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는 고려말이랑 별로 안달라졌어
재가 금지는 성종때나 되어야 하고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시집으로 데려오는 형식의 혼례인 친영례도 중종 이후임
아들 딸 동등하게 유산 상속한 것도 17세기까지 유효함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 말도 유학이 대세였음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는 특히 대학자였고 가문 자체가 대대로 명문가라 유학교육 빡세게 시켰음 시켰지 덜하지 않음
방원이도 민제 제자임
원경왕후가 성리학 엿먹어라 할거면 아버지부터 엿먹여야만함
조선초엔 세조 부인이 사냥터에 말타고 따라갔을 정도고 왕비들도 밖의 친정집이나 왕자들 보러 잘 나가서 활동영역 좁지 않았음
고려말과 조선 개국 초에 여자들에게 변화가 있다면 집안 상관없이 정실이 사회적으로 대우받고 적서차별 시작한 거.
근데 고려말이 그렇다고 적서차별 안했으니 좋았냐 하면
엄마 신분에 따라 나눠지거나 아빠 맘대로라서 아빠 총애유무가 아들 처지에 작용.
아빠가 엄마랑 이혼하고 새 여자 들여서 아들 낳으면 정실 자식도 밀려날 수 있음
근데 정처, 적자 구별 엄격해지면서 이혼은 더 어려워지고 정처의 아들은 지위보장되는 질서로 변함
왕비도 고려때는 왕이 왕비를 여럿두는게 가능
왕비들 사이에 서열구분은 집안 차이나 총애가 결정지을때가 많음
당연히 그 자식들도 적서구분보다 엄마 신분차이나 왕의 총애 유무로 갈림
이방원이 고려왕이었으면 후궁을 여럿 두는게 아니고 왕건같이 죄다 무슨 부인이라며 다 같은 위치로 여자들 여럿 거느림
민씨집안만큼 명문가 규수들 여럿 들여서 비에 봉하고 아들들 적서구별안되게 만들어서 견제할걸
근데 조선은 왕비는 무조건 1명
적자인 대군과 군 차이 구별 엄격해짐
그래서 나중에 폐비하네 마네해도 정종까지 나서니까 맘대로 못하고 원경왕후 왕비자리 유지
이것도 원경에게 득이면 득이지 실이 아님
근데 원경왕후 지위가 이렇게 탄탄해지고 친정까지 탄탄하니까 이방원이 그냥 두면 안되겠다 외척 세를 축소해야겠다며
후궁도 가문 좋은 여자 들이고 민씨 집안 도륙낸 거임
(물론 이방원 자체가 여자를 좋아해서 저좋다고 들인 후궁도 한다스)
참 고증 굳이 따지면 이방원이 처가살이에 억울함 가질게 없음
고려때는 여자 친정에서 사는게 당연했음
이방원은 심지어 5남이고 민씨네가 명문가
그럼 그 집에 16세에 장가가서 데릴사위같이 사는게 고려 풍습임
그걸로 빌붙어서 기죽어 살았고 치욕스러웠다는 건 현대 한남들 사고방식 반영한 거고
고려말기-조선초 남자는 그런 사고 자체를 안함
실제 이방원도 민씨집에서 자기가 이쁨 많이 받고 살았다고 했음
근데 도륙을 냈으니 원경왕후에게 더 나쁜 놈인 거고
따지면 태종 이방원의 이방원과 민씨 일가 묘사가 훨 고증에 맞음
고려 풍습도 제대로 안다루고 그냥 사람들 편견에 맞춰서
고려여자는 자유롭고 조선 여자는 묶여 산다고 설정한 것뿐임
드라마는 드라마니 고려에서 조선초, 여자들 생활이 정말로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었구나 할 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