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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 '하얼빈' 우민호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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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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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시국과 어울리는 영화라는 반응이 많더라.

= <남산의 부장들> 때는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졌는데 <하얼빈>은 비상계엄 이후에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 <남산의 부장들>의 시대 배경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까.
= 초등학교 다닐 때 비상계엄을 겪은 뒤 살면서 다시 경험하지 못할 줄 알았다. 우리가 역사를 잊는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비극의 역사일수록 되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2월14일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에서 “1980년 5월 광주는 2024년 12월의 우리를 이끌었다. (중략)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큰 빚을 졌다”고 했다. <하얼빈>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이 대사 역시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한다더라. 안중근 장군이 실제 했던 말이다. <안중근 자서전>을 읽으며 묵직한 감정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도 삶을 반추하게 하고 큰 위로를 받았다. 관객 역시 나처럼 힘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무게감 있게 찍고 싶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에서 나라를 잃은 독립군의 정신을 오락영화로 소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만들면 안됐다.



- 초고는 케이퍼 무비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됐다고.
= 내가 다 뜯어고쳤다. 잃어버린 조국에 가족을 두고 동토의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하얼빈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건 동지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의심이 싹튼다. 실제로도 그랬다. 때문에 첩보 드라마 스타일이 <하얼빈>과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프렌치 누아르를 참고한 <남산의 부장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웅장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스펙터클한 자연 속에서 조국을 빼앗긴 독립군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초라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거대한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육체가 하찮게 느껴지지만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위해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숭고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물리적으로 열세인 싸움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도 칼도 폭탄도 아닌 강인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고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실제 결과물도 <토지>와 닮았나.
= <토지>를 읽었을 때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한민족의 모진 생명력을 느꼈다. 그래서 한이 있는 거다. 대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는 민초들의 생명력을 <하얼빈>의 곳곳에 넣어보았다. <하얼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 초반부 함경북도 신아산의 전투 시퀀스는 독립군이 크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육의 참혹함과 죽음의 공포를 리얼하게 담아낸다. <하얼빈>이 어떤 길을 가는 영화인지 알려준다.
= 광주의 한 목장에서 찍었다. 당시 광주에 40, 50년 만에 50cm가량의 폭설이 내렸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눈이 없었는데 우리가 가는 곳마다 눈이 내렸다.



- 마치 겨울 개봉을 예상한 듯이. (웃음)
= 원래 광복절 개봉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웃음) 촬영 때 계속 눈이 내리니까 하늘이 우리에게 눈을 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주어진 것을 이용해서 찍자고 하게 됐다. 제설 작업을 해서 전투 신을 찍었는데 우리나라 국토가 너무 아름다웠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은 국권, 주권, 자유뿐만 아니라 땅덩어리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땅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나무도 꽃도 곤충도 동물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유린당했다고 상상하니 통쾌하게 찍어서는 안되겠더라. 처음으로 독립군이 이기는 전투였는데도 처절하게 비극적으로 찍었다.



- 몽골과 라트비아에서 촬영했다. 영화를 찍기에 어떤 장점이 있는 곳인가.
= 원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하얼빈을 배경으로 찍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가까워서 수백년된 러시아 양식의 건축물이나 도로가 그대로 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두만강은 몽골 최북쪽의 홉스골에서 찍었다. 그곳의 강의 갈라짐이 우리의 분단된 조국 같았다.



- 얼어붙은 두만강부터 눈 덮인 신아산까지 일관된 맥락으로 이어지는 로케이션이었다.
= 수미상관으로 이어진다. 오프닝의 안중근 장군(현빈)의 뒷모습은 자신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희생됐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가 갈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거사를 성공한 뒤 앞모습은 성공에 심취한 승리의 얼굴이 아닌 그 이후를 걱정하는 표정을 보여준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죽인다고 바로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폭력과 폭압은 더욱 거세진다는 것을 예견했다. 때문에 <하얼빈>의 엔딩은 통쾌해서는 안됐다. 그거야말로 역사 왜곡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 하얼빈 의거 이후 36년 뒤에 독립했지만, 물론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가 한몫했지만, 100년이 걸리더라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워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승리의 역사다.



- 영화를 끝까지 보니 안중근 장군이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인 포로 모리 다쓰오(박훈)를 풀어줬지만 이 때문에 역습을 당했던 에피소드가 극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같더라. 실제 역사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다.
= <안중근 자서전>을 보고 처음 알게 된 얘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우쳤다. 실패한 장군이었고, 온몸으로 지탄받았고, 하얼빈으로 향하는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까. 그런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첩보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고뇌한다. 그분이 느꼈을 번민과 번뇌와 두려움에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국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동지뿐인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하지만 <하얼빈>의 밀정은 <암살>의 염석진(이정재)과 다르다. 염석진이 욕망을 향해 치달아갔다면 <하얼빈>의 밀정은 나약하다.



