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면 새콤한 김치를 곁들인, 윤기 잘잘 흐르는 흰 쌀밥이 떠오른다. 화려한 수라상은 아니어도 배는 물론 마음까지 뜨끈하게 덥히는 우리네 밥상처럼 정감이 넘친다. 거창한 묘기 없이, 그저 이야기만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한국 영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의 '공백의 시간'을 유배지를 관리하는 보수주인 엄홍도와 마을 사람들로 채웠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엔 폐위된 단종이 나약하기만 한 인물로 남았지만, 장 감독은 엄홍도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료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인간 이홍위의 정감 어린 면모를 차곡차곡 쌓았다. 장 감독 특유의 재치와 따뜻한 시선 속에서 이홍위는 쫓겨난 어린 선왕이 아닌,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꿈꿨던 조선의 지도자로 재탄생했다.
멈춰있는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게다가 감독의 가치 판단이 개입되면 자칫 역사를 왜곡하거나 특정 사상을 주입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장 감독은 역사의 시작점과 도착점은 정확하게 찍어둔 채 엄홍도와의 우정이라는 씨도 뿌리고, 이홍위가 생의 의지를 되찾는 꽃도 심으며 개연성과 감동을 모두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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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줄로 각인된 인물들의 틀을 깨는 작업엔 배우들의 공도 컸다. 사람 냄새 나는 엄홍도 역은 유해진이 연기했는데, 가히 그의 '커리어 하이'라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호연을 선보였다. 영화 속 표현을 빌려 '배운 것 없이' 한 없이 가벼운 인물인데 동시에 아들을 향한 깊은 부성애, 이웃들을 돌보는 촌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묻어난다.
유해진이 주종목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면, 이홍위 역의 박지훈은 사극 영화 첫 도전에 신기록을 달성한 느낌이다. 캐스팅부터 호평이 있었지만,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단지 슬퍼 보이는 눈빛과 아역 배우 겸 아이돌 출신의 내공으로 버무려낸 '1인분'을 넘어, 이홍위 그 자체를 보여준다. 폐위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다채로운 감정의 변주를 매끄럽게 소화했다. 특히 눈빛과 목소리에서 발현되는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유해진이 아닌 엄홍도를 상상할 수 없듯, 박지훈이 아니었다면 이홍위도 지금과 같은 설득력을 갖추진 못했을 것이다.
웃음과 눈물이 모두 있는 영화다. 그런데 50:50으로 적당히 타협한 게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100%의 화력을 보여준다. 그 진정성 때문에 깔깔깔 배 아프게 웃다가, 또 코끝 시리게 울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제대로 된 한국 영화란 이런 것 아닐까. '왕과 사는 남자'가 얼어붙은 극장가에 기분 좋은 반전을 꾀하리라 기대된다. 러닝타임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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