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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기획] 2024년 한국영화 키워드 -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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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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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의 몸에 깃드는 외설적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2024년의 한국영화가 거듭해서 스크린에 불러낸 것은 불특정한 신체에 소란스럽게 덧씌워지는 귀신들의 목소리다. 올해 최대의 흥행작이자 화제작인 <파묘>의 악령과 요괴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영화가 불러낸 ‘귀신’이란 인간의 주변에서 인간을 잠식하고 흉내 내는 비인간 존재(혼령, 외계인, 디지털 프로그램 이미지)는 물론이고 특정한 목적으로 다른 인격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가상의 정체성을 모두 통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원더랜드>에서 죽거나 혼수상태에 빠진 인간은 디지털로 생성되는 이미지를 매개로 가상의 프로그램 ‘원더랜드’에서 되살아난다. 스크린과 모니터 위에서 이미지로 다시 살아난 태주의 다정하고 이상적인 목소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낯선 회복기를 겪는 태주의 건조한 목소리와 나란히 놓인다. 류승완의 <베테랑2>에서 정의로운 자경단을 자처하는 ‘해치’이자 형사인 박선우는 가짜 ‘해치’를 내세워 검거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수사에 혼동을 일으킨다. 안국진의 <댓글부대>에서 주인공 일당은 온라인 공간 속 익명의 목소리를 빌려 가짜 여론을 조직한다. 익숙한 장르영화의 규칙과 작법을 따르는 <파일럿>이나 <탈주>에서도 주인공이 숨겨진 목적을 품고 다른 정체성으로 변장하고 가장하는 모티브가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파묘>의 화림과 봉길이라는 두 명의 무당은 캐릭터 조형의 특수한 사례라기보다 한 해 동안 한국영화에서 되풀이된 보편적 정서를 내면화한 사례에 가깝다. 2024년 한국영화가 묘사한 인물들이 대부분 무당이라는 뜻이다. <원더랜드>의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부활한 죽은 자의 이미지, <외계+인 2부>에서 지구침공을 위해 인간 신체에 주입되는 설계자, <댓글부대>에서 커뮤니티와 댓글창에 달리는 무수한 여론. 그들은 불투명한 몸을 빌려 다른 존재의 일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한국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상이한 형태로 빙의되는 무당의 복화술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영화가 몰두하는 복화술이 병리적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제작된 한 편의 미국영화가 ‘한국인’을 빌어 시도하는 또 다른 복화술을 마주하면서 도드라진다.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국 이민자 2세가 구사하는 복화술의 도구로 한국인을 활용한다. 이 영화의 태성에게선 어떤 구체적인 삶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노라의 첫사랑이라는 관념으로만 24년의 세월을 통과하고 아무런 동기 없이 마침내 뉴욕에 도착한다. 태성이라는 캐릭터는 이민자 미국인이 잃어버린 유년기의 정서를 노스탤지어로 제공하되 그들의 일상을 치명적으로 흔들지 않을 만큼만 구체화된다. 우리는 셀린 송이 묘사한 태성을 보면서 느끼는 어색함을 안고 다시 한국영화의 수많은 관념적 복화술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수많은 캐릭터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태성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반복해서 조직하는 유사-무당의 캐릭터들은, 독립적인 인격으로 사건을 맞닥뜨리고 선택을 수행하는 영화적 인물의 소멸을 거꾸로 증명한다. 어쩌면 우리는 관념으로 떠다니는 귀신들의 복화술에 기대지 않고선, 영화적 인물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설득할 수도 없는 단계에 이른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스크린에 범람하는 외설적 복화술로서의 영화들에 대항하는 한 편의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를 말하고 싶다. 박수남, 박마의의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서로 다른 기억과 기록과 서술의 위상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화술의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를 형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균열을 투명하게 수용한다. 많은 이들이 인상적으로 거론하는 장면이 영화의 초반부에 나온다. 박수남과 박마의 감독은 카메라를 중간에 두고 말다툼을 벌인다. 카메라 뒤편에 앉은 박마의는 말한다. “카메라 앞에서 엄마라고 말하지 마. 카메라를 통해 보는 건 내가 아니야.” 그 말에 곧바로 박수남이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카메라는 나잖아. 내가 영화잖아” 카메라 뒤편의 연출자는 카메라와 다큐멘터리스트의 분리를 말한다. 카메라 앞에 출연하는 연출자는 카메라와 영화감독의 등치를 말한다. 그리고 두 개의 견해는 <되살아나는 목소리>에 상대와 충돌하는 변증법으로 선명하게 담겨 있다.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 연출자인 박수남이 남긴 10만 피트가량의 미완성 필름(코마츠카와 사건, 위안부 피해자, 원폭 희생자, 군함도 강제징용자, 오키나와 문제를 다뤄온 작업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을 복원하는 데서 시작하는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는 두 명의 연출자가 있다. 이는 이 영화에 두 가지 종류의 기억(필름의 물질적 기억과 다큐멘터리 작가의 사후적 기억), 두 가지 방식의 서술(사건을 직접 마주한 박수남의 서술과 기록된 필름으로 마주한 박마의의 간접적 서술)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들의 다큐멘터리가 되살려내는 목소리는 서로 다른 시점에서 사건을 기록하고 관측하는 다성적인 불일치의 목소리들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필름과 카메라 안팎으로 번져나간다. 박수남 감독은 재일조선인 남학생이 일본인 여학생을 살해한 고마쓰가와 사건의 가해자 이진우의 사형 철회 운동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고마쓰가와 사건은 우리 재일조선인에게 남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야.” 카메라 뒤의 박수남은 피사체가 마주한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들이 간직한 문제는 복원된 필름을 공유하는 박마의의 눈에 되돌아온다. 박수남이 이진우와 주고받은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을 발간하던 1963년에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군으로 복무한 재일한국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며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촬영된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작업’이라는 명제를 남긴다. 하지만 박수남의 필름에서 되돌아오는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에 독점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 연출자가 경청하고 기록하는 피사체의 이야기는 “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박수남과 박마의는 영화를 매개로 위태롭게 진동하는 정체성을 주시하며 투명한 복화술로서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완수한다. 카메라 앞에 선 당신의 언어는 나의 언어와 다르지만, 당신이 말하는 문제는 곧 나의 문제와 직결된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이 불가능한 모순을 끌어안고 카메라가 수행하는 복화술을 스크린에 남긴다.



https://naver.me/FW6nCIM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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