- 안중근, 우덕순(박정민), 최재형(유재명)은 실존인물이지만 허구의 캐릭터도 등장한다.
= 안중근 장군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거사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고 싶었고,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가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과 함께 독립군에게 버팀목이 돼주는 역할이었으면 했다. 실제 별명이 페치카(러시아식 벽난로)였을 정도로 따뜻했던 분이라고 한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 이후 밀정이 됐다, 아니다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아직 팩트로 드러난 부분은 없다. 우직한 산사나이 같은 면모에 초점을 맞추며 극을 살짝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공부인(전여빈)은 강단 있지만 동시에 우아하고 품격 있는 여성 독립군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당시 하얼빈 의거에 여성 독립운동가가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안중근 장군이 총을 쏘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공부인 캐릭터를 통해 크게 조명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는 순간을 부감으로 찍었다.
= 하얼빈 의거를 다룬 작품을 보면 하얼빈역에서 총을 쏘는 안중근의 얼굴, “코레아 후라!”(에스페란토어로 ‘대한국 만세’란 의미)를 외치는 얼굴, 쓰러져서 피 흘리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보통 이렇게 찍는다. 근데 <하얼빈>은 그렇게 찍고 싶지 않았다. 첫발을 쏜 뒤 부감으로 이 신을 찍은 것은 이 순간을 고대했던, 먼저 떠난 동지들의 시점으로 담고 싶어서다. 그래서 현빈 배우에게도 하늘을 향해 동지들이 들을 수 있게끔 크게 외치라고 했다. 안중근 장군이 첫발을 쐈을 때 주변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데, 실제로도 그랬다더라. 예상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사람들은 늦게 반응한다.



- <내부자들>이나 <남산의 부장들>이 단독 숏이나 대화 신을 많이 찍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룹 숏이 많다. 스타 배우의 아우라를 의도적으로 지우면서 촬영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 어떤 영웅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서로 의지해나가는 동지에 대한 영화다. 그로부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단독 클로즈업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이들이 군상처럼 느껴지게 찍었다. 당시 독립군 사진을 보면 먹을 것도 제대로 된 옷도 없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그런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 그룹 숏을 잘 찍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 같던가.
= 이것저것 맞춰야 할 게 많다. 요즘엔 컷이 빠르게 바뀌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한컷 안에, 그리고 관객의 집중도가 흐트러지지 않게 담아내야 해서 그런 점이 어려웠다. 앵글을 바꾸고 다른 컷을 찍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엔지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



-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뀐 이후엔 가능한 한 다양한 컷을 찍은 후 편집실에서 잘 이어 붙이자는 식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 지금 대세가 그렇다. 하지만 <하얼빈>은 지금 찍지 않는 방식으로 클래식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독립운동가들의 군상이 하나의 명화처럼 보이게 찍히길 바랐다. 요즘엔 카메라를 3대씩 돌리는데 우리는 폭파 신을 제외하면 모두 아리 알렉사 65 한대로만 찍었다. 원래 컷을 빠르게 붙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관객이 견디고 버티면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빠른 컷 전환으로 보여주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관객들, 특히 컷 전환이 빠르고 쇼츠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 릴리 프랭키가 이토 히로부미 역 캐스팅에 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다. 일본 배우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 하나도 개의치 않고 응했다.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시나리오를 줬는데 선뜻 하겠다고 하더라.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재미있게 봤단다. 보통 일본에서 소시민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일본 감독도 아닌 한국 감독이 자신에게 이토 히로부미 역을 제안하니 호기심도 생겼던 것 같다. 배우를 직접 만나보면 소년 같은 느낌이 있다. 뉴진스는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하며 묻더라. 잘 모른다고 말했다. (웃음) 원래 블랙핑크 지수의 ‘빅팬’이라고도 하고 귀여운 면이 있으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게 근현대사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일본인만큼 잘 알 수는 없다. 이토 히로부미 캐릭터는 상당 부분 릴리 프랭키에게 맡겼다.



-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 캐스팅과 조합이 신선했다.
= <내부자들> 때 함께한 조우진을 제외하면 그동안 같이 작업한 적 없는 배우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걱정 아닌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새로운 배우들과 함께하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안중근의 나이가 만 30살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은 20, 30대가 주축이 돼 이끌었다.



- 안중근은 지금 1994년생과 동갑이었다.
= 그런데 당시에 그런 거사를 치르셨다니 참 놀랍고 고맙고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보니 요즘 20, 30대도 엄청나더라. 계엄 해제가 됐는데도 밤새 국회를 지키며 계엄군을 온몸으로 막아낸 청년들이 있었다. 영화의 힘을 느낀다. <서울의 봄>을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다던데 그래서 비상계엄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다시 반복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젊은 세대에게 고맙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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