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넥스트 도어>에서 마사(틸다 스윈튼)는 암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종군기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삶이란 차가운 총탄 한알로 언제든 소멸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기 때문일까. 마사는 전장에서 그녀의 곁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을 총알 대신 알약 한알을 자신의 몸 안으로 집어삼킴으로써 삶으로부터 부재하기로, 스크린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마사의 계획에 우연히 동조하게 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죽음은 이야기의 끝을 의미한다.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주며 덮여 있던 책 표지를 다시 열고, 이야기와 삶의 영속성을 매 순간 감각하려 한다. 그렇기에 마사의 예정된 죽음에 대항하기 위해 잉그리드가 선택한 방식은 마사의 전장 일기를 사후에 출간하는 것, 그러니까 이야기를 지속시킴으로써 부재의 틈을 메우려는 것이었다. 그런 잉그리드 앞에 마사가 그녀의 딸, 미셸이 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부재해야만 하는 존재가 불현듯 다시 현전할 때, 영화는 생과 사를 구분 짓는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식별 불가능한 시공간으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사가 삼킨 것은 생을 삭제하는 총알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것이었을까. 마사가 누웠던 선베드 위로 미셸이 다시 한번 몸을 누일 때, 그녀의 얼굴 위로 눈과 함께 평온함이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부재하면서 현전하기
‘부재하면서 현전하기’로 점철될 수 있는 틸다 스윈튼의 변신술은 <룸 넥스트 도어>에서 처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영화의 모더니티를 실현하고자 했던 데릭 저먼의 <카라바지오>를 통해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다. 바로크회화를 견인한 카라바조의 삶과 회화를 영화적으로 재현한 이 영화에서 스윈튼은 화가와 사랑에 빠지는 레나 역을 맡는다.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는 카라바조의 붓칠에 의해 화가의 캔버스 위, 정확히는 회화 <성모의 죽음> 속 안료로 외양을 바꾼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과 동시에 회화-이미지로 현전한다. <아이 엠 러브>의 엔딩 시퀀스는 어떠한가. 스윈튼이 연기한 엠마는 자신의 본래 이름조차 망각한 채로, 수직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층계와 더불어 유구한 역사가 지탱하고 있는 한 가문의 거대한 저택에 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녀는 수직적 층계의 끝, 바닥면으로 쏟아지듯 걸어 내려와 거칠게 숨을 몰아쉰 뒤, 수평적 공간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수직적 공간을 마침내 허물고서 화면 밖으로 실종된 그녀의 빈자리를 비춘다. 이제 이 빈자리에 현전하는 것은 아직 채 식지 않은 스윈튼의 뜨거운 호흡과 그녀의 선택을 지지한 딸 베타(알바 로르와처)가 이어받은 새로운 유산, 도래하는 자유의 시간이다. 부재하면서 현전하는 이러한 신체의 작동방식은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에 기대어보자면 ‘감각적인 것의 분할’로 이야기할 수 있다. 스윈튼은 프레임 안팎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기존의 가치와 감각들을 자유롭게 재배치한다. <아이 엠 러브>에서 그녀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수직적 공간을 평평한 수평적 공간으로 바꾸고, 오래된 유산이 지배하던 시간을 화석화하고 새로운 시간을 태동시킨다. 한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스윈튼은 서사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지만, 그녀가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짧게 영화에 머무르면서도 벤자민(브래드 피트)에게 캐비아의 맛과 사랑의 감정을 교화시킨다. 그녀의 부재는 벤자민이 삶의 여정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도록 부추긴다. 그런가 하면 <메모리아>에서 스윈튼은 안테나였다. 정체불명의 육중한 금속 소리에 사로잡힌 제시카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서 에르난(엘킨 디아즈)의 몸으로 전이되는 두터운 역사를 자신의 살로 읽어낸 후, 그녀는 또다시 사라진다. 이후, 하나의 시퀀스로 묶을 수 있는 숏들이 이어진다. 제시카가 머물렀던 풍경과 여정의 집합체인 이 숏의 덩어리는 그녀가 눈으로 보았던 장면들이자 이제는 그녀의 기억으로 편입된 회상-이미지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스크린이자 제시카의 뇌이다. 그녀는 부재하기를 망설임 없이 이행하면서, 자신의 뇌를 스크린에 헌신한다.
혼종의 동물, 조각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은 <메모리아>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혼종의 동물’에 비유한다. 위라세타꾼의 프레임 안에서 틸다 스윈튼 역시 두개의 시공간을 횡단하는 혼종적인 동물로 역할한다. 여기에, 푸코가 강변했듯 적어도 영화에서 스윈튼의 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구성되어왔다. <올란도>에서 그녀는 남자이자 여자로 400여년을 살아냈고, <콘스탄틴>에서는 무성(無性)의 천사 가브리엘로 분한다. 또한 금단의 열매가 아닌 인간의 피를 먹고사는 흡혈귀 ‘이브’였으며(<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부조리의 민낯을 폭로하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했다(<설국열차> <옥자>). 뿐만 아니라, 예술적 동지였던 데릭 저먼의 유언과도 같은 말들을 프레임 뒤에서 낭독하는, 푸른 목소리이기도 했다(<블루>). <존 버거의 사계>에서 그녀는 34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 태어난 존 버거를 자신의 쌍둥이로 상정하며 분리된 두개의 시간 축을 하나로 통합한다. 이렇듯 그(녀)는 혼종의 동물이 되기를 기꺼이 자처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시적으로 재현하면서 영화와 함께 걸었다.
카메라가 틸다 스윈튼을 프레임 안으로 포섭할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술했듯 감각들이 재배치될 수 있는 잠재성이다. 그녀가 화면의 정면에 위치하여 온화한 표정으로 카메라 혹은 사물들을 응시할 때, 영화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육중한 이미지들이 켜켜이 쌓인 총체, 스윈튼은 조각적인 존재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라오콘에 대한 레싱의 견해를 해체하고 차가운 조각상에서 이미지의 동적 움직임과 조합, 몽타주를 읽어냈다. 한 배우(조각)의 등장과 배치는 프레임 안의 시공간을 가변적으로 탈바꿈시키고,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은 현재로 분기한다.
다시 <룸 넥스트 도어>로 돌아가, 마사의 복제인간 혹은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미셸이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잉그리드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놀란 듯 잠시 정지한다. 마사가 남긴 것은 서랍 속 전장 일기가 아닌, 미셸이라는 움직이는 조각이다. 뒤틀린 시공간 안에서, 잉그리드는 이제 인쇄된 활자가 아닌 행간에서 지속되는 삶과 이야기를 읽어낼 것이다. 우리는 엔딩에 이르러 잉그리드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에서 온화한 활력을 느끼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끝으로, 조안나 호그의 단편 <카프리스>를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스윈튼은 두려움을 모르는 모험가였으며, ‘러키’로 불렸다. 혼종의 동물이자, 조각,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러키’였던 틸다 스윈튼이 영화의 존재론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오늘, 여전히 모험을 이어가며 새로움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분명 행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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