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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리뷰) 은중과상연 나라는 사람을 통한 감상문 (장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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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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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올리려고 쓴 글인데 카테에도 올려봄 그래서 굉장히 두서없고 나의 감상으로만 가득한 글이야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올릴까말까 많은 고민을 했는데 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하니까 감상글이 하나쯤 있었으면 해서 올려봐 ㅎㅎ;;

※ 드라마 스포가 가득한 글








드라마를 다 보고 한 달 반을 꼬박 은중과 상연 생각을 했다. 드라마 생각이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류은중과 천상연을 곱씹었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천상연과 남겨진 류은중이 그렇게 신경쓰일 수가 없었다. 드라마 연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조영민 감독은 '이상하게 은중과 상연이라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라고 말했다. 참 신경쓰이는 이들이다.


드라마를 처음 볼 때 천상연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슬펐다. 상연의 인생이 워낙 슬프기도 했지만 그건 나라는 사람이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파괴적인 부분만 없었을 뿐이지 과거의 내가 상연과 맞닿아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을 편애했지만 자기는 편애한 적 없다는 어머니. 나를 버린 사람이 나쁜 건데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걸로는 버틸 수 없어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을 거라며 나를 탓하고 버티던 시간들. 또 상처받을까봐 상처받기 전에 관계를 끊어버리던 모습. 그리고 상연이와 같은 나이에 사랑하는 이가 자살로 떠나서 힘들어했던 나의 친구까지. 내 친구는 자살을 겪고 자신의 탓을 했다. 내가 괴로움을 몰라서, 내가 관심을 가졌더라면, 잠깐의 시간을 할애 했다면. 그럴 때면 나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연에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도, 자기자신도. 누군가 네 잘못이 아니라 말해줘도 닿지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아무도 없었다. 상연이의 모든 순간이 내 눈에는 슬프게만 보였지만 가장 슬펐던 장면을 꼽자면 엄마에게 이유를 말해달라고 나도 살아야할 거 아니냐고 울던 장면. 그리고 이 장면에서 배우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 21살 상연이 아니라 16살 상연이로 느껴졌기에.


은중이는 상연을 빛나는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빛나는 사람은 류은중이었다. 은중이는 참 좋은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남한테도 나눠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랑이 투명해서 준 마음에 떳떳한 사람. 그래서 내가 절대 될 수 없는 사람. 상연이도 은중이를 보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정말 좋아서 온갖 감상평을 찾아보던 시절에는, 상연이를 욕하며 자신을 은중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어찌보면 대단하게 느껴졌다. 상연이를 싫어할 수 있어도 은중이는 감히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자신을 은중이라 여길 수 있다니.


은중을 얘기하려면 김상학이 필요하다. 이 드라마에서 모든 캐릭터는 각기 매력을 갖고 있지만 류은중과 천상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지극히 도구다. 은중이는 좋은 사람이지만 바보같은 사람은 아니다. 상연을 받아주는 건 은중이가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상연이 은중이에게 있어서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상학과의 장면들을 봐라. 은중이는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준 사랑에 자신있기 때문에, 사람에 실망하면 오히려 칼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상연조차 20대 절교 이후에 은중은 상연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예 몰랐던거다. '그래. 내가 너에게 주었던 나의 마음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고작 이거라고 생각한다면 좋아. 다시는 보지말자.'


처음 봤을 때 중간중간 보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14화 나의 생애부터는 내가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14화 41분부터 상연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나의 생애와 글을 읽는 은중의 표정, 이어지는 은중과 은중엄마와의 대화. 드라마를 여러번 다시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이 매차례 바뀌었지만 이때 받은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은중을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들어서 파괴했다는 천상연과 상연을 싫어하지 못하고 미워해서, 생각나서 힘들었다는 류은중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들을 어떻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러길 바랬다.


