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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파반느' '극장의 시간들' 고아성을 읽다

무명의 더쿠 | 20:19 | 조회 수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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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아침, 고아성의 목소리가 애서가들을 깨운다. 그는 2025년 3월부터 MBC <라디오 북클럽 고아성입니다> DJ로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 시간만큼은 연기하는 대신 낭독한다. 답변하기보다 질문한다. 엔딩 멘트를 고심하고, 때로는 직접 게스트를 섭외한다. 절친한 배우 류현경, 박정민부터 윤가은이종필, 조민호 감독이 그의 부름을 받았다. 2018년 <한국일보>인터뷰를 계기로 연을 맺은 시인 김민정은 벌써 두번이나 북클럽에 다녀갔다. 독서를 테마로 한 당시 인터뷰에서 박완서와 아니 에르노, 롤랑 바르트와 정세랑을 가로지르며 애정을 고백한 고아성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책 얘기를 하다 보면 제 얘기를 너무 많이 할까봐서요, 끝도 없이 풀어질 것 같아서요, 그것만 걱정하면서 왔어요.”


그토록 책에 진심이어도 크랭크인 이후 전국 팔도와 바다 너머를 오가야 하는 배우의 삶에 고정 스케줄 하나를 들이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의 영화가 용기를 내도록 도왔다. “10년 전 받아본 <파반느>의 시나리오에도 완성된 영화에서와 같이 93.1MHz(KBS 클래식FM)가 언급된 대사가 적혀 있었어요. 그때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점점 친해졌어요. <파반느>에 미정의 편지 내레이션이 있죠? 그걸 책 읽듯 연습한 시간이 굉장히 길었어요. 그때부터 낭독이라는 취미도 갖게 되었어요. 라디오를 1년 동안 진행한 시점에서 <파반느>를 다시 보니 DJ를 하기까지 이 영화의 영향이 컸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넷플릭스를 통해 관객을 만난 <파반느>에 이어 씨네큐브가 개관 25주년을 맞아 제작한 앤솔러지 <극장의 시간들>도 3월18일 개봉한다. 고아성은 그중 윤가은 감독이 연출한 단편 <자연스럽게>에 출연한다. 영화 속 영화의 ‘감독’ 역이다. 창작이란 “호기심의 영역이지만 결코 침범하지 않을 일”이라 여겨온 고아성은 <자연스럽게> 덕에 “그 영역을 한발 옆에서 지켜본 느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창작의 범위를 좁혔을 때의 이야기다. 고아성은 이종필 감독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을 함께하기 전부터 <파반느>를 준비했고, 프로듀서와 다름없는 자세로 이 작품을 지켜냈다. “나의 첫 멜로는 <파반느>여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고아성은 곧장 설명했지만, 그 대답이 정리되기까지 오랜 고민이 필요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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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이 어색한 여자에 대하여


원작자 박민규가 ‘작가의 말’에 썼듯 <파반느>의 주인공은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다. 요약하자면 고아성도 그 점에 끌렸다. “요즘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외모로 여성을 규정하는 묘사들이 많이 나와요. 처음 읽었을 때는 그런 문장들이 와닿았어요. 이종필 감독님은 ‘못생긴 여자’로 그려지는 미정을 연기하기에는 제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달랐거든요. 저는 오랫동안 아역배우로 살아오면서 뭐랄까, 제 외모를 컨트롤할 수 있는 시기가 없었잖아요. 제 얼굴의 단점, 약점을 오랜 세월 숙고해온 사람으로서 미정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했죠.” 그가 얘기한 ‘컨트롤’의 의미를 궁금해하자 고아성이 좌중을 웃겨버렸다. “쉽게 말하면, 성형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는 거죠! 어렸을 때의 얼굴이 이미 다 노출되었기 때문에 남들 모르게 제가 원하는 성인의 얼굴을 가질 수 없었어요.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제게 늘 있었고, 과거에는 외모만으로 주연, 조연, 단역을 비교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저조차도 무언의 에너지를 느꼈어요. 나는 주인공을 할 수 없겠다는. 요즘 정서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 꺼내기 어려웠는데, 오늘에서야 말하게 되었네요.”


