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퀘어 [씨네21/특집] 배우 안성기가 특별했던 이유
113 2
2026.01.23 20:48
113 2

saiXDA



배우 안성기를 수식할 때 종종 끌려나오는 말이 있다. 그가 무채색의 배우라는 묘사다. 대개 배우를 도화지에 비유하면서 어느 색이든 타고난 것처럼 소화한다고 말할 때의 그 무채색이기도 하지만, 특유의 과시 없는 점잖음을 일컫는 수사였다. 혹은 그의 미소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약간의 고독을 향한 알아차림이기도 했다. 임권택, 배창호, 이장호 감독을 비롯해 1980년대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이끈 젊은 감독들- 박광수, 이명세, 장선우- 의 주요작과 데뷔작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안성기가 있었다. 그러나 안성기의 이름을 각인한 덕목은 강렬하고 압도적인 개성이나 스크린 스타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임권택 감독은 그를 “삶이 연기에 고스란히 투영되는 배우”라 평한 적 있다. 부음 이후 고인의 직업적, 인격적 존재를 다시 되짚을 때 이 말의 의미는 깊다. 공적 이미지와 역할 사이의 연속성을 지키고 자신을 직업에 이바지하는 존재로 남기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적 특수성을 차치하고 희귀한 미덕이다. 괴팍하고 불안정한 만큼 카리스마 있게 변신하는 배우들보다 생전에 덜 화려했을지 몰라도, 그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그 투명함과 선량함이 얼마나 커다란 것이었는지 되짚게 한다.


1950년 출생해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 중학생 당시 이미 약 73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던 안성기는 미성년 배우를 존중하는 마땅한 규율도 감수성도 없던 시절에 혹사의 현장을 견뎠다. 그가 <젊은 느티나무>(1968)를 끝으로 대학 졸업까지 보통의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한 배경이다. 그러나 영화 기획, 제작자였던 부친 안화영씨의 영향 아래 1977년 김기 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로 복귀한 뒤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상경 후 중국집 배달을 하는 시골 청년 덕배를 연기한 것이다. 80년대의 포문 앞에서 안성기는 1970년대 멜로영화의 미남 배우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결정적 차이를 보여주었다. 신성일, 신영균으로 대표되는 선배 배우들이 스타 페르소나를 여과 없이 투영해 캐릭터를 해석했다면 안성기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스타 이전에 직업인의 삶을 체화한 그는 특유의 겸허한 눈빛으로 군부독재 시대가 남긴 권위의 그림자를 희석하는 존재가 됐다. 영화계는 궁핍하고 생생한 현실을, 젊은 연인들을, 처절한 자유를 리얼리즘으로 담고자 했고 안성기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시작으로 시대의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걸어가는 청년들을 연기했다.


거지(<고래사냥>)부터 대통령(<피아노 치는 대통령> <한반도>), 승려(<만다라>)부터 킬러(<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 평생 폭넓은 스펙트럼을 소화한 배우지만,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소외되고 흔들리는 인물들을 연기할 때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의 영수는 도시 재개발에 밀려나는 빈민이었고 <고래사냥>(1984)의 민우는 학교를 떠나 방랑하는 청년이었으며, <칠수와 만수>(1998)에선 장기 복역수의 아들을 연기했다. <남부군>(1990)에선 지리산의 빨치산, <하얀전쟁>(1992)에선 베트남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참전 용사, <남자는 괴로워>(1994)에선 구조조정을 마주한 소심한 샐러리맨이었다. 과장되지 않은 연기, <만다라>의 방황하는 승려를 연기하면서 실제 삭발을 감행하고 <남부군>의 빨치산 연기를 위해 평소에도 군복과 군화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메소드 연기의 일화도 같은 시기 그가 한국영화의 경향과 함께 안성기식 리얼리즘을 구가한 시기를 증명한다. 안성기의 묵묵한 얼굴은 당대의 보편 대중이 품은 감정의 저수지가 되어주었다. 그 또한 생전에 “시대가 원하는 인물상이 나라는 사람과 잘 일치했던 것”이라 회고했다. 압축성장의 그늘과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경제위기의 전조 앞에서 밀려나고 좌절한 사람들을 거친 배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냉혹한 킬러로 분했을 때조차 인간적 고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국의 캐리 그랜트로 불렸던 그는 극장가의 흥행을 주도하는 스타로도 자리매김했다. <고래사냥>을 시작으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그대 안의 블루>(1992),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속 안성기는 우직함과 부드러움, 천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남성성을 보여주었다.


