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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기획] 2024년 한국영화 키워드 -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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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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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을 떠올리다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입거나 두른 겉옷에 유독 마음이 쓰였다. 디자인이 독특하거나 색감과 촉감으로 계절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출발해, 이런저런 생각을 부풀리게 되는 힘이 옷 속에 잠재해 있었다. 캐릭터의 개성이나 소속을 표현하는 기존의 역할에서 한발 더 나아간 인물의 외투는 영화에 가닿는 다른 방향을 안내하는 비밀 지도처럼, 자꾸만 만지작거리게 되는 실타래를 마음에 남겼다.


<리볼버> 속 하수영(전도연)의 걸음과 내내 동행한 점퍼와 <베테랑2>에서 박선우(정해인)와 함께 뒹굴던 패딩 점퍼는 이 글을 작동시킨 두 축이다. 특정 장면에서 받은 인상이나 사물이 영화에 관한 평가를 좌우할 정도로 강렬한 경우가 있는데, 두 영화 속 점퍼가 그랬다. <리볼버>에서 수영은 출소 후 점퍼 한벌을 갑옷처럼 두른 채, 내내 벗지 않는다. 색색의 실로 수놓인 점퍼의 후면은 뒤따르는 이를 기죽일 만큼 화려하다. 언뜻 용무늬를 연상시켜, 문신의 대체물처럼 보인다는 점도 특징이다. 건장한 남성들이 조직의 일원임을 드러내기 위해 새기는 문신과는 대조적으로, 하수영의 점퍼는 조직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표시한다. 살갗 위에 화려한 무늬와 색을 새기며 고통을 참는 지난한 시간을 비웃는 것처럼, 그저 툭 하고 걸친 점퍼가 강인함의 의미를 조정하여 망막에 새긴다.


한겨울의 실외가 액션을 위한 좋은 환경일 리 없다. 겨울의 추위는 배우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스태프의 몸마저 경직시킬 테니까. 하지만 두툼한 외투가 필요한 한겨울의 액션은 가벼운 몸으로 벌이는 액션이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린다. 영화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한계를 극복하고 전환하는 모습이 주는, 리얼함 너머의 리얼함이 액션과 함께 소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류승완에게 한겨울의 액션은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낭만과 패기와 향수를 작동한다는 의미를 덧입는다. 몸과 몸, 몸과 사물이 부딪힐 때의 통증에 심리적 완충작용을 하는 두툼한 점퍼는 액션을 할 때보다 액션을 중단할 때 제 역할을 한다. 박선우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을 때, 패딩 점퍼는 차가운 아스팔트로부터 체온을 얼마간 지켜주는 담요가 된다.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한파가 완성한 리얼리티는 진정성이라는 몸의 언어가 숨 쉴 최소한의 공기를 마련한다.


홍상수가 올해 발표한 두편의 영화에서도 계절은 중요하다. 하지만 계절 감각은 촬영할 당시의 조건을 반영하는 현실적인 차원에 머물기보다 초현실적인 감각에 가닿는다. 계절은 주인공이 입은 외투의 색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름의 영화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입은 짙은 녹색 카디건과 가을의 영화 <수유천>에서 전임(김민희)이 입고 나온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계절과 교감하며, 그들이 자연의 일부임을 표시한다. 이리스와 전임은 극 중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허락된 유일한 인물로서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어딘가에 정박하기보다는 바깥에 존재하거나 이동하는 인물로 포착된다. 마치 분신하듯 다른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리스와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전임은 일상적 캐릭터와 정령에 가까운 비존재를 오가며 정체를 감춘다.


무속신앙과 역사적 사실을 접목한 <파묘>는 부동산의 가치로 좌우되는 땅을, 풍수지리에 기반을 둔 역사문화적 대상으로 이장한다. 무당 이화림이 사후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존재이듯, 이화림(김고은)을 연기한 김고은은 죽은 과거에 새로운 옷을 입히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존재로 기능한다. 탁한 피를 연상시키는 자주색 가죽 트렌치코트로 대표되는 복고풍 의상을 세련되게 소화한 김고은은 그처럼 간단한 방식으로 영화의 시간대를 교란한다. 여기에는 전근대적 역사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 이화림은 과거의 정령을 깨우는 자이자 그 자신이 깨어난 시대의 현현임을 증명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시대가 교란되는 순간은 <정순>에서도 포착된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정순(김금순)은 밀회의 대상이던 회사 동료에 의해 사적인 동영상이 외부에 유출되는 상황에 놓인다. 영상이 유출되었음을 확인한 정순은 흰색 유니폼 상의를 머리에 아무렇게나 얹은 채 넋이 빠진 상태로 길에 나선다. 이때 정순의 모습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쓴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인상은 배우가 가진 고전적인 마스크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범죄자가 아닌 범죄의 피해자가 수치심에 자신을 숨겨야 했던 기나긴 시간이 얼굴을 가린 채 거리에 선 정순의 동작 속에 축약된다.


노동자의 유니폼은 회사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편일지 모르나, 영화에서 유니폼은 정반대의 작용을 하곤 한다. <해야 할 일>에서 유니폼은 소속감이 얼마나 연약한 개념인지를 표시한다. 조선소의 작업장에 현미경을 댄 영화는 겉보기에는 동일해 보이는 구성원의 차이를 확대한다. 조직원은 크게는 사측과 노동자측으로 분리되며, 그 안에서도 계약과 진급 속도에 따라 서로 갈린다. 노동자 개인의 내면에도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것 사이 격렬한 협상이 벌어진다. 바닷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두툼한 유니폼 점퍼는 고전적인 방식의 조직이 붕괴했음을 가리고 묶는 허구의 끈이다.


반면 서로 같은 옷을 입은 소속감의 힘을 믿게 하는 영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큐멘터리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FC안양 서포터스와 지역사회가 공유한 굴곡진 역사를 담는다. 서포터스 레드는 서포터할 대상을 잃어버린 황망한 상황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아 지역 축구단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 과정은 마치 영화가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은 관객이 영화를 탄생시키는 광경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다른 이름과 모습이 된 이전의 팀과 현재의 FC안양이 맞붙는 경기장에서, 서포터스는 트레이드마크인 홍염을 피워 올린다. 과거의 팀과 완전한 결별을 표시하는 행위는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아우라를 뿜는다. 경기장 전체를 뒤덮을 듯 덮쳐오는 연기는 거대한 외투처럼 서포터스를 감싼다. 차갑고도 따뜻하다. 여기 이렇게 외투라는 키워드를 빌려 올해의 영화를 떠올리는 까닭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던 칼바람 속에서도 우리를 묶어주는 투명한 외투의 감촉을 눈과 손으로 잠시라도 더듬어보길 바라는 마음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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