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주 : 넌, 내가 말을 못한다고 귀도 안 들리는 줄 알아? 감정도 못 느끼는 줄 알아? 뭐? 무차별 공격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왜 난 아미 다치고 찢겨서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지…? 내가 니 약점이라고 했어? 약점은, 덧나기 쉬운 상처 같은 거야. 누가 건들면 움츠러들고, 사정없이 흔들리고, 필사적으로 방어하게 되는 거, 그게 바로 약점이야. 근데 넌 어제 조금도 안 그랬잖아. 이 가증스럽고 나쁜자식아.
사언 : 혹시 방금 욕한 건가?
희주 : 하긴, 방금 니가 말한 그 아내가…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
사언 :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406. 그럼 내가 먼저 할까요? 아내는 무사하더군요. 죽이는데 실패한 겁니까? 왜 말이 없습니까? 어제는 잘만 떠들더니. 아, 그 떠드는 말을 내가 들어 줄 시간이 없었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칠 건지 그 계획이나 한번 들어 봅시다. 오늘은 비교적 한가한 날이니까
희주 : 하긴, 파티장에서까지 바쁠 일은 없겠지.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야. 사랑꾼 코스프레를 아주 잘하던데? 내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놀랐나? 그래,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눈치를 못 채더군.
사언 : 허세 떨지 마.
희주 : 허세?
사언 : 니깟 놈이 여길 어떻게 들어와? 여긴 초대받은 손님 외엔…
희주 : 통 음식을 안 먹던데, 좀 먹지 그래? 트러플이 올라간 브루스케타. 그거 맛있던데.
사언 : 너 누구야?
희주 : 이제야 내가 조금 궁금해졌나?
사언 : 웃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누구야,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희주 : 그래, 답할 게. 아까 니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 니 아내를 어떻게 해칠 계획이냐고 물었지?
사언 : 허튼짓하지 마. 여기가 어디라고 너 따위가 감히.
희주 : 이런, 당황했나 보네. 어제 좀 그러지 그랬어?
남자 : 뭐야, 당신? 뭐하는 거야, 지금?
여자 : 응? 자기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사언 : 미안합니다.
희주 : 방금 뭐야, 헛다리 짚었어? 나 같은 놈이 여기 있을 리가 없다며.
사언 : 너 같은 루저 새끼는 방구석에 처박혀서 히죽대고 있겠지. 그런데 너 따위가 감히 이 백사언의 아내를 어떻게 해 볼 방법이나 있겠어? 잘 들어. 날 협박하고 싶었다면 넌 애초에 인질을 잘못 골랐어. 내 아내? 누가 내 아내인데? 본 적이나 있어?
희주 : 그래, 맞아.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 진짜 니 아내가 누군지. 근데 난 알아. 홍희주는 진짜 니 아내가 아니라는 거. 진짜는 따로 있지. 홍희주 말고 원래 결혼하려고 했던 약혼녀. 청운일보 첫째 홍.인.아. 그 여자, 결혼식 전날 도망쳐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며?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제가 될 뻔했던 그 여동생이랑 결혼하는 건, 너무 막장 아니야? 하긴 청운일보와 너네 집안 뗄 레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잖아. 혼사는 맺어야 하니, 도망간 언니 대신 동생을 볼모로 잡아 둔 건가? 어쨌거나 사람들이 진짜 좋아하겠다, 그치? 확 깨잖아. 티끌 하나 없는 천하의 백사언 대변인이 한 자매를 엘리베이터처럼 탔다 내렸다, 탔다 내렸다. 잘만 떠들더니 왜 아무 말이 없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안 궁금해?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백사언!
사언 : 원하는게 뭡니까?
희주 : 그래, 잘했어. 그게 모법 답안이지.
사언 :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습니다.
희주 : 그럼 잘 들어. 지금부터 내 요구사항을 말할 테니까. 홍희주 버리고 원래 니 약혼녀 데려와. 어차피 니 인생에 홍희주는 필요 없잖아. 안그래? 알아들어? 니 사생활 때문에 아버지 선거까지 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원상 복귀 해 놔. 안 그럼 니 결혼에 관한 비밀 다 까발려 버릴 거야. 형아야, 쫄았어? 나 같은 방구석 루저 때문에 백사언이 쫄다니 재밌네. 내일까지 결정해. 다 귀찮으면 20억으로 퉁치든지. 내일까지다.
사언 : 다 했습니까? 어떻게 너 같은 새끼들은 레퍼토리가 바뀌질 않지?
희주 : 뭐?
사언 : 협박이란 걸 하고 싶으면 나에 대해 공부부터 합시다. 어떻게든 내 입 한번 열어 보겠다고 달려드는 기자만 수백입니다. 허접한 스캔들 따위 가짜 뉴스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고, 꼴같잖은 협박범 하나 삶아 먹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내가 왜 홍희주를 버리라 마라 그딴 주제넘는 소리에 응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조용히 있는 내 사람까지 왜 걸고넘어져?
희주 : 내, 내 사람? 내 사람 같은 소리 하네. 야, 그렇게 소중한 니 사람한테 어제 무슨 일이 었었는지 알아? 죽을 뻔했어. 아, 아니 죽일 뻔했어, 내가 진짜! 내가 걔 차째로 납치해서 목도 조르고 머리채도 잡고, 칼도 들이댔다, 진짜 죽이려고. 알아들어? 어?
사언 : 그래서?
희주 :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무서웠지. 무서워했지, 엄청!
사언 : 무서워해서 그 다음엔?
희주 : 어, 죽기 일보 직전인데 살려 달라고 말도 못 하더라. 걔는 원래 말을 못 하니까.
사언 : 그리고?
희주 : 근데 니가 인정사정없이 전화 끊었잖아. 시체가 나오면 연락하라며. 그래, 홍희주 진짜 시신으로 발견될 뻔했다. 빗길에서 차가 제대로 굴렀거든!
(퍽 소리)
사언 : 내가 남자 새끼 면상이 이렇게까지 궁금했던 적은 없는데. 곱게 체포될 생각은 버려, 406.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잡는다.
(타이머 알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