이었노라 말하는 두 스토커는 서로 꼭 닮아있다. 그들의 망상을 방해하는 대상이 정훈인 것마저도 말이다.
그리하여 정훈을 괴롭히는 일에 일종의 공모까지 한 주제에, 둘은 서로에게 혐오를 드러낸다.
내가 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내가 봐도 저 이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것은 결국 둘 모두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아서, 그 모순적인 장면을 보며 내 상식이 통하는 세계라는 사실에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에게 벌을 주는 방식 또한, 내 상식을 시험하지 않으면서도 또 따뜻한 시선이 묻어난다고 느꼈다.
이미 오랜 세월 수감되어있었던 문성호에게, 현실의 법으로 그를 처단할 수 없어도 천벌은 있다는 듯.
작가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죽은 서연의 곁으로 가는 것도 제 뜻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감독은 그간 쌓아올린 명예를 모두 잃었으며, 그와 똑 닮은 문성호의 최후는 그가 문성호의 길을 답습한다면 맞이하게 될 결말의 암시이기도 하다.
박수창은 기자라는 이름표는 잃었으나 여전히 쉽게 남의 이야기를 입에 담으며 착한 이들을 상처냈다. 언뜻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기만 해서 가슴이 답답해져오지만, 그런 그에게 음식쓰레기로 테러를 하고 사라진 문철의 존재가 작은 위로가 되었다. 착한 사람이 선한 마음으로 내어놓은 용서가, 그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덕분이다.
교수직에서 내려온 것이 고작이었던 성혁의 결말 또한 마찬가지다. 그를 끌어내리고 처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은이 더이상 성혁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가족 사이에서 외로웠고 의사로서 고민하던 태은이 가족들과 행복하게 웃고 바라던 일을 하게 된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사람이 베푼 선의가 배신당하지 않는 것, 나쁜 사람이 바라던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
착한 사람이 바라는 형태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
당연한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기에,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동화적인 그 결말이 꼭 선한 이들에게 주는 선물인 것만 같았다.
#
드라마를 보며 대사를 수없이 곱씹기도 하고 연출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순간들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어떤 표정, 눈빛, 손짓에 담긴 감정을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이해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
감독의 편견에 상처받은 하진에게 건넨 위로에 순간 멍해지던 하진의 표정이나,
벚꽃이 흩날리던 길을 함께 걷다가 문득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복잡한 정훈의 표정과 무심코 내쉰 한숨같은 것들.
소설과 달리 그 어떤 작가의 서술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내 눈앞에 텍스트가 고스란히 쓰여져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성곽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밝게 웃는 하진을 바라보는 정훈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그 어떤 말 하나 없이도 아-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 짐을 홀로 감당하기로 마음 먹은 거구나 하고 알 수밖에 없었다.
정훈과 헤어짐을 결심하고 일에만 몰입해있던 하진의 굳은 표정과 건조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역시,
내가 꼭 하경이 된것마냥 꼭 저러다 한순간 퓨즈가 끊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별을 볼 때는 자꾸만 나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헤어짐을 고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장면이었는데 그들의 표정이, 몸이,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어서.
그 모순마저 사랑이었음이, 절절하게 와닿았으므로.
#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기자에 의해 서연의 이야기가 알려지고, 정훈의 병이 알려지며 함께 견뎌낼 때에도, 결국 하진이 고한 이별의 말을 듣고 결국 더는 하진을 붙잡지 못했을 때에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어떤 상처를 받아도 괜찮다고. 지금보다 더 낮은 곳으로도 기꺼이 갈 수 있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게 더 아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둘의 재회를 보며,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2년이 지난 후 비로소 서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내게 물처럼 밀려와도 좋다고.
너로 인해 잠겨죽어도 좋으나, 그러지 않을 수 있을만큼 내가 넓어졌다고. 당신을 버겁게 하지 않을 자신이, 당신을 버거워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고.
사랑만 있다면 어떤 현실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대로 아낄 수 있게 된 모습이 참 좋았다.
#
<그 남자의 기억법>에서 빼놓지 못할 연출은 역시 색깔을 이용한 것이다.