안성기는 1982년 <만다라>부터 2011년 <부러진 화살>까지, 무려 30년의 시차를 두고 남우주연상을 거듭 받은 배우다. 1980년대의 많은 스타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장했지만 안성기는 자신의 영점을 재조정해왔다. 고뇌하는 지식인, 선량한 소시민의 이미지에서 부패한 형사로 변신해 코미디 연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투캅스>(1993)는 그가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이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킬리만자로>(2000), <무사>(2001), <실미도>(2003),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형사 Duelist>(2005)까지 안성기의 21세기는 장르영화의 색을 흡수했다. 2010년대 들어 그의 연기에서 부각되는 경향은 한층 관조적인 뉘앙스다. <한반도>(2006), <화려한 휴가>(2007),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 등 사회적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에 참여하거나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나이 듦을 거부하지 않았고 주연에서 조연으로 내려오는 것을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그 나이 듦을 배우의 필연으로 승화했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70편이 넘는 영화를 찍으며 체화한 현장 감각, 공백기를 거치며 얻은 거리 두기의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객관화의 능력이 그를 시대의 배우이자 모두의 어른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신화화하지 않는 배우의 성실함과 동행하는 행운이었다.



Wfcfpg



안성기는 배우이면서 영화인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는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의 중심에 서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았고,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비상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대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한국영화에 대한 책임감의 표현이었다. 한국영화 호황기에 스타 배우들의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 안성기만은 일정 금액 이상을 절대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설교 대신 실천을 택했다. “출연 중인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은 병마의 시련보다 더 큰 고통”이라는 말을 남겼던 고인은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아들의 이름으로>(2020), 노년의 장례지도사를 그린 <종이꽃>(2019),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딸을 지키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카시오페아>(2022)를 통해 관객과 만났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한산: 용의 출현>(2022), <한산 리덕스>(2022), <노량: 죽음의 바다>(2022)로 이어지는 이순신 시리즈 속 조선 수군의 승리에 기여한 무신 어영담으로 기억된다. 69년의 연기 생애, 170편이 훌쩍 넘는 필모그래피가 남았다.


물론 숫자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안성기는 한국영화사에 중심을 세웠고 스스로를 지워냄으로써 가장 또렷하게 기억되는 배우가 되었다.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볼 때, 안성기의 출현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에 윤리를 부여했고 스타성보다 존재의 진실성을 추구했으며, 개인의 영광보다 영화 전체의 발전을 우선했다. 어느 오랜 배우와의 작별은 그래서 스타가 사회적 표상으로 기능하는 한 시대와의 작별임도 체감케 한다. 만약 배우의 존재가 “단순한 스타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관리하는 문화적 기제이며, 대중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연구하고 조정하는 거울”(리처드 다이어, 영화 이론가)이라면 안성기는 한국영화가 시대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매체로 기능할 때 그 얼굴이 된 존재다. 어느 한 시절에 그를 거울 삼아 삶을 배워나간 관객들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21세기의 안성기는 동시대의 다양한 욕망과 야심을 응축하기에는 너무도 선량한 존재로 해석되어왔다. 21세기는 우리가 그를 신뢰했기에 다소 소홀했던, 정성일 평론가의 표현처럼 “귀한 줄도 모르고 누리기만” 했던 시대다.


<라디오 스타>(2006)의 박민수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가장 품 넓게 기억되는 안성기 배우의 캐릭터일 것이다. 한물간 스타를 뒷바라지해온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그는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그가 비를 뚫고 <미인>을 흥얼거리며 재등장할 때, 우리는 숨길 수 없는 주인공의 아우라가 부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미소, 나긋한 흥얼거림, 부드러운 춤사위는 아주 오래전 그가 예행 연습한 퇴장의 방식처럼 보인다. 비를 맞고 장난을 주고받고 끝내 기품 있는 너털웃음으로 고하는 안녕. 배우 안성기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장과 죽음 이후에도 언제든 화면 위로 다시 돌아오는 배우의 영원함이 무엇인지를.



