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미안했소.
귀하의 그 긴 이야기 끝에..
내 표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오.
귀하에겐 상처가 됐을 것이오.
미안했소..
나는..
투사로 살고자 했소.
할아버님을 속이고...
큰 어머님을 걱정시키고...
식솔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면서도 나는...
옳은 쪽으로 걷고 있으니..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였소..
헌데...
귀하의 그 긴 이야기 끝에..
내 품었던 세상이 다 무너졌소.
귀하를 만나면서 나는..
단 한번도 귀하의 신분을 염두에 두지 않았소.
돌이켜보니..막연히 난...
귀하도 양반일 거라 생각했던 거요.
난 내가 다른 양반들과 조금은 다를 줄 알았소.
헌데 아니었소.
내가 품었던 대의는...모순이었고...
난 여직...
가마 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일 뿐이었소...
하여..
부탁이니 부디...
상처받지 마시오..
그댄 이미 나아가고 있소
나아가던 중에 한 번 덜컹 인거요
그댄 계속 나아가시오
난 한 걸음 물러날테니
그대가 높이 있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선택해도 됐을텐데
무시를 선택해도 됐을텐데
이리 울고 있으니 물러나는 거요
이 세상엔 분명 차이는 존재하오
힘의 차이
견해 차이
신분의 차이
그건 그대 잘못이 아니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진 것 뿐이요
그대의 조선엔
행랑어르신도 함안댁두 살고 있소
추노꾼도
도공도
역관도
심부름 소년도 살고있소
그러니 투사로 사시오
물론 애기씨로도 살아야 하오
영리하고 안전한 선택이요
부디 살아남으시오
오래 오래 살아남아서
당신의 조선을 지키시요
그것들
끼고 가시오
또 넘어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