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추억'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보여준 엇갈린 선택
[데일리안 = 전지원 기자] 여성 연대는 레트로 드라마에서 종종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 소모돼 왔다. 반환점을 지난 '언더커버 미쓰홍'이 이 익숙한 공식을 깨고 끝까지 여성 서사를 지켜낼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8일 방송된 '언더커버 미쓰홍'(이하 '미쓰홍') 8회는 수도권 기준 최고 11.1%, 전국 기준 최고 10.2%를 기록하며 3주 연속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 2049 시청률에서도 동시간대 전 채널 1위에 올랐다. 1997년 여의도 증권가를 배경으로 한 '미쓰홍'은 금융감독원 엘리트 감독관 홍금보(박신혜 분)가 고졸 말단 여사원 홍장미로 위장 잠입해 금융 범죄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다. IMF 직전이라는 시대적 조건,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조직 구조 속에서 이야기는 여성들의 공조 서사를 전면에 배치한다.
반환점을 지난 현재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후반부 전개에서 러브라인보다 여성 서사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여성 중심 레트로 드라마가 이 질문을 피하지 못하는 데에는 선례가 있다. 지난해 방영된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 버스 안내양 기숙사를 배경으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그리며 출발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와 치정 갈등이 서사를 잠식했고, 여성 인물들의 선택 역시 연대보다는 연애 관계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그려지며 결국 '용두사미'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성 서사가 로맨스에 기대지 않고도 서사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1995년을 배경으로 말단 여사원 이자영(고아성 분)·정유나(이솜 분)·심보람(박혜수 분)은 토익 600점 승진 조건 아래 영어토익반에 모이지만 자영이 공장 심부름 과정에서 불법 폐수 배출 현장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야기는 개인의 승진 경쟁에서 조직의 문제를 추적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후 세 사람은 각자의 위치를 활용해 자료를 확보하고 증거를 연결하며 회사의 은폐 정황을 단계적으로 드러내는 공조를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위기를 돌파하는 결정적 계기는 남녀 관계나 연애가 아니라, 정보 공유와 역할 분담을 통한 협력에서 나온다.
'미쓰홍'은 현재까지는 이 성공 사례에 더 가까운 선택을 하고 있다. 미혼 여성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로 만난 여성 캐릭터들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과 판단력을 가진 공조 파트너로 기능한다. 고복희(하윤경 분)가 출소한 오빠에게 폭력을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홍장미가 직접 개입해 상황을 막아서는 장면, 홍장미가 주가조작 사건의 책임을 떠안을 뻔한 국면에서 룸메이트들이 사내 인터넷망을 활용해 소문을 퍼뜨리며 위기를 분산시키는 전개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사건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는 로맨스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의 판단과 협력에서 나온다. 이는 여성 서사를 내세우되 결국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수렴되던 기존 레트로 드라마와의 분명한 차별점이다.
다만 관건은 후반부 전개다. 홍금보의 전 남자친구 신정우(고경표 분), 홍장미로 분한 금보를 돕는 알벗 오(조한결 분)와의 러브라인이 본격적으로 확장될 경우 이 드라마 역시 익숙한 서사적 관성에 끌려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성 캐릭터들의 선택과 연대가 끝까지 유지될지 아니면 관계의 긴장을 높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될지는 아직 열려 있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남자 앞에서 무너지는 고전적 신파가 아니다. 시대적 차별과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능동성이다. '미쓰홍'이 이 기대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는 레트로 여성 서사가 한 단계 진화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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