이종필 감독에게도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만 캐스팅이 확정된 뒤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8, 9년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봉준호 감독님과 <설국열차>(2013)라는 긴 프로젝트를 했잖아요. 제 기억에 구두로 출연 제안을 받은 게 2007년인데, 영화가 개봉한 게 2013년이에요. 그다음부터 이렇게 오래 품고 있는 프로젝트는 다신 없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작품에 집중했다가 빠져나오는 시간이 필요한 데다, 이런 작품에 한번 뛰어들면 그 이후의 삶을 잘 생각 못하거든요. <설국열차>를 찍고 방황하는 시기가 길었어요. 그래서 또 이런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파반느>가 이종필 감독님의 오랜 꿈인 걸 알고 있었으니 응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같이 했잖아요. 그러면서 <파반느>를 기다릴 수 있었어요.”


이어서 이종필 감독과의 작업을 회상한 그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파반느>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리켰다. 전자에는 그 누구의 집도 나오지 않지만, 후자에는 주인공들의 방이 등장한다. “인물의 집이 나올 때 굉장히 예민해지는 편”이라 알아챈 것이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인물의 속내가 다 보이는 것 같아 화면에 방이 드러날 때마다 발가벗겨진 기분”마저 든다고. 그래서 고아성도 미정의 방에 신경 썼다. 미정의 단출한 책상 앞 벽에는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사춘기>가 붙어 있고, 정신과 의사인 윤홍균 원장이 쓴 <자존감 수업>의 책등도 살짝 엿보인다. 감독과 미술팀의 공이다. 고아성은 여기에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빼기를 택했다.


“시나리오에 미정이 거울을 보고 화장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미정이 방에 거울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미정이가 화장을 하고 싶어졌을 때 화장실에 가서 거기 달린 거울을 보고 할 것 같은 거예요. 미정이의 의지로 설치한 게 아닌 거울을 봐야 할 것 같았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옷장 문짝에 붙은 거울 앞에 밥상을 가져와 화장품을 펼쳐놓고 화장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감독님과 미술팀이 제 아이디어대로 세트를 구현해주셔서 무척 감동했어요. 그외에도 옷장을 열었을 때 보이는 몇벌 안되는 옷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주신 덕에 미정이 된 상태로 집에 있는 듯이 편안했어요.”


거울 앞이 어색한 여자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를 칭찬한다. 고아성은 시나리오상에도 경록(문상민)이 미정의 외모를 평가하는 대목은 단 한줄도 없었다고 전했다. 높고 여리던 미정의 음성은 경록과의 관계가 굳어질수록 단단해진다. 심지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 변화를 아는 만큼 “목소리를 정말 잘 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편지를 제대로 읽고 싶었다. 겁먹은 미정이 경록을 떠나 있을 때 쓴 편지이기에, 내레이션이 들리는 동안 미정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소리만으로 경록에게, 관객에게 미정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아성이 낭독이라는 취미를 갖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파반느>를 찍으며 암송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끼고 다닌 시도 있다. 제목도 <시>다. 황인숙 시인은 각종 브랜드명을 시어로 승화해 “백화점 명품관은 그녀의 시집”이라 적었다. 시인은 그 위에 박완서의 문장도 인용했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고아성은 미정과 경록의 일터이자 데이트 장소라 할 수 있는 백화점에서 이 시를 꺼내 들었다.