<은중과 상연>을 그러니까 류은중과 천상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 자체를 말이다. 드라마의 아쉬운 부분까지 통채로 받아주길 바랬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볼 때 열심히 봤을 지도 모른다. 이부분은 왜 그런거야? 하면 나는 답해 줄 자신이 있는데 뜻이 왜곡되지 않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다르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잖아. 오해에서 시작되어 정말로 외로운 아이가 되어버린 상연처럼. 그래서 정말이지 n번째 볼 때는 대사며 눈빛이며 표정까지 토씨 하나 안놓치려고 꼭꼭 씹으며 봤다.


물론 2주일 전까지의 이야기다. 이제는 그냥 한 명이라도 봐주시면 감사하다로 마음이 바뀌었다. '타이타닉은 멜로고. 네 식대로라면 타이타닉은 재난물이지.' 멜로든 재난물이든 말그대로 드라마이든. 개인이 어떻게 느끼든 나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봐주면 좋은 일이다.


은중은 유찬의 고백에 자신을 백이 아니면 안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 사람을 백으로 믿고 신뢰해야 좋아할 수 있다고. 그걸 전해들은 희진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한다. 은중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마음을 꿈꿨다. 내가 드라마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길 원했던 거처럼. 은중과 며칠 전까지의 내가 차이가 있다면 그러니 은중은 불가능하니 포기했고 나는 꿈을 꿨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포기한 나와 달리 상연을 수용하고 떠나보낸 은중은 어쩌면 사랑을 할 지 모른다.


40대 은중이 상연을 왜 받아주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상연이 세 번을 걸쳐 찾아왔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처음 상연은 자신이 가진 명예와 돈으로 은중을 찾아온다. 백상에서 특별상을 받고 은중에게 고맙다고 언급하며, 성수동의 130억 건물을 증여하려고 했다. 단순히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는 게 아니라 상연이 가진 전부를 주려고 한거다. 상연은 어릴 때는 부유했지만 IMF를 겪고 집안이 완전히 망해버렸다. 20대 상연이 사는 집을 갔을 때 둘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난은 참 상대적인 거 같아."

"난 절대적인 거 같은데.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과거 부유했던 상연은 더욱이 가난을 체감했을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돈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후 수중에 돈이 없어서 엄마 병원비조차 내지 못하던 순간, 엄마마저 잃고 완연히 혼자가 됐을 때 겨울철 파카조차 입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순간. 그리고 드라마에 언급되지 않은 순간들. 상연이 가진 절대적이라는 생각은 더욱 더 굳어졌을테다. '내가 살면서 배운 게 뭔지 알아? 돈 이기는 사람 아무도 없어. 단 한 번도 못 봤어, 그런 사람.' 14화의 대사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미 프로젝트 일에서 은중은 돈을 이긴 사람이다. 상연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상연은 왜 빌딩을 대가로 갖고 왔을까. '부질없다. 남은 게 그것뿐이라니.' 자신이 노력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좋은 걸 가져온거다. 그렇지만 이는 실패한다. 당연하게도 은중에겐 돈으로 자신을 사려고 하는 모습으로만 느껴졌을 테니까. 은중은 다시 한 번 돈을 이긴다.


여기서 잠깐. 나는 이걸 며칠간 쫌쫌따리로 글을 쓰고 있는데 상당 부분 글의 후반부 또한 꽤나 작성이 된 상태고 어떻게 결론지을 지 머릿속으로는 답까지 내려놓은 상태이다. 그래서 중간에 삽입된 이 글은 이어지는 흐름에서 튈 것 또한 안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멈출 수 밖에 없다. 밑의 부분을 보여줄까 지울까 그냥 이 글을 나만 보고말지 지금 고민 중이라서. 아마 이 글이 올라간다면 나는 고민의 해답을 결론지은 거고 나의 생각을 관철하는 행위이다.


왜 막혔냐면 <은중과 상연>은 은중의 시선에서 본 나의 친구 상연의 이야기다. 그래서 순간순간 상연이 가진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은중을 향한 상연의 마음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반대로 은중의 생각은 알고 또 느낄 수 있지만 상연에 대한 은중의 마음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부러 상연의 머리를 맞춘 게 아니라고 했지만 잘 모르겠다고 실은 천상연이 얄미웠다는 13살의 은중의 '알쏭달쏭한 마음'이 있었다면, 이 드라마를 본 우리가 은중의 마음을 느끼기에 알쏭달쏭하다 싶은 거다. 선(善)에서 시작된 행동인지, 은중 또한 상연이 특별한 존재여서가 시작된 행동인지, 어디가 시작의 줄기인지가 알쏭달쏭.


