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해영은 침대 옆 협탁 안 서랍에 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열자 지욱과 해영의 결혼 반지가 해영을 반겼고 해영은 그 반지를 끼고 있던 날들이 떠올랐다.
‘왜 자꾸 남편이라고 불러?’
‘우리 아직, 가족이야!’
해영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던 지욱과 그 손에 끼워져 있던 이 반지.
'지욱이 들어온 거 알지?'
'결혼식 때문에 들어왔다며?'
이제 너는 곧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반지를 나눠 끼고, 그 사람의 가족이 되겠지. 마음이 복잡해진 해영은 반지 케이스를 닫아 협탁 위에 올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 없이 걷던 해영은 늘 가던 편의점의 불이 꺼져 있는 것과, 곧이어 커다란 폐점 안내문을 발견하였다. 여기, 닫았구나. 해영은 예상치 못한 일에 멍하니 편의점 앞에 서 있었고, 그런 해영의 머릿속에 편의점에서의 지욱과의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 창문을 닦던 지욱이 물을 뿌려 놀라게 했던 것. 그리고 그런 지욱을 골려 주겠다고 편의점 문에 손자국 내던 일. 하나 남은 팡팡 젤리를 보란듯이 먹으며 해영을 약 올리던 일. 술 잔뜩 먹고 해영이 지욱에게 남편이 되어달라고 진상 부리던 일. 비 오던 날 해영의 우산 속으로 들어오던 지욱.
그리고, 단종된 팡팡 젤리를 공수해서 멋지게 프로포즈 해주던 일까지.
‘예스라고 하면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팡팡 젤리하고 덤으로 나까지, 가질 수 있어요. 결제하시겠습니까, 손님?’
애써 수면 아래에 밀어 넣었던, 적지 않은 둘만의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를수록 지욱의 빈자리가 조금씩 더 크게 다가오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지욱에 대한 그리움에 해영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 올랐다.
“울어요? 왜 울어요?”
왜 우리 편의점을 보면서 사연 많은 여자처럼 울고 있지? 눈물을 닦으며 훌쩍이는 해영을 편의점 점장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영은 다급히 눈물을 닦으며 대충 둘러댔다.
“아니 편의점이 망했잖아요. 저 이제 술이랑 담배 어디서 사요?”
“그동안 우리 편의점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남은 술이라도 이거 가져가시죠.”
대충 둘러댄 해영의 말에도 감동받은 점장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해영에게 들고 있던 봉지를 건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점장이 한 말에, 눈물을 닦던 해영의 손길이 멈추었다.
“아, 지욱아, 너 먼저 들어가. 와 줘서 너무 고맙다. 내가 여기 꼭 갈게.”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해영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지욱이 실감이 나지 않아 눈만 깜빡댔고, 잠시간의 정적을 깬 건 지욱이었다.
“담배, 못 끊었어요? 그럼 뭐 다른 젤리라도..”
“결혼한다며?”
“네?”
뜬금없는 말에 지욱이 되물었다.
“결혼식 때문에 들어왔다고 들었어.”
“아..”
“여자 친구 예쁘더라. 아.. 나 어제 시골집에 갔었거든. 인사를 할까 말까 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 축하해.”
아무래도 세라를 여자친구라고 오해한 것 같고, 어디서 결혼식 때문에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둘을 연결시켜서 오해를 한 것같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손님이 나에게 축하를 건낼 일인가? 진심이야? 사귀지도 않았고, 비록 가짜 남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는데, 붙잡거나 화를 내기는 커녕 결혼 소식을 듣고 축하를 해? 눈물을 잔뜩 매달고 반쯤 체념한 얼굴로 해영이 건내는 축하에 지욱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다야? 내가 결혼한다는데?”
서늘한 얼굴로 하는 말에 잠시 생각한 해영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하.. 축의금? 야, 내가 가긴 좀 그렇잖아. 내가 기운 씨한테.. 아, 그것도 좀 이상한가? 그냥 마음만 보낼께.”
축의금. 겨우 생각해 낸 게 축의금.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지욱이 빈정대며 말했다.
“필요 없어 그런 마음.”
그러나 뾰족한 그 말을 듣고도 해영은 멋쩍게 웃으며 이별을 고했다.
“갈게”
지욱은 뒤돌아 멀어지는 해영을 잡지 못한 채, 날 선 말을 했던 걸 후회했다. 그렇게 몇걸음 걷던 해영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영 하지 못할, 그리고 쭉 지욱이 궁금해하던 일을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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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욱아. 나한테 담배 처음 가르친 사람 누군 지 기억났어.”
“뭐?”
지금 이 순간에,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뜻모를 이야기에 의아해하는 지욱을 보며, 해영은 웃음 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빠 첫 기일 때, 처음으로 담배 샀거든. 라이터는 안 사고. 그래서 길 가는 사람한테, 불 빌리면 피는 거고, 못 빌리면 안 피우려고 했거든.”
