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퀘어 [씨네21/특집] 우리가 사랑한 2024년의 배우들 - 틸다 스윈튼
112 0
2025.01.03 21:18
112 0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마사(틸다 스윈튼)는 암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종군기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삶이란 차가운 총탄 한알로 언제든 소멸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기 때문일까. 마사는 전장에서 그녀의 곁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을 총알 대신 알약 한알을 자신의 몸 안으로 집어삼킴으로써 삶으로부터 부재하기로, 스크린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마사의 계획에 우연히 동조하게 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죽음은 이야기의 끝을 의미한다.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주며 덮여 있던 책 표지를 다시 열고, 이야기와 삶의 영속성을 매 순간 감각하려 한다. 그렇기에 마사의 예정된 죽음에 대항하기 위해 잉그리드가 선택한 방식은 마사의 전장 일기를 사후에 출간하는 것, 그러니까 이야기를 지속시킴으로써 부재의 틈을 메우려는 것이었다. 그런 잉그리드 앞에 마사가 그녀의 딸, 미셸이 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부재해야만 하는 존재가 불현듯 다시 현전할 때, 영화는 생과 사를 구분 짓는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식별 불가능한 시공간으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사가 삼킨 것은 생을 삭제하는 총알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것이었을까. 마사가 누웠던 선베드 위로 미셸이 다시 한번 몸을 누일 때, 그녀의 얼굴 위로 눈과 함께 평온함이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IvWrCk



부재하면서 현전하기


‘부재하면서 현전하기’로 점철될 수 있는 틸다 스윈튼의 변신술은 <룸 넥스트 도어>에서 처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영화의 모더니티를 실현하고자 했던 데릭 저먼의 <카라바지오>를 통해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다. 바로크회화를 견인한 카라바조의 삶과 회화를 영화적으로 재현한 이 영화에서 스윈튼은 화가와 사랑에 빠지는 레나 역을 맡는다.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는 카라바조의 붓칠에 의해 화가의 캔버스 위, 정확히는 회화 <성모의 죽음> 속 안료로 외양을 바꾼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과 동시에 회화-이미지로 현전한다. <아이 엠 러브>의 엔딩 시퀀스는 어떠한가. 스윈튼이 연기한 엠마는 자신의 본래 이름조차 망각한 채로, 수직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층계와 더불어 유구한 역사가 지탱하고 있는 한 가문의 거대한 저택에 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녀는 수직적 층계의 끝, 바닥면으로 쏟아지듯 걸어 내려와 거칠게 숨을 몰아쉰 뒤, 수평적 공간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수직적 공간을 마침내 허물고서 화면 밖으로 실종된 그녀의 빈자리를 비춘다. 이제 이 빈자리에 현전하는 것은 아직 채 식지 않은 스윈튼의 뜨거운 호흡과 그녀의 선택을 지지한 딸 베타(알바 로르와처)가 이어받은 새로운 유산, 도래하는 자유의 시간이다. 부재하면서 현전하는 이러한 신체의 작동방식은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에 기대어보자면 ‘감각적인 것의 분할’로 이야기할 수 있다. 스윈튼은 프레임 안팎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기존의 가치와 감각들을 자유롭게 재배치한다. <아이 엠 러브>에서 그녀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수직적 공간을 평평한 수평적 공간으로 바꾸고, 오래된 유산이 지배하던 시간을 화석화하고 새로운 시간을 태동시킨다. 한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스윈튼은 서사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지만, 그녀가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짧게 영화에 머무르면서도 벤자민(브래드 피트)에게 캐비아의 맛과 사랑의 감정을 교화시킨다. 그녀의 부재는 벤자민이 삶의 여정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도록 부추긴다. 그런가 하면 <메모리아>에서 스윈튼은 안테나였다. 정체불명의 육중한 금속 소리에 사로잡힌 제시카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서 에르난(엘킨 디아즈)의 몸으로 전이되는 두터운 역사를 자신의 살로 읽어낸 후, 그녀는 또다시 사라진다. 이후, 하나의 시퀀스로 묶을 수 있는 숏들이 이어진다. 제시카가 머물렀던 풍경과 여정의 집합체인 이 숏의 덩어리는 그녀가 눈으로 보았던 장면들이자 이제는 그녀의 기억으로 편입된 회상-이미지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스크린이자 제시카의 뇌이다. 그녀는 부재하기를 망설임 없이 이행하면서, 자신의 뇌를 스크린에 헌신한다.



IEEiWP



혼종의 동물, 조각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은 <메모리아>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혼종의 동물’에 비유한다. 위라세타꾼의 프레임 안에서 틸다 스윈튼 역시 두개의 시공간을 횡단하는 혼종적인 동물로 역할한다. 여기에, 푸코가 강변했듯 적어도 영화에서 스윈튼의 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구성되어왔다. <올란도>에서 그녀는 남자이자 여자로 400여년을 살아냈고, <콘스탄틴>에서는 무성(無性)의 천사 가브리엘로 분한다. 또한 금단의 열매가 아닌 인간의 피를 먹고사는 흡혈귀 ‘이브’였으며(<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부조리의 민낯을 폭로하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했다(<설국열차> <옥자>). 뿐만 아니라, 예술적 동지였던 데릭 저먼의 유언과도 같은 말들을 프레임 뒤에서 낭독하는, 푸른 목소리이기도 했다(<블루>). <존 버거의 사계>에서 그녀는 34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 태어난 존 버거를 자신의 쌍둥이로 상정하며 분리된 두개의 시간 축을 하나로 통합한다. 이렇듯 그(녀)는 혼종의 동물이 되기를 기꺼이 자처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시적으로 재현하면서 영화와 함께 걸었다.