그게 뭐가 중요한데?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쓰는 건 나라는 개인의 감상이지 드라마 정답풀이가 아닌데 중요할 리 없다. 실은 나는 헷갈리지도 않다. 특별해서, 라고 단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글을 멈추냐고 하면 나는 꽤나 우유부단해서 또 흔들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치 은중이 상연에게 네가 우리집에 처음에 데리고 온 사람이라고 나는 너를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말해줘도 상연은 은중에겐 사람이 많아서 나는 은중이 유일하지만 너에겐 나는 그정도가 아니다 생각했던 거처럼. 일부분의 사람들만 은중에게도 상연이 특별한 존재라 그런 거라고 여겨서 네 글은 글러먹었어 라고 말할까봐. 이래서 사람은 단순해야 한다. 상연이도 겪은 일이 너무 크지만 별개로 단순했다면 편한 삶을 살았을 거 같기도.


그러나 이해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행위이다. 이해와 사랑은 별개고 이해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지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듯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은중이 그토록 상연의 진심을 알고 싶어했듯이. 나는 이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드라마는 나온 이상 시청자의 해석으로 넘어가는 문제여도 알쏭달쏭한 마음을 풀고 싶은 거다. 아, 근데 <은중과 상연>은 이해 하지 않아도 수용하면 된다는 드라마인데.


다시 40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상연은 며칠 뒤 다시 은중 앞에 등장한다.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그래서 왔잖아, 보여주려고. 네가 나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뻔해서.' 은중에게 3일만 재워달라고 말한다.


"대체 넌…내가 그렇게 우습니? 네가 뭔데…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거야?"

"무서워, 우스운 게 아니라. 하…내가 옛날에 한 짓을 생각하면 너한테 이럴 수 없는 건데. 그래서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컨셉이야."


상연은 은중에게 진심을 보여줄 자신이 없다. 일기장으로 표현되는 인물들의 진심은 상연에게 두 차례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그러한 경험과 상연을 지켜온 자존심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자기방어기재로 자존심을 사용했던 상연에게는. 진심을 보여줄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진심과 반대되는 말로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으니 뻔뻔함을 가지고 온거다.


은중에게 그런 상연의 등장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을 싫어해달라고 말하던 게 30대 상연이었는데. 얘는 왜 다시 내 인생에 나타나는지, 네가 그토록 너를 싫어해달라고 해서 나는 더 이상 너를 신경쓰지않고 싫어하기로 정했는데. 그러나 상연을 싫어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은중은 말로만 상연을 밀어낼 수 밖에 없다. 왜 왔냐하면서 전자레인지는 돌려주고, 약만 먹고 가라면서 결국 침대를 내준다. 은중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나 이 모든 건 찾아온 대상이 '상연'이라 가능한 일이다.


"거봐. 이렇게 놀랄 거면서, 참. 야박한 척 하기는."

"대체 너는! …가."


같은 날 밤, 은중이 상연의 팔을 잡게되고 작은 접촉에도 소스라치게 아픈 상연은 고통에 소리지른다. 하지만 아픈 걸 보여준다고 온 상연은 놀란 은중을 보고 아프지 않은 척을 한다. 자신이 아픈 모습을 보면 은중이 더 아파할 테니까. 그게 상연이 생각하는 은중이란 사람이다. '내가 쥐여 준 리코더를 손에 들고, 차마 나를 때리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씩씩대면서, 너 이걸로 때리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이건 나무보다 더 딱딱하단 말이야!'


"그러면 강릉은? 엄마 보러 갈건데."


