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0만 관객을 넘어선 <왕과 사는 남자>의 질주가 여전히 뜨겁다. 역대 25번째 한국 천만 영화라는 기록에 이르기까지 <왕과 사는 남자>가 세운 역사는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 손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CJENM 영화사업부 투자·기획제작팀에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기획하고 <연애 빠진 로맨스>의 프로듀서를 담당했으며 <베테랑> 등의 투자를 진행한 임은정 대표는 <왕과 사는 남자> 시나리오를 들고 나와 제작사 ‘온다웍스’를 차렸다. 3년만 버텨보자던 그의 목표는 올해 4월1일, 온다웍스가 정확히 3년차가 되기 한달 앞서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예기치 못한 성과를 일구어냈다. <왕과 사는 남자>의 기획 초기 단계부터 온다웍스가 앞으로 내놓을 영화들에 관해 임은정 대표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왕과 사는 남자> 시나리오를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작품의 어느 부분이 강점이라 판단했나.
= 모든 기획자가 여러 작품을 준비하지만 그게 전부 영화화될 수는 없다. 진행 과정에서 포기하거나 특정 시기에만 유효한 아이템이라 판단해 접기도 하는데, <왕과 사는 남자>는 전 세대를 아우르면서 다양한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세대가 다를지라도 바라는 인간상이나 정의에 관한 공감대가 존재한다고 여겼기에 <왕과 사는 남자> 아이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엄흥도를 교육열이 강한 부모로 설정한 것이나, 그가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유치하려 노력하는 모습 등 과거와 현대가 맞닿을 수 있는 설정은 황성구 작가와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다. 내 의지로 오랜 시간 품에 안고 있던 작품이 작가, 감독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갈수록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졌다.
- 사극을 택한 이유도 있나. 기획자로서의 취향이 반영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 신기한 게, 본래는 사극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는데 기획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사극 아이템이 많아졌다. 현대물에 비해 스토리를 자유롭게 구상하기 좋은 포맷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사극을 싫어한 게 아니라 사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걸 인지했고, 그럼 내가 좋아할 만한 사극을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본격적으로 사극 기획을 시도했다. <왕과 사는 남자>의 최초의 원안을 두고 논의할 땐 영화 <타인의 삶>에 관해 주로 이야기했다. 비밀경찰이란 설정이 엄흥도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느껴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되 엄흥도의 시선에서 본 역사를 다루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사극이라 고증이 필요하고 준비할 것도 많아 오히려 제한이 많을 줄 알았다.
=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준비할 게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경험을 더 쌓은 다음에 <왕과 사는 남자>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작품 들어가는 순서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행히 타이밍이 잘 맞아 지금의 감독, 배우, 제작진, 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님과 함께할 수 있었고 큰 행운이라 여긴다.
- <리바운드>를 본 뒤 장항준 감독에게 <왕과 사는 남자>의 연출을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장르도 서사도 다른 <리바운드>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나.
= 기획자로서 시나리오 읽는 일을 오래 해오면서 작가 장항준에 대한 신뢰가 이미 있던 상태였다. <기억의 밤>을 보곤 글도 잘 쓰고 연출력도 준수한 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영화를 보면 감독의 성품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왕과 사는 남자>는 마음이 따뜻한 감독님이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리바운드>를 관람했고, 반드시 장항준 감독님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건을 매듭짓는 방식, 감정을 이끄는 힘이 정말 좋았다. 물론 장 감독님이 사극을 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고려하는 작품을 잘 다룰 수 있는 시선과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 제작 현장에서 주요하게 고려한 부분은 무엇이었는지도 들려준다면.
= 시나리오 각색본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감독님이 계속 강조하셨다. 지금 우리가 훌륭하게 생각하는 대사가 현장에 가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그렇지만 배우가 잘 소화하고 배우들간의 호흡이 좋으면 잘 전달해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현장에서 몰입할 수 있는 조건에 신경 썼다. 사전 리딩을 갖는 자리에서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 사이의 의견을 잘 조율해나가려고 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총 51회차로 콤팩트하게 촬영했는데 예산 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신 위주로 정리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촬영 현장과 배우들이 모두 잘 준비되어 있어서 2~3회차로 잡아둔 난이도 있는 감정신들이 1.5회차로 줄었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다음 신을 준비해나갈 수 있었다. 프로덕션 부분에서도 의상, 미술팀이 화면에 잡히지 않는 부분까지 고증을 지키며 꼼꼼하게 준비해주었다. 화면에 전부 잡히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 캐스팅 이야기도 묻고 싶다. 단종 역에 박지훈 배우를 추천한 장본인이지 않나. 아이돌 시절 박지훈 배우가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했을 때 ‘국민 프로듀서’로서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고.
= 이전 직장이 CJ ENM이었고 <프로듀스 101> 시즌2가 같은 계열사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가 투표해서 아이돌을 만든다’는 프로그램의 취지가 당시 회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방송 시간에 누군가의 집으로 다 같이 퇴근해 본방 사수를 하는 게 일종의 사내 문화였다. 그때부터 박지훈 배우를 눈여겨본 건 사실이다. (웃음) <약한영웅 Class 1> 때부터 연기도 잘한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고, 초기부터 단종 역의 캐스팅 리스트에 있었지만 장항준 감독님께 박지훈 배우를 제안하기까지는 많은 작업이 필요했다. 쇼박스 투자팀 담당자들을 만났을 때 ‘한번 뚫고 나가보자’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오갔고, 감독님도 박지훈 배우를 만났을 때 그 에너지를 정말 마음에 들어하셨다. 당시 휴가를 보내고 온 박지훈 배우가 워낙 건장해 체중을 감량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캐릭터에 관한 적합도나 연기에 관해선 의심한 적이 없다. 제일 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러해 뿌듯하다.
