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만 받고 끝내려고 했던 걸 중간에 장실장님이 혹시나 쓸 데가 있을 지 모르며 받아두라고 했을 때 받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지욱은 입사 후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는 그대로네.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는 별반 다를 것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집을 보며, 지욱은 픽 웃었다.
짐을 정리하고, 쇼파에 앉은 지욱은 해영이 말한대로, 곰곰히 자신에 대해 생각해봤다.
할머니 문병, 학업, 편의점 알바, 은옥 엄마, 보육원 봉사. 가난한 고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만 한, 빡빡하게 달려왔던 삶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해영이 떠올랐다.
'지욱아'
다정하게 나를 불러주고, 내 생각을 해주던 사람. 옅은 미소를 짓던 지욱이 습관처럼 손을 만지고는 허전함에 울상을 지었다.
'너는 자유야'
자유면 뭐해. 진짜 하고 싶은 건 할 수 없는데. 지욱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며칠 뒤, 지욱은 세진에게 연락했고, 둘은 지욱의 집에서 만났다. 반갑게 지욱에게 인사하는 세진을 보니, 지욱의 마음도 조금은 녹아드는 것 같았다.
"저 떠나려구요."
지욱은 담담하게, 며칠동안 고민끝에 내린 결론을 말했다. 이곳에 있을수록 해영에 대한 그리움만 커지는 통에,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그렇게 결정하셨군요."
"네."
세진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복씨 집안이 아까운 청년 하나 망치는구만. 세진은 그 사실에 조금은 화가 났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해요."
"그러십시오. 김지욱씨, 첫 출국 아닙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욱은 세진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얼마 뒤, 출국일자가 잡혔다는 말에 지욱을 다시 만난 세진은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
"정말, 이게 전부입니까?"
"네."
"비행기표랑.. 그.. 이 돈 몇푼.. 이게 정말 끝이에요?"
"네. 뭐 이것도 사실 많.."
"김지욱씨."
지욱이 욕심이 없다고는 하나, 정말 적당히 소소하게 챙겨준 느낌에 세진은 헛웃음이 났다 물론 규현의 입장에서는 챙겨준다고 챙겨줬을 것이나, 몇 년간 복씨일가의 발닦개를 했던 세진이 아는 게 많은 게 문제였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애 협박해서 인생 조져놨으면, 그 댓가는 섭섭치 않게 치뤄야 하는 거 아닌가?
"김지욱씨"
"..네?"
"김지욱 씨 인생 이것밖에 되지 않습니까?"
"실장님.."
"김지욱씨 인생 박살난 댓가인데 이정도로 만족하시면 안됩니다. 일어나세요."
그길로 세진은 지욱의 손을 잡고 규현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 집을 엎어놓았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조근조근한 말투로 매섭게 몰아치는 세진의 기세에 선정아나 복기호는 혀를 내둘렀고, 그제사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은 지욱의 지원사격으로, 어느 정도는 받아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김지욱씨가 응당 받아야할 것들이었으니까요. 아, 물론 제 성에 차지는 않습니다."
정말 썩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어서, 지욱은 픽 웃고 말았다.
또다시 며칠 뒤, 갑자기 지욱을 찾아온 세진은 지욱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대리인 위임장? 지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꿀비그룹, 생각보다 써먹을 데가 많습니다. 일단 김지욱씨가 자신의 입지와 혜택에 익숙해지시기 전까지, 제가 가이드 해드리겠습니다."
"아..안그러셔도.."
"아무것도 없는 개털보다는, 뭐라도 쥐고 있어야 합니다. 김지욱씨 잘 알지 않습니까. 자본주의가 어떤건지."
형만 믿으라는 강렬한 눈빛에 결국 지욱은 도장을 찍고, 그 길로 또다시 세진의 칼춤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도래한 지욱의 출국일. 쓸쓸히 홀로 출국할 것 같았으나, 그 날 공항에는 세진과 복기호, 그리고 복규현이 배웅을 나왔다.
출국 수속을 마친 지욱에게 세진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도착하시면 현지 직원이 나와 있을 겁니다. 지내실 곳은 마련해 뒀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끝까지 자기 걱정만 하는 세진을 보며, 지욱은 픽 웃었다. 아비없는 자신을 위해 오매불망 애써주는 사람. 아마 아버지란 존재가 이럴테지. 지욱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세진을 향해진심으로 말했다.
"건강하세요 장실장님."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말에 감격하는 세진을 보며, 지욱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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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이름 예쁘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