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신세계와 모자무싸.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고 있는 두 드라마.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둘 다 일종의 신데렐라 서사처럼 느껴진다.
멋진신세계는 대체 역사물에 가까운 로코다.
장희빈을 연상시키는 희대의 악녀 강희빈, 아니 강단심이 현대에 회귀하며 재벌 3세 남주 차세계와 만나 못다 한 사랑을 이어가는 이야기.
반면 모자무싸는 입봉조차 하지 못한 채 퇴물이 되어가는 중년 감독 지망생 황동만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실패와 무가치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대신 세상을 비난하며 주변에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어리고 예쁘지만 감정 회로 어딘가 고장난듯한 여주가 이해하고 품어주며 구원하는 이야기다.
두 작품은 같은 “구원 서사”인데,
구원받는 이유가 전혀 다르다.
멋진신세계의 강단심은 낯선 시대에 떨어졌음에도 살아남기 위해 계속 움직인다.
배우고, 버티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세상과 싸우면서도 의지를 놓지 않는다.
차세계는 그런 강단심에게 점점 끌린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자신감, 안하무인처럼 보일 정도의 당당함, 그리고 끝없이 살아남으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극 중 차세계는 강단심에게
“가여워서 도와줬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강단심은
“내가 가여워?”라고 되묻는다.
그 질문에는 분노가 담겨 있다.
그녀는 동정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자무싸의 황동만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과 좌절, 두려움을 토로하고,
여주는 그런 그를 스웨터 안으로 품어준다.
정말 알을 품는 어미처럼.
모자무싸의 여주는 황동만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고, 보듬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차이가 조금 불쾌했다.
여성 신데렐라 서사의 여주들은 보통 선함, 성실함, 젊음, 생존 의지처럼 누가 봐도 납득 가능한 “판타지 자본”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고 노력해야만 사랑받고 구원받는다.
하지만 남성 신데렐라 서사의 남주들은 종종 무기력하고 찌질하며 세상 탓을 한다.
그럼에도 이해받고 품어지고 구원받는다.
여성은 진취적이어야 사랑받고,
남성은 무너져 있어도 사랑받는다.
둘 다 누군가를 구원하는 이야기인데
왜 구원의 조건은 이렇게 다른 걸까.
아마 그래서 나는
모자무싸 쪽에는 끝내 이입하지 못할 것 같다.
(잘가세요.
다신 볼 일 없기를.)
반면 멋진신세계의 강단심은 계속 응원하게 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살아남으려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랑보다도
그녀 자신의 삶과 의지를 더 응원한다.
그리고 그녀의 구원이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방식이 아니라,
끝내 그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