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의 연기에 대해 고주알미주알 읊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요즘은 남발되는 경향이 있지만 '믿고 보는' 연기라는 수식어에 한석규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특히 2010년대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부터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의 김사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에 이르기까지, 한석규가 출연한 드라마의 인물들은 진한 잔상을 남기며 대중의 마음을 홀렸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친자)'의 장태수는 국내 유일한 경찰대 출신 프로파일러로, 프로파일링이란 단어조차 잘 알려지지 않던 시절에 자진해 범죄행동분석관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희대의 연쇄살인마들로부터 줄줄이 자백을 받아내며 사건을 해결하는 유능한 프로파일러지만, 그의 직업적 유능함은 가정의 아빠로는 최악의 것으로 치환된다.
첫 화에서 딸 하빈(채원빈)이 가출팸 소녀들과의 싸움을 벌이면서 지구대에 불려간 장태수는 여느 아빠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딸이 다 큰 고등학생이고 겉으로 보기에 말짱해 보인다지만 쌍방폭행이 있었다는 말에도 걱정어린 제스처를 취하기보단 "무슨 일이야" "(저 말이) 맞아?" 등 건조한 목소리로 사실확인에 우선인 모습이다. 현장에서 나온 휴대폰들을 자신이 훔치지 않았다는 딸의 표정을 집요한 눈초리로 관찰하는 그의 모습에선 믿음보단 의심이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장태수의 의심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남과 다른(반사회적 성향의 면모) 딸의 모습에 불안해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아들 하준이의 죽음에 하빈이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을 오래도록 품어왔다. 그 때문에 결국 아내 윤지수(오연수)와도 이혼하게 되었고, 딸과는 타인만도 못한 서먹한 상태로 지내왔다. 직업적 특성과 딸의 남다른 면모와 의심쩍은 행적을 고려하면 장태수의 의심은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 장태수 자신을 비롯해 시청자 또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아빠 장태수의 의심은 정당한가. 어쩌면 그의 의심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단초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친자'의 장태수는 시종일관 몰아붙이는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한석규는 그간 많은 작품에서 경찰이나 형사 역을 맡아왔지만 '이친자'의 장태수는 프로파일러라는 특성상 냉정한 평정심과 집요한 관찰력, 고도의 심리전에 익숙한 인물이라 그간의 캐릭터와 겹쳐지지 않는다. 게다가 장태수엔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할 딸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아버지란 특징도 부여된다.
한석규는 그간 아버지를 연기한 적이 드물었다. 영화 '우상'에선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은폐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정치 인생을 위해 아들을 자수시키는 도의원이었기에 흔한 부성과는 거리가 있었고, 드라마 '비밀의 문'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반목하는 인물이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으로 나와 아들의 죽음 앞에 절절 끓는 애통함을 보인 적은 있으나 아버지로의 분량은 적은 편이었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도 아들과의 관계보단 아내의 간병을 돕는 남편의 모습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면모가 강한 한석규의 모습이 대중에겐 낯설다는 소리.
장태수는 딸을 의심하는 아버지란 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장태수에게는 딸을 의심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도, 딸을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도 존재한다. 아내가 죽고 나서 함께 살게 된 딸을 위해 서툴게 요리를 하는 모습에서 딸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보이고, 딸이 유혈만 남은 살인사건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때 동요하며 혼비백산하는 모습은 여느 아버지와 같다. 압권은 조사 과정에서 딸의 알리바이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텔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밤새 나오지 않았다는 딸의 증언과 달리 뒷문으로 몰래 나와 어딘가로 달려가는 딸의 모습을 블랙박스에서 확인할 때의 장태수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소리 없는 절규'였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큰 몸짓을 보이지 않아도, 그저 약간의 안면과 목울대의 떨림, 동공의 흔들림만으로도 오만 가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석규의 깊은 연기 내공이 아니면 쉽지 않았을 절제되고도 뜨거운 연기였다.
아내 지수의 녹음을 듣고 무너지는 5화의 장태수나 6화에서 딸에게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말한 뒤의 장태수는 또 어떻고. 그간 절제된 모습으로 좌절, 절망, 분노 등을 표현해왔지만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접하고, 또 그 진실을 딸에게 숨겨야 하는 과정에서 증폭되는 감정을 억누르듯 토해내는 한석규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여기에 공들인 세심한 연출이 한석규의 연기와 맞물리며 시너지를 일으킨다. '이친자'에서 장태수는 정면 이상으로 뒷모습과 위에서 내려다보듯 찍는 부감 숏이 많은데, 이때 비추는 한석규의 뒷모습과 늘어지고 겹쳐지는 그림자에 무수히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느낌이다. 드라마가 인물의 심리와 내면의 감정에 집중한 만큼 빠른 전개나 꽉 채운 대사보다 여백이 많은데, 그 여백을 한석규의 내밀한 연기와 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 묵직하게 채운다. 한석규는 뒷모습은 물론 그림자마저 연기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딸에 대한 의심에서 자신을 믿지 못했던 아내와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미안함, 딸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 갖가지 감정의 파고를 묵직하게 전달해온 한석규의 연기를 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친자'는 오늘(11월 7일) 8화를 방영하고 나면 2회분이 남는다. 벌써부터 아쉬움이 들지만, 꼭꼭 곱씹듯 남은 분량에 집중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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