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사통으로 대역죄인이나 가는 탐라까진 안 갔을 거 같은데
아래는 자가 모델로 추정되는 복창군 생애인데 큰 틀은 같다. 궁녀 사통으로 유배형, 왕권 위협으로 결국 사사
복창군이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675년 3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소를 올려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궐에 출입하며 궁녀와 간통하였다고 고발하며, 이른바 ‘홍수의 변(紅袖之變)’을 일으켰다. 이후 이들의 처벌을 두고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결국, 명성왕후의 증언으로 간통은 사실로 인정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몇 달 후 석방되어 1677년(숙종 3)에는 진주사로 중국 청나라에 파견되는 등 외교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복창군의 존재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환국 정국 속에서 붕당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언제든지 다시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다.
결국,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인해 이른바 ‘3복의 옥’이 일어나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