정훈을 상징하는 파란색, 하진을 상징하는 노란색, 그리고 정훈의 강렬한 처음마다 나타나던 빨간색이 바로 그것이다.
색을 이용한 연출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떠오르게 할 만큼 드라마 속 새파란 밤하늘과 겹쳐져, 어쩐지 나는 이 드라마가 유화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막상 그때는 그러기엔 내용이 그런 느낌은 아니지, 하고 지나쳤었던 생각이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유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화에서 어두운 색을 먼저 칠하고 밝은 색을 칠하듯, 하진과 정훈은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이제 함께 더 행복해질 내일을 향하게 되었다.
또한 한번 칠하면 고칠 수 없는 수채화와 달리 유화는 마르기까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도 둘을 닮았다. 하진이 한 번 회피했던 서연의 죽음을 다시 기억해냈듯이, 정훈이 서연을 그대로 놓쳤던 것과 달리 하진은 스토커로부터 지켜냈듯이, 두 사람이 이별 후 결국 다시 만났듯이 말이다.
드라마 속 세계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말도 안된다 생각했지만 함께 행복해졌듯이, 유화 역시 흔히들 강렬한 색감과 거친 질감만을 떠올리지만 부드러운 분위기 역시 충분히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훈의 기억 속 인상적인 것들, 강렬한 처음의 순간들은 빨간색을 상징한다.
그 강렬함은 마냥 아름다운 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잊을 수 없는 순간일 뿐.
잊혀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기억은, 때로는 아주 좋은 기억일 때도 있다. 하지만 서연의 죽음이 그랬듯이, 아주 슬프고 아픈 기억일 때도 있을 수밖에 없다.
역으로, 정훈을 지탱해주는 기억들의 색채는 놀랍도록 부드럽다. 어떤 ‘색’이 아니라 그저 안온하고 따뜻한, 그 느낌만이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따뜻한 기억 속의 화면은 마치 ‘정훈’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인 인물화가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풍경화 속의 일부인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내내 짙푸르던 밤, 거리의 선명한 조명 아래를 걷곤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재회한 뒤의 청계천 데이트는, 어딘지 모르게 이전의 그 선명함이 덜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까만 밤의 청계천이라는 풍경화 속 어딘가에 담겨있는 평범한 연인들을 담아낸 듯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정훈을 시리게 아프게하는 눈조차 그렇다. 짙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새하얘보이던 눈조차 밤의 배경에 동화된 듯한 인상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들을 찌를 듯 번쩍거리던 플래시들마저, 마치 그들을 비추는 조명일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하진, 푸른 정장을 입은 정훈을 따뜻한 빛의 노란 조명이 감싸며 파란색과 노란색이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것만 같아 보인다.
섞여들어 하나의 그림이 된 두 사람 위로, 플래시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
이런저런 이유들을 길게도 늘어놓았으나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더없이 행복했다.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과, 그리고 드라마를 보던 이들과 매일을 밤낮없이 드라마 이야기로 하루를 꼬박 채웠던 그 시간이 즐거웠다.
아쉬움이 없느냐 묻는다면, 글쎄 그 아쉬움마저 포함해서 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백퍼센트 완벽한 것은 불가능한 법이기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마주하는 법인데, 이 드라마가 그 기로에서 택한 방향이 나와 잘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드라마를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휘몰아치듯 <그 남자의 기억법>이 내 현실이었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함께하는 일상이 되었고 문득문득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는 기억으로 남았다.
나에게 그런 기억을 선물해준, 무기력하게 멈춰 서 있던 나에게 활력과 위로를 전해준 이 드라마를 만든 이들, 그리고 나와 함께 그 시간을 보냈던 이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가올 날들에 더 행복할 당신에게 응원을 전하며.
- 4월의 첫 날,
무명의 그친놈의 1주년 기록
그기억 후기 카테에서 흔치 않은 그기억 후기.......
바빠서 블레 아직 못 본 김에 보기 전의 뇌로 뭐라도 정제된 언어로 남겨두고 싶어져서 시작...
한 편의 글을 쓰고 싶었으나 너무 오랜만에 써서 그건 좀 실패한듯ㅎㅠ
어휘력 실화냐.........국어사전을 몇번 찾아봤는지......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