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사멸시키는 것 만큼은 피하려고 했는데.
-네 놈은 날 사멸할 수 없다.
다른 이의 혼을 사멸시킨다면
그 인과로 너 또한 악귀가 될 터이니.
비릿한 웃음을 짓는 세자의 영혼.
그 어깨에 칼을 꽂아 바닥으로 쓰러뜨린다.
왕가에 태어나, 존귀한 세자의 지위에 오른 인간.
하지만 그 영혼은 저 바닥을 향해 스스로 치닫고 있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욕망과 악의 힘에 짓눌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도 모르는
저 불쌍한 혼을 본다.
저 영혼을 사멸하는 것은, 거대한 대죄.
평생으로도 갚을 수 없는 업을 쌓는 것.
나라는 영혼의 죽음을 뜻한다.
평생을 도망쳐왔던 그 끔찍한 업에 이 몸을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알고 있소.
허나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저주가 풀리지 않아 옹주가 죽겠지.
태초의 귀매를 만난 순간부터
악귀가 되는 건 각오했소!!
망설임 따위 없이 검을 내리꽂는다.
욕망으로 새하얗게 타올랐던 세자의 혼이
이제는 새까맣게 부식되어, 재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나의 혼에도, 종말의 시간이 온다.
아아.
느낄 수 있다.
이 귀의 세계 건너편,
생의 세상에 죽음이 선연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것이 악귀의 힘인가.
온 세상이 죽음으로 물들어가 편안해진다.
끝끝내 인간이려 붙들고 있었던 죄의 무게가 가벼워간다.
도덕도 없다. 마음도 없다.
평생을 괴롭혀왔던 그 수많은 인간의 조건과 기준들이 사라져간다.
모든 것이 이대로 편해져 갈 것이다.
그대만, 아니었다면.
옹주, 생강.
잠든 듯 쓰러진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는다.
-내 남은 양기를 다 줄테니
폭주할 듯한 정신을, 겨우 밝히고 있는 내 마지막 양기를.
그녀에게 불어넣는다.
나에게 양기를 주었던 그녀에게,
목숨을 주었던 그녀에게.
그리고,
그 귀한 마음을 주었던 그녀에게.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삶이란 것을.
살아도 된다는 것을.
그러니 그대는.
-돌아가시오.
그녀의 심장을 두드린다.
저 수면 아래 가라앉은 그녀의 영혼을 생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그대가 몇 번이고 내게 해주었듯이.
살아가시오.
감나무에 햇빛이 고이 열리는 계절,
그대의 웃음이 꽃잎처럼 흐드러지던 햇살 아래
그 수많은 아름다운 나날들을 그대는 살아가시오, 부디.
그렇게 홀로 남아, 스스로를 본다.
양기를 소진한 몸.
추해진 얼굴.
귀매에 단단히 묶인 쇠사슬.
웃음이 난다.
이제 이 몸은 완연한 괴물이다.
이 구천, 귀의 세계에 걸맞는 추악한 괴물이다.
저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태초의 귀매가 계약을 이행하라 나를 부른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운명과 싸울 것이다.
그것이 소중한 당신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니까.
결코, 악귀란 명으로 내 삶을 끝맺지 않으리라.
-기왕 이렇게 된 거
한판, 거하게 놀아보자.
악귀가 된 것도 모자라 귀매에게 혼이 먹히느니 차라리..!
뛰어든다.
태고의 어둠 속으로.
마지막까지 당신이 나를 부르던 그 이름.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그 이름.
그것은 저 땅끝이 아닌
아홉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
나는 ‘구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