“실제 백화점 영업이 끝난 밤에 촬영했어요. 그렇게 지하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지상으로 올라올 때쯤이면 건물 전체에 불이 팍팍팍 켜져요. 그게 참 낭만적이더라고요. 그 순간 황인숙 시인의 <시>가 떠올라 그 시집을 들고 촬영장에 다녔어요. 사실 원작에서는 백화점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곳으로, 인간의 진실된 마음과 대조된 곳으로 나와요. 하지만 박완서 작가의 문장에서 사치와 낭만은 동떨어진 가치가 아니에요. 우리 영화의 백화점에도 두 차원이 공존할 수 있다고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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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 아이가 궁금해서


재해석과 재구성을 거쳐 빛을 본 고아성의 <파반느>는 “영화 인생을 함께해온 엄마가 읽은 마지막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이것까지 공개되면 엄마가 아는 내 영화 인생은 일단락되는 것”만 같아 이 챕터를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인물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지만, 이번에는 더 성숙해진 듯하다”고 돌이킨 그는 <파반느> 다음으로 윤가은 감독의 손을 잡았다. 이로써 <극장의 시간들>에 참여한 세 감독인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와 모두 일한 배우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이종필 감독에게 “뭐라도 돕겠다”고 나선 결과다. 얼씬도 하지 말라던 이종필 감독이 실은 윤가은 감독에게 고아성 배우의 연락을 귀띔했고, 윤가은 감독이 옳다구나 고아성 배우를 불렀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단편 <자연스럽게>는 ‘자연스러움’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감독과 어린이 배우들의 한나절을 담고 있다. 윤가은 감독은 직접 감독으로 출연하려다가 고아성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한마디로 “정말, 너무, 흥미로웠다!”


“아역배우 출신이라 제게 여전히 그때의 시선이 남아 있다고 여겨왔는데, <자연스럽게>는 그걸 재차 확인해보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저한테는 어린이들이 연기한 걸 편하게 못 보겠는 마음 같은 게 있거든요. <플로리다 프로젝트> 같이 아역배우가 훌륭한 연기를 해낸 작품을 봐도 그래요. 그 아이가 연기할 때 어떤 상황이었을지, 어떤 감정이었을지 자꾸 궁금해지니까요. 이걸 연습해온 걸까? 감독이 디렉션을 준 걸까? 알고 싶은 거죠. 제 나름대로 그 연구를 평생 해왔으니까요.” 그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쏟아내보기도 했다. 윤가은 감독은 정확한 시나리오가 아닌 가이드라인 정도의 대본을 나눠줬기에, 고아성도 적극적으로 뜻을 펼쳤다. 학교에서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8)로 역사 교육을 받는 2010년대생 배우들도 대선배를 곧잘 따랐다.


“감독과 아이들이 식사하다가 감독이 아이들에게 궁금한 걸 계속해서 묻는 장면이 있잖아요. 다 제가 어렸을 때 감독님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 혹은 감독님들이 제게 물어봤던 것들을 조합한 질문을 토대로 찍은 거예요. 원래는 윤가은 감독님에게 빙의해서 연기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제가 그동안 봐온 여러 감독님들의 모습을 조금씩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이 작품을 하면서 연기의 짜릿한 순간을 경험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윤가은 감독님을 도와 아역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역할 정도만 하리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어느새 감독님들이 휴식 시간에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까지 제가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영혼’까지 보일 기회가 드물거든요. 그걸 해내서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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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성은 이제 그 기쁨을 연극에서 느껴보려고 한다. 그는 올해 5월7일부터 31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무대에 오른다. <바냐 삼촌>의 소냐 역이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을 읽으며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는, “사람을 표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이 전제는 고아성에게 중요하다. ‘사람’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하고 실천하는 건 “90년대부터 아역배우이자 여배우로서 활동해온 억압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배우로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가 온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버릇을 저도 모르게 다시 꺼내곤 하거든요. 이제 그로부터 실질적인 졸업을 해야 할 때예요. 연극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하면서 새로 쌓아가고 싶어요. 이전까지 했던 걸 다 버리고서라도.” 인터뷰를 마친 며칠 뒤부터 첫 연극 연습에 돌입한다는 그의 눈은 이미 소냐의 독백을 머금고 있었다. 길고 긴 낮과 밤을 어떻게든 견뎌보자고,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온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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