은중은 아픈 척을 했다고 생각하니 이번에는 완전히 상연을 무시한다. 상연은 딱 한 번만 얘기를 들어주면 안 되냐고 하다가 엄마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에 너 화났을 때마다 썼다는 엄마 찬스는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다음날 은중에게 상연을 유미씨가 찾아온다. 그녀는 그저 상연을 걱정해서 상연과 친해보이는 은중을 찾아왔을 뿐이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은중에게 힌트를 주게 된다. 상연이 팔이 아파서 소리지른 장면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유미의 말과 프리든 책자는 은중으로 하여금 상연의 집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너랑 …다시 친구가 되고 싶어."

"뭐?"

"은중아. 나 아파. 시간이 없어."


그제야 상연은 40대에 들고 간 뻔뻔함도 아니고 30대 때부터 쓰던 엄마 찬스도 아닌 진심을 말한다.


"아픈 게 무기니? 네가 아프다면 내가 울기라도 할까봐?"

"내가 잘못했어."

"하지 마. 그런 소리 들으러 온 거 아니니까. 유미 씨는 네가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어. 자살할까 봐.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 유미 씨한테도, 한 감독한테도. 그 말 하러 온 거야."


나는 네가 버린 사람이지만 지금의 네게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더 이상 네게 흔들리지 않는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상연은 은중에게 이혼했다는 사실을 스위스 전까지 제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한 감독이 없다 말하면 은중은 흔들릴 사람인데. 실제로 은중은 상연의 세 차례 방문과 유미씨의 힌트, 엄마의 힌트 그리고 3년 전에 이혼했다는 희진의 힌트로 상연의 진심과 마주할 결심한다. 상연이 엄마 보러 가자면서 이혼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30대 재회를 보면 알 수 있긴 하다.


"장례는 어떻게 했어?"

"안 했어."

"……."

"그냥 뿌렸어, 바다에. 네 생각 안했던 거 아니야. 근데 네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짜증 나더라."

"그래서 가서 혼자 뿌렸어?"

"그럼 혼자 하지, 누구랑 하니?"

"넌 대체!"


은중에게 윤현숙과 천상학이 커다란 존재라 상연은 은중의 우선 순위에 자신이 위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30대 은중이 걱정한 건 혼자인 상연인데, 30대 상연이 받아들이는 건 엄마의 장례다. 이건 9화 삭제된 장면 그러니까 비하인드에만 나온 은중이 사직서를 쓰고 나갔을 때 상연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온 장면을 보면 흐름이 이해되는데, 천상연으로는 은중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 상연이 가져온 게 엄마 찬스여서.


'너의 엄마 찬스 따위 통하지 않았다. 내가 너의 손을 잡은 건 나와 내 일을 위해서다. 너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기에.'


9화 엔딩 나레이션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결국 무(無)이면서 전부이다. 그리고 이제, 라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고. 저런 생각을 한다는 건 다시 신경쓰이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인데, 둘 다 속을 터놓는 대화는 하지 않았으니 상연은 내가 아닌 엄마만이 너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연은 은중을 잘 알고있는데 딱 하나 자신에 대한 사랑만은 잘 모른다. 이건 상연이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기도 하고. 그러니 한 감독이랑 이혼했다는 소리는 안하는 거다.


은중이 어버이날 본가에 다녀왔다가 돌아오는 길 집 앞에는 상연이 서있다. 은중과 마주한 상연은 은중 앞에서 무릎 꿇는다. 상연은 자기방어기재로 자존심을 쓰나 때로는 자존심을 버릴 줄도 아는 사람이다. 오직 딱 한 명 은중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 장면은 상연이 은중에게서 드디어 자존심도 내려놓는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은중은 이를 무시하려다가도 사람이 걸어오자 상연을 가려준다. 상연에겐 자존심이 목숨이었는데, 이를 아는 은중은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넌 살아 있잖아. 엄마랑 오빠한테는 못 했던 거. 미안하다고. 너한테는 말할 수 있잖아."


