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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는 초반부 재난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거대한 해일이 아파트 단지를 집어삼키고,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충분한 시각적 긴장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안의 전개는 새로움이 부족하다. 위기 속에서 아이가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엄마는 혼란 와중에도 아이를 홀로 둔 채 다른 일을 처리하는 등 재난영화에서 반복되어온 낡은 클리셰들이 여전히 등장한다. 단순한 재난극으로만 보아도 피로감이 먼저 밀려오는 순간들이다.
설정의 허술함도 눈에 띈다. 아파트 절반이 물에 잠길 정도라면 거의 절망적 상황이어야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잠시 비가 멈췄다고 빨래를 하는 등 현실성에서 멀어진 행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균열이 쌓이던 시점에 영화는 재난물에서 SF로 급회전한다.
안나가 인류를 구할 AI 개발자이며, 초반부 재난 상황과 반복되는 사건들이 사실은 'AI의 딥러닝 과정'이었다는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튼다. 지금까지 생존극에 몰입해온 관객에게는 갑작스러운 전환으로 다가오며, '그동안 본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혼란만 남긴다.
더 나아가 영화가 결국 ‘모성애’로 귀결된다는 점은 SF의 확장 가능성을 오히려 좁히는 선택이다. 인류의 미래와 첨단 기술을 다루면서도, 핵심 감정은 과거의 전형적 모성 드라마로 돌아간다. 인류가 사라진 뒤 인간형 AI가 인류를 대신할 것이라는 설정도 설득력이 약한데, 여기에 AI가 인간다운 감성을 갖기 위해 ‘모성애’를 배워야 한다고 제시되면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영화의 의도가 희미해지는 지점이다.
김다미의 연기 역시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다. 모성 캐릭터가 요구하는 깊은 감정의 층위를 충분히 체화하기보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와닿는다. 극중에서 인물이 인간인지조차 불분명한 설정 또한 감정 이입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결국 '대홍수'는 강렬한 초반과 탄탄한 배우진, 높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욕심과 난해한 전개가 충돌하며 완성도를 잃는다. SF 장르가 가진 사유의 깊이를 확장하지 못한 채, 낡은 감정 구조 안으로 회귀한 작품. 기술적 스케일은 미래를 향하지만 정서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큰 야심을 품고 출발했으나, 스스로 구축한 설정에 발목을 잡힌 채 미완성에 그친 재난 SF다.
'대홍수'는 12월 1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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