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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기획] 2024년 한국영화 키워드 - 유산(遺産)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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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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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엔 식구들끼리 더 자주 다퉜다. 한국영화 속에서 말이다. 동서고금의 서사 예술에서 가족이 한 사회의 숨은 풍경을 전경화하는 역할을 맡아왔다는 점을 상술할 필요는 없겠다. 최근 몇해 사이 한국영화에서 가족은, 완성형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본격화하는 개인의 곤경을 집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기생충>(2019)은 몹시 발빠른 출발이었다. 올해 <장손>을 비롯해 <딸에 대하여>, <은빛살구>(2025년 1월 개봉예정), <부모 바보>, <해야 할 일>에 이르는 작품들이 위의 풍경을 앞세웠거나 갈등의 동기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흘러온 ‘가족의 역사’를 우선 개괄할 필요가 있겠다.


전후(戰後) 산업화를 이루기까지 한국의 가장 주요한 자원은 고품질 저비용의 노동력이었다. 가족은 근면한 노동력 공급원으로서 사회간접자본이었다. 이를 ‘사회인프라 가족주의’로 명료하게 개념화한 연구가 있다(장경섭,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인구 중 농민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1970년대 이전까지 다수 한국 가족의 목표는 농사 지어 번 돈으로 2세 남성을 공부시켜 출세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 구성원의 희생(경작과 가사 노동의 병행, 진학 포기와 질 낮은 도시 일자리 취업 등)이 당연시됐다. 명문대 선호 현상이 세계 어느 사회보다 짙어져가는 가운데 한 가족의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입시에 투입하는 집이 많았다. 80년대 이후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 비율이 빠르게 늘어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뤄졌으나, 젠더 격차를 좁히는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다수의 대졸 여성이 결혼 후 육아 및 가사 노동을 도맡았다. 90년대 문화 융성기를 거쳐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은 한국의 가족들은, 아파트와 입시에 매달리지 않으면 까마득한 불평등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학습했다. 불안은 욕망이 됐고 욕망은 시장을 형성했다. 어떤 이는 2세가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대물림하기 위해 각자의 노력을 기울였다. 20세기 사람들의 부지런한 욕망이 모이고 모인 결과, 21세기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풍토에서 적지 않은 유권자들은 공동체를 통한 문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성급하게 인지도를 높인 정치인의 포퓰리즘 또는 갈라치기 수법에 마음이 동했다. 2024년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그 결과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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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한 각본이 돋보이는 영화 <장손>은 이 층위에서 볼 때 올해 어느 영화보다 최첨단의 자리에 있는 이야기다. 전쟁-독재와 산업화-민주화 및 절반의 성공-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온 다세대(多世代) 인물들이 가업 승계, 성역할, 유산 상속 등을 놓고 복닥거린다. 균열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상상하게 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침습당해 취약해진 부위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다 터져나오는 인생사의 균열과 조응한다. 2024년 말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고 이 영화의 갈등이 그렇다. 가부장의 실질적 유지·운영자는 여성인 할머니였고, 한때의 민주투사는 주취 폭력을 일삼는다. 이 균열의 출발은, 가진 것 있는 위 세대와 그렇지 못한 아래 세대 사이의 격차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하게 될 21세기의 청년세대는 20세기 사람들의 세계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위 세대와의 자산 격차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 대물림될 것과 대물림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렇게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은빛살구>의 자존심 강한 주인공은 아버지의 재산을 기어이 받아내야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다. 주인공 스스로 느끼는 이율배반 또한 위 세대로부터 대물림되는 모습이 스산하다. <딸에 대하여>의 딸은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받고도 작고한 아버지가 중동에서 일한 대가로 마련한,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신세다. 확보되지 못한 주거권은, 다른 권리를 주장하려 할 때마다 걸림돌이 된다. 이 영화의 논란거리인 가부장 계승의 코드 역시 개인으로서는 도리 없는 구조적 대물림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야 할 일>의 주인공이 해야 할 일 앞에서 고뇌하는 이유도 주거권 문제가 전제돼 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는 병든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기록해온 자신의 유산을 공개하는 방식을 놓고 딸과 다툰다. 시사 이슈에 관심이 많은 양우석 감독이 <대가족>을 통해 가업 승계 문제를 소재로 삼은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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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상업영화 섹터로 가보자. <파묘>에서 대물림되는 것은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다. 이 영화의 인식에 따르면 미래세대는 과거 탓에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고, 위 세대는 다음 세대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와 같은 인식 세계에서 적지 않은 상업영화가 손쉽게 취하는 해법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분명한 악을 설정하고 이를 무찌르는 일이다. 위에 언급한 저예산·독립영화들의 시도와 달리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상업영화의 의사결정을 움직인 다수의 사례가 이와 유사했다. 잘못된 역사가 올바로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임은 물론이겠거니와 이같은 이유로 한국 상업영화들이 기획에 편리한 악당을 설정하고 몰두하는 관습적 패턴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런가 하면 <베테랑2>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처럼 ‘능력 있는 중년 남성주인공’의 위기 제조 수단으로 연약한 자녀를 내세우는 묵은 방식 또한 올해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한국영화의 주요 의사결정층인 중년 남성들이 이처럼 부족한 창의력을 세대 묘사를 통해 증명하는 데 열중한다면, 영화계의 미래세대는 더이상 물려받을 유산이 없다고 체념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커지는 202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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