상연은 반대로 살아 온 인물이다. 20대 은중은 김상학의 질문에 상연은 다 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힘들수록 안 힘든 척하는 그런 거. 상연을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뭐든지 반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은 오빠에게는 틱틱대고, 나와 같이 살아주길 바라는 엄마에게는 삐뚤게 대하고, 30대에 같이 있어주길 바란건 김상학이 아니라 은중인데 은중에게는 반대로 말한다. 그런 상연에게 20대에 재회했을 때 나한테 화났냐고 묻는 은중이, 상학 선배 좋아하냐고 물으며 너를 의심하기 싫다고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을 갖기 싫다하는 은중이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을까. 상연은 죽을 때가 되서야 솔직하게 실은 미안하다고 찾아올 수 있는데.


"너 일 잘되고 안 아플 때 내 생각 했어?"


상연은 은중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대학생 때 김상학이 줬던 의자 사진을 집착임을 인정하고 나서야 던져버리고 가족 사진에서 아빠 부분을 찢어서 아빠에게 돌려주며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못한 사진이 중학생 때 은중과 찍은 사진이다. 이미 그때부터 상연에게 남은 세 가지의 이름은 윤현숙, 천상학 그리고 류은중이었다.


"늦었다는 생각 안 드니? 사과를 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적어도 내가 욕을 할 수 있을 때 아프기 전에. 너 진짜 나쁜 년이야."

"이렇게 안 됐으면 못 왔을 거야.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잘못해서. 좋아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래서 미워해서 미안해."


상연의 행동은 은중의 말처럼 이기적이다. 사과를 하려면 진작 했어야 한다. 상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은중이 저를 싫어하길 바라며 은중의 가장 큰 가치인 신뢰를 건든거니 죽음 앞에서야 솔직해질 수 있는거다. 드라마를 처음 볼 때는 상연이 언젠가 은중을 찾아가지 않겠냐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천상연이라는 인물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이라, 은중을 파괴하고는 계기 없이 은중 앞에 뻔뻔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죽음으로 인해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 뻔뻔한 컨셉으로 나타난거지.


이건 어디까지나 상연의 입장이고 은중에겐 당연히 불편한 일이다. 11년 전 그렇게 네가 싫다고 너도 나를 싫어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놓고는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와 곧 죽는다 하고 스위스에 같이 가달라 하고 다시 친구가 되고싶다고 하고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이기적인 행동에 휘둘리기 싫은데 신경은 쓰이고 그러니 은중에게 상연이 나쁜 년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을 뒤흔드는 존재란.


그리고 은중은 상연의 또 다른 사과와 희진의 힌트로 결국 상연이 쓴 '나의 생애'를 읽게 된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하는 건 나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상연이 은중에게 진심을 줬을 때는 은중과 친구이고 싶었다는 자신의 진심을 인정한 거고, 상연이 은중에게 진심을 드디어 전하자 은중 또한 자신의 진심과 마주한다. 그렇게 상처 받고도 상연을 싫어하지 못하고 미워한 마음을.


'선생님 뵈러가자. 너 때문이 아니야. 나 좋자고 가는 거야.'


은중의 메시지는 9화의 나레이션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의 은중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고 지금의 은중은 말로만 그렇다는 점.


이후의 15화는 온전히 수용의 과정이다. 드디어 둘은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상연은 솔직하게 대답하고 은중은 '내가 생각하는 상연'이 아닌 '천상연'을 알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은중을 상연을 수용한다. "누가 널 끝내 받아주겠니?"는 말이 끝내 "네가 날 받아 주는구나, 끝내, 네가." 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내가 전율을 느낀건 14화여도 내가 아닌 드라마가 달려온 이유는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다. 보기 힘들었던 30대 상연조차 은중의 입에서 끝내 누가 받아주겠냐는 말이 나오기 위함이니.


15화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너무 좋아서. 숙소의 학, 슬픈 은중에게 상연이 행복하다 했던 말, 침대에서의 대화, 일기장을 왜 그때 주는가, 은중이 반대로 얘기하지 말라하고 상연이 반대로 얘기하지 않은 순간, 배우들의 연기. 진짜 하나하나 얘기하고 싶지만 나라는 개인의 감상도 다른 이의 해석도 없이 15화를 온전히 즐겼으면 좋겠다. 정말 온전히 대본과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싶다. 그리고 나중에 이야기 하고 싶어지면 그때 이야기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사람을 신뢰하고 싶다는 건 사람을 잃기 싫어서다. 은중에게 상연을 수용한 경험이야 말로, 앞으로 은중이 사람을 백프로 믿지 못해도 사랑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은중이 첫 연애 때 잃기 싫어서 정말로 믿고 싶었던 사람은 김상학이 아닌 상연이었으므로.