카메라가 틸다 스윈튼을 프레임 안으로 포섭할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술했듯 감각들이 재배치될 수 있는 잠재성이다. 그녀가 화면의 정면에 위치하여 온화한 표정으로 카메라 혹은 사물들을 응시할 때, 영화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육중한 이미지들이 켜켜이 쌓인 총체, 스윈튼은 조각적인 존재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라오콘에 대한 레싱의 견해를 해체하고 차가운 조각상에서 이미지의 동적 움직임과 조합, 몽타주를 읽어냈다. 한 배우(조각)의 등장과 배치는 프레임 안의 시공간을 가변적으로 탈바꿈시키고,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은 현재로 분기한다.


다시 <룸 넥스트 도어>로 돌아가, 마사의 복제인간 혹은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미셸이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잉그리드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놀란 듯 잠시 정지한다. 마사가 남긴 것은 서랍 속 전장 일기가 아닌, 미셸이라는 움직이는 조각이다. 뒤틀린 시공간 안에서, 잉그리드는 이제 인쇄된 활자가 아닌 행간에서 지속되는 삶과 이야기를 읽어낼 것이다. 우리는 엔딩에 이르러 잉그리드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에서 온화한 활력을 느끼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끝으로, 조안나 호그의 단편 <카프리스>를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스윈튼은 두려움을 모르는 모험가였으며, ‘러키’로 불렸다. 혼종의 동물이자, 조각,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러키’였던 틸다 스윈튼이 영화의 존재론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오늘, 여전히 모험을 이어가며 새로움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분명 행운일 것이다.



https://naver.me/xa5ATVlE

목록 스크랩 (0)
댓글 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닥터웰메이드원X더쿠💙] 2025년 새해엔 좁쌀 부숴야지?🫠 좁쌀피지 순삭패치와 함께하는 새해 피부 다짐 이벤트! 140 00:06 11,047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22,476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4,597,534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8,210,71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6,728,316
공지 알림/결과 ───── ⋆⋅ 2025 방영 예정 드라마 ⋅⋆ ───── 103 24.02.08 2,241,403
공지 잡담 (핫게나 슼 대상으로) 저런기사 왜끌고오냐 저런글 왜올리냐 댓글 정병천국이다 댓글 썅내난다 12 23.10.14 2,296,889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라마 시청 가능 플랫폼 현황 (1971~2014년 / 2023.03.25 update) 16 22.12.07 3,429,059
공지 알림/결과 ゚・* 【:.。. ⭐️ (੭ ᐕ)੭*⁾⁾ 뎡 배 카 테 진 입 문 🎟 ⭐️ .。.:】 *・゚ 162 22.03.12 4,498,610
공지 알림/결과 블루레이&디비디 Q&A 총정리 (21.04.26.) 8 21.04.26 3,686,007
공지 스퀘어 차기작 2개 이상인 배우들 정리 (7/1 ver.) 173 21.01.19 3,727,983
공지 알림/결과 OTT 플랫폼 한드 목록 (웨이브, 왓챠, 넷플릭스, 티빙) -2022.05.09 238 20.10.01 3,722,012
공지 알림/결과 만능 남여주 나이별 정리 259 19.02.22 3,820,439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영배방(국내 드라마 / 영화/ 배우 및 연예계 토크방 : 드영배) 62 15.04.06 3,993,023
모든 공지 확인하기()
13754893 잡담 나완비 음감 누구야? 21:11 3
13754892 onair 다리미 다림네 쏙 빠져나가는거 이거 맞아? 21:11 17
13754891 잡담 다리미 엌 나 지난주부터 엄마랑 보는 중인데 넘 재밌오 21:11 9
13754890 잡담 나완비 나 진짜 둘이 이런사이가 된다는게 안믿김 21:11 6
13754889 잡담 옥씨부인전 막심이는 승휘편일듯 21:11 2
13754888 잡담 오겜2 핫게에 성기훈 MBTI 궁예글 댓 보니까 ENFJ 맞는 듯 21:11 1
13754887 잡담 다리미 아니 강주 혼자 살라고 했더니 진짜 혼자 되게 생김... 1 21:11 15
13754886 onair 체크인한양 계집이란 표현도 별로야 조선말포이 21:11 5
13754885 잡담 계속 복습하다보니까 별이 아빠 유은호 보여주는 연출 진짜 섬세하다고 느낌 21:11 5
13754884 잡담 오겜 솔직히 탑 연기 글케 못한지 모르겠음ㅋㅋㅋㅋ 21:11 17
13754883 onair 다리미 걍 강주 방송 몇번하고 40억 벌엇는데 21:11 59
13754882 onair 체크인한양 수라야 ㅜㅜㅜㅜㅜㅋ 21:11 5
13754881 잡담 다리미 내가 엄마라도 개빡쳐 근데 21:10 59
13754880 onair 다리미 아까 고깃집 사장 욕 엄청 먹었지만 솔직히 억울한거 아닌가 ㅋㅋㅋ 21:10 55
13754879 onair 다리미 강주는 여친하나잘못만났다가 이지경이된거야?? 1 21:10 54
13754878 잡담 다리미 카테가서 재밌게 보구 있구만... 하면 욕먹으려나 21:10 33
13754877 onair 체크인한양 쌰럽 말포이 21:10 6
13754876 onair 체크인한양 말포이 꺼져 1 21:10 18
13754875 잡담 다리미 근데 그렇게 단순한건가?? 팠더니 돈 있네?해서 21:10 95
13754874 잡담 나완비 1화보고 있는데 한수전자 부장새키 개패고시픔 1 21: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