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는 MBC ‘그녀는 예뻤다’의 조성희 작가가 집필했다. ‘그녀는 예뻤다’의 혜진(황정음)이 겪은 시련이 집안의 가난과 함께 외모를 관리할 기회를 놓치는 수준으로 그려졌다면,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서리(신혜선)는 인생을 송두리째 뺏긴다. 열일곱의 서리는 독일 명문 음대에 조기입학을 앞둘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버스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지며 인생이 뒤틀린다. 13년 만에 깨어난 서리가 마주한 현실은 가혹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던 외삼촌과 외숙모는 사라졌고, 살던 집은 팔렸으며,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잡지 못한 손은 굳어버렸다. 집도 가족도 재산도 직업도 없이 거리를 떠도는 서리는 자신은 노숙자가 아니라며 항변하지만, 13년의 세월은 서리를 열일곱의 마음과 서른 살의 육체를 가진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트렸다.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천진난만한 서리의 모습은 여성을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캐릭터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서리의 순수한 성격은 단순히 대상화되기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를 파고드는 능동적인 성격으로 표현된다. 이는 서리와 대척점에 선 인물인 우진(양세종)을 통해 드러난다. 우진은 13년 전 사고가 난 버스에서 고백을 위해 서리가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당시 서리의 이름을 잘못 알았던 우진은 서리가 죽었다고 오인해, 죄책감으로 모든 관계를 극단적으로 단절하는 인물이 됐다.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아 텁수룩한 모습으로, 누가 앉아있든 상관하지 않고 줄자를 뽑아 의자의 치수를 재는 우진의 모습은 수시로 변태라는 오해를 사기까지 한다. 초코파이 위에 앉아 마치 똥 싼 사람같은 모양새가 되어도, 껌을 밟아 어쩔 수 없이 레이스 양말을 신어도 우진은 남들이 보내는 따가운 눈초리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다. 반면 하루종일 굶은 상황에서도 초코파이 먹기를 잊고 남이 떨어트린 돈을 주워주는 서리는 우진의 자기방관을 내버려두지 않고 ‘상관한다’. 우진을 변태로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싸우고, 초코파이가 묻은 우진의 엉덩이를 자신의 가디건으로 가려준다. 그런 서리의 행동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는 지나친 ‘오지랖’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우진이 쳐놓은 관계의 벽을 부수는 인물은 그와 가장 가까운 조카 찬(안효섭)이나 10년지기 친구 희수(정유진)가 아닌 서리다. 상대의 선을 존중하려는 통상적인 예의의 선을 모르고, 말을 가리지 않는 서리의 순수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버스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기 전의 우진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격이었다. 관계를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과 서리가 신경쓰이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우진의 모습은, 서리로 하여금 "아저씨는 은근슬쩍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 말처럼 우진은 서리와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국 서리가 노출하는 약한 모습을 볼 때마다 본래의 따뜻함을 드러낸다. 서리가 자신이 해고당한 줄도 모른 채 출근할 때, 바이올린을 위해 손을 소중히 여기는 서리가 일하다 자신의 손을 혹사시킬 때, 혹은 서리가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 린킴(왕지원)의 연주를 보고 나서 펑펑 울 때마다 우진은 결국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서리를 돌아보게 되고 손을 내민다. 서리에 대한 우진의 회피와 복귀가 반복되는 과정은 두 사람의 로맨스를 발전시키는 요소지만, 일방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도움을 받는 식의 서사와는 다르다. 우진은 정신과 의사에게 “날 대하는 솔직함이 투명할 만큼 다 보여서, 그렇지 못한 날 자꾸 의식하게 만든다”고 털어놓는다. 서리를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우진은 일방적으로 서리에게 도움을 주는 왕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마치 좌우대칭으로 뒤바뀐 모습을 통해 자아를 비추는 거울처럼, 우진과 대척점에 있는 서리의 순수함은 우진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토록 하는 원동력이다.
서로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다만 아무리 능동적이라 해도, 서리의 순수함은 약자로서의 좌표를 한번에 탈출하는 자수성가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한다. 서리가 핸드폰이 없어 전화를 써야 하거나, 사회적인 예절을 몰라 초라한 옷차림으로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그런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은 가정부 제니퍼(예지원)다. 서리는 취업이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양파 까기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의지를 가졌지만, 결국 찬을 보기 위해 집을 수시로 드나드는 친구들인 덕수(조현식)와 해범(이도현)의 도움을 받는다. 현실적으로 서리가 자신이 받은 도움들을 한번에 갚을 능력은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한다. 독립을 위해 집을 떠나는 날 서리는 덕수와 해범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았던 중국집 쿠폰을 남겨 감동을 주고, 제니퍼를 끌어안아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는 그를 동요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리의 마음은 제니퍼나 찬의 친구들을 더욱 강력한 커뮤니티로 묶는 힘이 된다. 남과 한 식탁에 앉기를 꺼려하던 우진이나, 가정부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던 제니퍼가 찬과 친구들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게 되는 건 그 중심에 서리가 앉아있기에 가능하다. 서리가 13년 만에 재회한 옛 친구 형태(윤선우)에게 이들을 모두 묶어 ‘식구’라 표현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비록 여전히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해도, 가족의 부재라는 아픔을 새로운 관계로 채워나가며 극복한 서리의 성장이 빛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는 강자와 약자, 도움을 받는 이와 주는 이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미약할지라도, 타인의 도움을 받아 내딛는 첫걸음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우진보다 앞서 그의 주택에 살아봤던 서리는 열리지 않는 줄 알았던 천장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번엔 제가 도와서 열었지만, 다음엔 아저씨 스스로 열어보세요. 뭐, 살짝 연습 기간이 필요하긴 할 거예요." 서리의 말처럼 성장은 혼자만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우진이 서리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마음을 열기까지는 과거에 이미 큰 상처를 겪어 봤던 제니퍼의 조언이 필요했다. 반대로 제니퍼가 자신의 상처를 버거워할 때, 우진이 “저도 안될 줄 알았다. 예전처럼 편하게 웃는 거”며 “언젠가는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는 건 자신의 경험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서리가 창밖에 비친 우진을 보며 그렸던 '크레센도(Cresendo, 점점 세게)'가 끝으로 갈수록 넓게 열리듯,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는 당장 혼자서는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기대는 '인터미션'을 가지며 서서히 성장해도 충분하다고 속삭인다. 당장의 ‘포르테’보다 ‘크레센도’를 말하는 이 드라마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