그 때, 지욱은 해영과의 첫 만남이 기억났다.
‘야. 불 있니? 없음 말고.’
‘어릴 때 배웠나봐. 쪼끄만게.’
나였구나. 내가, 손님의 첫 담배의 주인공이었구나. 뜻밖의 정보에 멍해진 지욱의 머릿속에 해영이 했던 다른 말이 떠올랐다.
‘그거 알아? 이거 가르쳐준 사람은 평생 못 잊는다?’
우두커니 서 있는 지욱을 뒤로 한 채, 해영은 점장이 준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착찹한 마음에 봉지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딴 순간, 해영의 뒤를 따라온 지욱이 해영을 돌려세우고 해영의 손에 든 맥주를 뺏어 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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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술!”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애가!! 놀란 해영이 지욱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지욱은 맥주 한캔은 다 비운 상태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지욱이 말했다.
“그 얘기 나한테 왜 한건데? 결혼한다는 남자한테 담배 가르친 사람 나라고 왜 말했냐고.”
“그냥, 너 보니까..”
“나 잊지 못할 거란 뜻이잖아. 나 보고 싶었다는 뜻이잖아.”
지욱은 더듬거리며 변명하는 해영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나 보낸 거, 후회한다는 뜻이잖아.”
지욱의 말에, 해영은 쓸쓸한 눈을 했다. 어차피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사이. 조금은 솔직해도 되지 않을 까. 해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보고 싶었고, 잊지 못하겠지만, 널 보낸 건 후회하지 않았어.”
“왜?”
예상과는 다른 말에, 지욱이 되물었고, 해영은 지욱을 보낸 후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지욱아. 너는 어땠어? 아무도,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어땠어?”
아마도 너는 몰랐을, 너를 묶는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기를 바랬던, 나의 소망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편했어.”
“다행이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아서. 해영은 진심으로 웃었다. 그러나 뒤이은 지욱의 말에 해영의 안색이 변했다.
“근데, 그 어떤 침대도, 손님이 사준 침대만큼 편하진 않더라.”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위해 마련해줬던, 손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그 침대보다 더 편한 건 없었어. 그래서, 손님과, 손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줬던 내 방이 있던 이 곳이 나는,
“너무 그리웠어.”
“지욱아. 너 이러면 안 돼”
결혼할 사람 두고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해영은 지욱을 만류했다.그런데 그때 지욱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이거 주려고 온 거야. 오늘 생일이잖아.”
지욱은 캐나다 스노우볼을 꺼내 해영에게 건내고, 천천히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해영이 봤던 여자의 정체와 결혼식에 대해.
“세라 이쁘지? 우리 엄마 닮아서. 세라 아버지, 아니, 그러니까 그... 새아버지랑 친해졌어 '시골에 집 알아봐 달라' '친척 결혼식 대신 가 달라' 심부름 시킬 만큼.”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듣는 거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여자친구가 아니야? 친척 결혼식? 혼란스러운 해영에게 지욱은 본심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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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혼 안 해 나 내 마음 둔 곳에 다시 돌아온 거야.”
그토록 돌아오고 싶던 곳에. 손님이 있는 내 집으로.
“그러니까.. 손님이 좀 참아봐. 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말을 마친 지욱은 술기운에 그대로 해영에게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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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욱아”
“나 안 무거워”
네가 버겁다던 그 말이 그렇게 상처였을까. 지욱은 연신 안 무겁다고 웅얼대며 투정을 부렸다. 맨정신이라면 절대 안 보여줄 모습에 해영은 픽 웃으며 물었다.
“너 취했어?”
“아니 아, 나 안 무겁다니까 내가 뭐가 무거워?”
“어우, 무거워”
해영은 지욱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왔다. 술주정을 하는 지욱을 간신히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해영은 한숨을 쉬었다. 안 무겁기는. 엄청 무겁네. 남자고 키도 큰 게 안 무겁겠어? 해영은 지욱의 등을 한번 찰싹 때렸고 지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부비작대며 웅얼댔다.
“따뜻하다.”
해영은 픽 웃으며 침대에 널부러진 지욱의 옆에 앉았다. 지욱이 자신의 방에, 자신의 침대 위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소리내서 떼 한번 부리지 못하고 반지를 빼앗길 때와는 다르게, 무거워도 좀 참으라며 투정을 부렸다는 사실 또한, 기뻤다. 해영은 지욱이 준 스노우볼을 흔들어보고, 잠든 지욱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지욱은, 해영의 생일날 찾아온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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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팡이들 화면해설은 여기까지..
이제 자연이랑 해영이만 남았네..
똥퀄인데 원덬이 우쭈쭈쭈해주면서 잘 봐준 꿀벌들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