https://naver.me/GreCKJ3S

목록 스크랩 (0)
댓글 2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농심X더쿠] 너구리가 완성한 가장 맛있는 해물 라볶이! 농심 라뽁구리 큰사발면 체험 이벤트 692 01.22 54,002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523,409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380,851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549,874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4,658,022
공지 잡담 발가락으로 앓든 사소한 뭘로 앓든ㅋㅋ 앓으라고 있는 방인데 좀 놔둬 6 25.09.11 462,782
공지 잡담 카테 달고 눈치 보지말고 달려 그걸로 눈치주거나 마플 생겨도 화제성 챙겨주는구나 하고 달려 7 25.05.17 1,113,444
공지 잡담 카테 달고 나 오늘 뭐 먹었다 뭐했다 이런 글도 난 쓰는뎅... 11 25.05.17 1,167,784
공지 스퀘어 차기작 2개 이상인 배우들 정리 (1/26 ver.) 133 25.02.04 1,768,638
공지 알림/결과 ─────── ⋆⋅ 2026 드라마 라인업 ⋅⋆ ─────── 118 24.02.08 4,531,465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라마 시청 가능 플랫폼 현황 (1971~2014년 / 2023.03.25 update) 16 22.12.07 5,529,609
공지 알림/결과 ゚・* 【:.。. ⭐️ (੭ ᐕ)੭*⁾⁾ 뎡 배 카 테 진 입 문 🎟 ⭐️ .。.:】 *・゚ 170 22.03.12 6,946,846
공지 알림/결과 블루레이&디비디 Q&A 총정리 (21.04.26.) 9 21.04.26 5,690,064
공지 알림/결과 OTT 플랫폼 한드 목록 (웨이브, 왓챠, 넷플릭스, 티빙) -2022.05.09 238 20.10.01 5,774,642
공지 알림/결과 만능 남여주 나이별 정리 301 19.02.22 5,911,426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영배방(국내 드라마 / 영화/ 배우 및 연예계 토크방 : 드영배) 62 15.04.06 6,079,421
모든 공지 확인하기()
15187285 잡담 스프링피버 수트뀨 미친점이 슬림해 보인다는 거임 12:16 1
15187284 잡담 저거 대중문화예순업 등록은 세금 관계없고 미등록했다고 혜택도 없는데 징하게 끌올되네 12:16 6
15187283 잡담 모 닝 댓 달 아 주 라 12:16 0
15187282 잡담 저거 500개 어쩌고는 계도기간에 대중문화예술업 등록 안한 회사들 그거 아님? 12:16 10
15187281 잡담 탈세 쉴드치는거 현타 안오나... 12:15 14
15187280 잡담 근데 차은우 기사는 티비뉴스도 하루종일 나오네 12:15 18
15187279 잡담 고액소득자는 법인세우는게 나라에서도 관리쉬워서 권장하기도함 근데 부정한 목적으로 사용하는경우가 문제가되는거지 1 12:15 32
15187278 잡담 소속사 있으면서 개인법인 세워서 거길로 출연료 받는건 사실상 절세 목적이지 12:15 31
15187277 잡담 소속사 있으면서 1인 법인 만드는거 그냥 하는 이유도 알겠고 안 하는 이유도 알겠음 2 12:15 61
15187276 잡담 은애도적 와 근데 이번 미방분은 본방에 꼭 들어갔어야 되는 장면같은데 1 12:15 15
15187275 잡담 저 뒤에 유ㅇㅅ글은 그냥 알못이 이상한데 꽂힌거 같음 12:15 52
15187274 잡담 세법은 진짜 자주 바뀐다지않았어? 3 12:15 47
15187273 잡담 대중문화 예술업으로 등록해야 관련해서 나라에서 관리도 하고 관련 종사자 교육도 할수 있어서 등록하라고 하는거임 12:14 34
15187272 잡담 만약에 우리 보면서 답답했던게 12:14 20
15187271 잡담 오 넘버원 십오야 라이브하나봄 3 12:14 62
15187270 잡담 연예인들 지들이 잘못하고 ㅇㅇ로 보답하겠다 이거 존싫 12:14 21
15187269 잡담 근데 왜 등록을 안해 몰랐다가 가능? 10 12:13 139
15187268 잡담 26일 스포티비뉴스 취재에 따르면 차은우는 대형 로펌인 세종을 선임하고 국세청의 과세 처분에 대한 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12:13 47
15187267 잡담 차은우 탈세는 그 트위터가 잊혀지지않늠 12:13 176
15187266 잡담 1인법인은 그냥 법인이 세금이 더 싸서 세우는거임 사업목적보단 절세 목적 4 12:13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