상연은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을 겪고는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오빠를 죽인건 나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나로는 엄마를 살리지 못한다는 무력감. 윤현숙의 마음이 죽어버린 순간은 아들의 자살이라면 천상연의 마음이 죽어버린 순간은 엄마의 투병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일거다. 엄마의 죽음 이후 김상학의 편지로 살아나기만 했을 뿐 영원히 죽은 채로 살았을 것이다. 티저 예고편 영상과 사운드 트랙 사진에서 은중은 40대여도 상연은 20대이듯이.


나는 내가 너무도 불쌍한데,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못버틴다. 상연의 불행은 가족에서 오는데 가족을 그렇게 만든건 나라는 죄책감에 살아가는 아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싫어해야 한다. 나를 싫어해야만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려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타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타인이다. 상연이 30대에도 수제비를 언급하지만 바로 삐뚫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수제비는 단순히 수제비가 아니라 좋아하는 은중이와 따스한 은중아줌마가 있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엄마와 오빠를 그렇게 만든 자신이 수제비를 먹을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그만 싫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야 수제비를 먹는다.


상연이 바랬던 사람은 구원자적 환상에서 비롯된 김상학이고, 상연이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상연에겐 언제나 다시 오라 말해주고 은중에겐 어거지 좀 쓸 수 있다는 은중의 엄마 장순영인데. 상연이 환상 없이 사랑했던 사람도, 상연을 사랑했던 사람도 모두가 류은중이었기에 이 모든 이야기는 <은중과 상연>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때 자신과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다. 상처의 크기는 달라도 세상에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상처를 주는지 아는 사람과 자기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거지. 그리고 상처는 완벽한 타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가능성이 높다. 은중은 상연의 외로운 삶에서 온 날이 선 시기를 같이 버틴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스위스에서 상연을 수용한 은중은 지극히 판타지다. 진정으로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자신뿐이다. '저는 <은중과 상연>이 자기자신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로서, 자기를 데리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상연이처럼 외롭고 힘든 날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은중이가 되어주세요.' 작가님의 말처럼 자신과 함께 해야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은중은 나를 사랑하는 나고 상연은 나를 싫어하는 나기도 하니. 은중의 결핍은 따스한 엄마와 윤현숙 선생님으로 채워졌지만 상연의 결핍은 반대로 그 윤현숙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찌보면 윤현숙이 만들어 낸 단단함이 윤현숙이 만든 결핍을 받아주는 이야기도 하다. 은중이 끝내 상연이를 받아줄 때 그제야 상연이는 진정으로 자신을 받아줬을 거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시간들 속에서도 나에겐 내가 함께라는 사실을 잊지않고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 가을이 되면 류은중과 천상연을 나는 영원히 떠올릴 것 같다. 찬란한 단풍으로 보이나 실은 스러져가는 낙엽인 상연과 떨어진 낙엽을 쓰레기로 보지않고 여전히 꽃으로 기억하는 은중을 가을에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학과 함께 하늘로 간 상연에게 안식을, 땅에 남겨진 은중에게는 웃음과 함께 하는 온전한 평온을 기원한다. 그리고 드라마에 공명한 세상 모든 은중과 상연이 행복하기를.



P.S 사람을 사랑하는 송혜진 작가님과 드라마가 드라마임을 아는 조영민 감독님으로 <은중과 상연>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적재적소에 쓰인 세련된 음악들도 좋고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김고은이 류은중이고 박지현이 천상연이어서 좋았다. 대본도 연출도 좋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상연처럼 은중을 좋아하고 은중처럼 상연을 신경쓴건 온전히 두 배우의 힘이었다. 사..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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