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10년이 조금 안된, 눈이 소복히 쌓인 날에 돌아가셨다. 엄마의 빈소에는 우리 집에 잠시 머물었다고 생각했던 오빠, 언니들이 와주었다. 그들은 발인까지 내 옆을 지켜주고, 화장터로 떠나는 차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사람은 죽고 나서 생전에 쌓은 덕을 알 수 있다고 하던데,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았던 엄마는, 높고 큰 덕을 쌓았던 듯했다.
지욱이 역시 내 옆에 있었다. 상주를 정할 때 잠시 망설였지만, 지욱이를 사위로 올리고 싶진 않았다. 엄마 곁에 아무도 없었을 때, 엄마가 가장 약해졌을 때 엄마 옆을 지키던, 사실상 나보다 더 가까웠던 "엄마의 아들"에게 백년 손님인 사위의 이름은 너무 박했다.
"고마워 지욱아. 엄마 옆에 있어 줘서."
내 감사인사에 그 아이도 웃으며,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그러나 뒤이은 지욱이의 말에,
"이제, 손님 속이는 일은 없을 거에요. 약속할 게요."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엄마의 자리는 아빠의 옆 이자, 친구인 지욱이 할머니의 맞은편으로 정해졌다. 희성이의 말처럼, 엄마는 사후 대책 한 번 확실하게 한 듯했다. 나는 우리 엄마랑 절대 친구 못 할 거라고,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했는데, 희성이는 그런 나를 보며 그건 엄마 말도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인, 또래로 만났으면 친구도 사랑도 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라 엄마랑 딸로 만났나 보다며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엄마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나니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없이 걷던 중, 갑자기 지욱이가 살며시 손을 잡아왔다. 나는 물끄러미 지욱이를 바라보았다. 지욱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하고 약속해서요. 손님 손 꼭 잡아주겠다고."
불현듯, 그 아이의 약속과 관련된 일들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유언때문에, 엄마를 보러 캐나다에 가지 못했던 것도. 위탁아였던 사실을 들키지 않겠다는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내가 좋아졌을 때 숨었던 것도.
지욱이 너는 알까. 그때의 네 표정이 참으로 쓸쓸하고, 괴로워보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욱이가 했던 약속들은 그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약속은 자기 딸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 엄마의 약속은 엄마가 곤란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엄마가 한창 필요한 아이에게 엄마 신세 망치지 말고 혼자살라는 것은, 가족이라면 할 수 없는 부탁이었고, 우리집에 머무는 걸 들키지 말라는 것도,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집에 머문 지욱이에게, 할 만한 부탁이나 약속은 아니었다.
자기에게 뻔히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지욱이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짓누르면서까지 지켰다. 아마도, 그건, 그 아이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키워주고 보살펴 준, 사랑을 나누어준 사람을 향한, 지욱이만의 사랑의 방식.
지금 지욱이가 나에게 하려는 약속도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맞춘 불공정 계약. 이런 걸 내가 용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런 거,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지욱이가 돌아보았다.
"지욱아. 이제 아무 약속 안 지켜도 돼."
뜬금없는 말에 지욱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자유야. 이제는 지켜야 할 사람, 지켜야 할 약속 없이 너만 지켜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평생 엄마, 할머니, 우리 엄마를 위해서 살았잖아. 캐나다에 있는 엄마 보고 싶은 것도 참고, 내가 좋은 것도 참으면서. 그리고 이제는 나겠지. 나를 지키고, 나하고의 약속을 지키느라, 너는 또 어떤 감정들을 참아낼까?"
그제야 지욱이는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채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누구나 사랑하면 다.."
아니야 지욱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그래. 보통은, 자신이 좀 더 유리한 쪽에 서려고 하지.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상대방에게 모든 걸 다 밀어주려고 하진 않아.
"미안한데,”
이대로 우리가 함께한다면, 넌 분명 날 위해 살고, 내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할 거야. 난 그게 싫어 지욱아.
“나는 너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까지 되고 싶진 않아."
절대 울지 않던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간 그 어떤 말에도 덤덤하던 얼굴이 모진 내 말에,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사랑받고 싶던 사람의 말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는.. 너무 버거워, 지욱아."
나는 네가 모든 걸 바쳐서 숭배해야 하는 신이 아니야. 지욱아. 계산적이고 손해보기 싫어하는, 그런 너무 보통의 인간인 내게, 모든 좋은 것만 다 내게 주려는 그런 깊고 큰 니 마음은,
"너무 무거워. 그러니까."
여기 까지만 하자. 우리.
억지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빼려 들자, 지욱이가 다급하게 손을 맞잡아왔다. 절대 조르거나, 떼쓰지 않던 지욱이가 한 최초의 반항. 절박한 그 얼굴을 마주하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지금이 아니면 영영 지욱이를 보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애써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결국, 잔인하게, 나는 그 아이가 들어줄 수밖에 없는 부탁을 했다.
"지욱아,"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나를 지켜줘."
눈물로 엉망이 된 지욱이를 마주하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손해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하는, 손해영으로 남을 수 있게, 제발 도와줘.
마침내 지욱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 애의 손에서 반지를 빼고, 울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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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욱이 시점도 나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