- 유해진, 유지태, 전미도 등 배우들의 조합이 신선하다. 이들에 관해선 어떤 의견을 줬나.
= 유해진 배우는 알려진 대로 감독님이 섭외를 했다. 한명회는 지략가에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다는 게 중요했는데, 감독님이 풍채도 좋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줘서 유지태 배우가 물망에 올랐다. 이틀 만에 답을 받은 게 나로선 상당히 짜릿한 경험이었다. 전미도 배우도 감독님이 먼저 제안했는데 그때 전미도 배우가 잠시 소속사가 없을 때였고 빠르게 식사 자리를 마련해 대화가 잘 성사됐다. 새로운 조합을 떠올리려 했다기보다는 1순위로 고려하던 배우들의 캐스팅이 타이밍에 맞게 잘 이루어졌다.

- <왕과 사는 남자>의 누적 관객수가 1200만명을 넘어섰다. 초반부터 고려했던 <왕과 사는 남자>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소구되는 포인트였다고 보는지.
=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판단한다. 황성구 작가와 쓴 초안이 2시간 반 가량의 분량이었기에 장항준 감독과 가장 먼저 한 작업도 분량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의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초반의 의도를 잘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더 좋은 영화를 만들고, 관객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그 관점에서만 영화를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시사회 때 관객 반응을 체크하러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데, 내가 처음 기획할 때 의도한 것들이 영화 후반부에 고스란히 있었다. 100번도 넘게 편집본을 보면서 운 적이 별로 없는데 시사회 때는 눈물이 났다.
- 신생 제작사에서 천만 영화가 나왔다. 현재의 극장가 상황을 생각할 때 여러모로 중요한 결과다.
= <왕과 사는 남자>가 500만~600만명 정도 됐을 땐 온다웍스가 준비 중인 다른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끔 힘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천만 영화가 되고 나선 전 회사 동료, 투자사, 제작사들로부터 다양하게 연락을 받았는데 종종 덕분에 한국영화에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천만의 의미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단순히 온다웍스의 영화가 잘됐다는 의미를 넘어 어떤 식으로든 업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다. 여기서 그치지 않게끔 앞으로도 열심히 잘해나가보려 한다.
- 언제부터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나.
= 어릴 때부터 영화, 드라마, 소설, 시 등 스토리를 다루는 매체에 관심이 컸다. 그러다 대학생 때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교환학생으로 호주 영화학교에 갔다. 수업을 들으며 배급, 제작, 프로듀서의 역할에 관해 익혔고 반대로 연출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웃음) 내 재능은 주변 동료들 중 누가 글을 잘 쓰고, 연출을 잘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능력이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데 있었다. 프로듀서 일에 재미를 느껴 CJ ENM에서 기획 PD를 뽑는 공고를 보고 입사를 했다. 하루에 2~3개씩 시나리오를 읽고, 직접 영업을 뛰며 시나리오를 픽업하고, 아티스트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개발 단계부터 함께하며 이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고 여기까지 흘러오게 됐다.
- 온다웍스를 차리게 된 건 자신의 작업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나.
= 진로의 갈림길에 선 순간에 게임 회사, 다른 제작사의 제안도 받았지만 함께하던 작가, 감독들의 작품을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지금까지 해온 업력을 믿고 3년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나와 온다웍스를 차렸고, 내 것을 해보자는 마음은 그다음에 생겼다. 온다웍스는 함께하는 감독, 작가들과의 커뮤니티라고 생각한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있지만 그것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좋은 아이디어를 지닌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잘 펼쳐내고 싶은 바람이 더 크다.
- 온다웍스라는 사명은 어떤 의미인가.
= 포르투갈어로 ‘파도’를 뜻한다. 포르투갈에서 서핑할 때 사람들이 ‘온다, 온다(Onda)’를 외치며 설레는 표정으로 파도를 기다리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흔히들 인생의 고난을 파도에 비유하곤 하지만 나는 서퍼니까 파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흐름을 잘 잡아 타면 된다. 웍스를 붙인 건 ‘온다의 작품’, 그리고 ‘파도가 일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내며 계속 좋은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
- 제작사마다 추구하는 작품의 스타일과 결이 다르다. 온다웍스가 지향하는 바는 어떤가.
= 초창기에는 장르에 관계없이 <왕과 사는 남자>처럼 투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많이 기획했다. 현재로선 대중이 어떤 정서와 주제를 원하는지 분석하고 그것을 건드릴 작품을 내놓는 것이 목표다. 가령 양자역학이 유행하는 것도 사람들이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에 관해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 아닐까. 영화는 그 갈망의 감각을 파악해 더 쉽게 제시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사람들은 슬픔과 같은 감정을 자기 방식대로 해소한다. 그 감정을 해소할 방식을 새롭게 제안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 또 어떤 영화들을 준비 중인가.
= <죄 많은 소녀>의 김의석 감독과 경성 배경의 액션 장르물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좋은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황성구 작가가 각본을 쓰고 <올빼미> 안태진 감독이 참여한 사극액션물도 캐스팅 첫삽을 떴다. <왕과 사는 남자>처럼 특정 시기를 지칭하거나 실존 인물이 등장하진 않는다. <라이온 킹>과 비슷한 영웅의 탄생기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그 밖에도 시리즈물을 포함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여러 작품을 준비 중이니 기대해주시길 바란다.
https://naver.me/xSBzRT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