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급 피겨스케이터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이 사건의 결말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일단 서울동부지방법원이 2024년 11월 이해인이 제기한 ‘징계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미성년자의 강제추행죄에 해당하는지는 피해자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성인이 만 16살 미만의 청소년에게 애정 행위를 하였다는 사정만으로 모두 추행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ㄱ군과 연인 관계”라며 관련 자료를 제시했던 이해인의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가처분에서 진 빙상연맹은 본안 소송에서도 ‘자격정지 징계가 합당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빙상연맹 지도부가 바뀐 뒤에야 입장을 선회했다. 피겨 선수 출신 이수경 삼보모터스 사장이 2025년 2월 신임 회장으로 당선된 뒤 빙상연맹은 소송대리인을 교체했다. 이해인의 대리인 김가람 변호사는 “법원에 조정안을 제출하면서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선 빙상연맹이 조정안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성추행범이라는 누명을 벗고 싶다”던 이해인은 절대 ‘갑’인 빙상연맹과 1년간 소송전을 벌인 끝에 자력으로 구제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 발생 직후 각종 스폰서 계약이 취소되는 것은 물론, 짧은 선수 생활에 치명타를 입었다. ㄱ군과 나눈 사적 대화까지 공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김가람 변호사는 “누명을 벗은 것만으로도 선수는 만족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자가 보여준 대처를 보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요소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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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관리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난 뒤 선수 10명은 호텔에 방치됐다. 빙상연맹에서 주장하는 ‘후배 선수 ㄱ군을 향한 이해인의 성추행’은 훈련이 끝난 뒤 이해인 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최 매니저는 2024년 8월 빙상연맹이 이해인에 대한 징계를 확정했던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 재심의에 출석해 “현장관리 매뉴얼은 준비가 안 됐던 게 사실이다. 굉장히 안타깝고 준비가 소홀했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한술 더 떠 빙상연맹은 사건이 터진 뒤 최 매니저를 보호하고자 관련자들의 입단속에 집중했다. 김 변호사는 재심의에서 “연맹이 이해인 선수를 돕지 못하게 너무나 많은 압박을 줘 탄원서 한 장 받지 못했다. 연맹은 또 국가대표 선수 학부모들에게 최 매니저의 관리 소홀을 놓고 탄원서 작성을 권유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폭로했다. 이 사안을 잘 아는 빙상 관계자는 “이 사건 뒤 연맹은 전지훈련 참가 선수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해 빙상연맹 임원인 최 매니저 구명 운동 및 탄원서 작성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ㄱ군, 이해인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있던 소속사 올댓스포츠는 빙상연맹 조사를 앞두고 이해인에게 진술 조작을 종용했다. 이해인은 디스패치 인터뷰에서 “올댓스포츠가 빙상연맹 조사에 대비해 ‘ㄱ군과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하며 증거로 올댓스포츠에서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전문을 공개했다. 올댓스포츠는 “보드게임 벌칙으로 목을 가볍게 문 것으로 하자”며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했고, 이해인은 이에 따랐다. 그런데 ㄱ군은 빙상연맹 조사에서 올댓스포츠의 제안과 다른 말을 했다.
빙상연맹은 “ㄱ군이 조사에서 (이해인의 행동에) ‘놀라 방을 나왔다’고 말해 피해자의 말을 우선 반영했다”고 밝혔다. ㄱ군이 대리인을 통해 공개한 입장문에도 “당시 ㄱ군은 키스마크가 무엇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 목에 자국이 남아서 많이 당황하고 놀라서 곧바로 방에서 나왔다”고 적시돼 있다. 올댓스포츠의 제안과는 다른 내용의 진술을 한 것이고, 이해인의 진술과도 엇갈린다. 하지만 빙상연맹은 키스마크를 남긴 행위 자체는 ㄱ군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성년자의제강제추행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3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20살이 되면 은퇴하는 피겨 선수에게 빙상연맹의 징계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에 이해인은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재심의를 요청했다. 재심의 당시 위원들 사이에선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인정됐고, “ㄱ군의 진술이 계속 바뀌어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특히 “놀라서 바로 나갔다”는 진술과 달리, ㄱ군은 이해인의 방에 30분 이상 더 머물렀다. 그런데도 위원들은 ‘피해자와의 관계를 고려해 추행에 해당하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김 변호사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사안이 법정까지 가기 전 바로잡힐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명분 없는 전지훈련의 관리자였던 임원을 보호하기에 바빴던 빙상연맹, 선수 보호보단 사태 수습에 급급해 이해인에게 거짓말을 종용한 소속사, 부실한 조사를 바탕으로 징계를 확정한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의 사후 대처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해인은 뒤늦게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가 입은 상처에 책임지거나 사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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