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지욱에게도 첫날밤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감과 설레임이 있었다.
그 설레임은 분명, 최소한, 지금처럼 눈 앞에 쌓여가는 돈다발이 주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아아암"
그것도 새벽 댓바람부터 꾸밈노동에 지친 해영이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하는데, 설레임이라니, 택도 없는 단어일 것이다.
지욱은 잔뜩 피곤해보이는 해영을 힐끔 보고,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쉴 것을 권유했다.
"피곤하면 먼저 자요. 나머지는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널 어떻게 믿고 내돈을 맡겨."
허. 선의로 건낸 제안이 악의가 가득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내가.. 믿음이 안가? 어처구니가 없어진 지욱이 뾰족한 말투로 물었다.
"못 믿을 남자 팔짱을 끼고 결혼은 어떻게 했어?"
"몰랐지. 결혼은 믿음이라는 걸. 다음에는 신뢰하는 남자랑 할께?"
고개를 쳐박고 축의금 명단을 작성하며 얄미운 소리를 하는 해영의 모습에 지욱은 기가 막혔다. 지금 뭐라는 거야.
"아니 잠깐만. 내가 뭐, 어디가 어때서? 우리 편의점 금고 비번도 나만 알거든?"
지금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거야? 잔뜩 억울해진 지욱의 해명을 듣던 해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 해영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좀 수상해. 뭔가 숨기는 사람처럼."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지욱이, 이어지는 해영의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내가 뭘 숨겨요."
"조금만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말 돌리거나 입 다물잖아. 예를 들면... '캐나다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할머니는 어떤 분 인지'. 나는 니 이름, 얼굴, 나이 빼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해영의 말이 계속될수록, 지욱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고, 해영의 마음도 조금 불편해졌다. 그저 해영이 지욱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알려주려는 의도였을 뿐이었고, 다른 뜻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해영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말하라고 강요하는 거 아니야. 다만 믿음의 벨트는, 서로에 대한 정보의 균형이 맞아야 생긴다는 거지."
'할머니가 미모때문에 고민하셨어?'
'아뇨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가 아니면 누구?'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는 사람이 캐나다에 있는데, 오라고 해요. 아무리 거절을 해도. 계속.'
'결혼한 사람이구나? 좋아했어? 캐나다에 있는 사람.'
'기억 안나요. 너무 옛날이라'
그래. 그럴수도 있겠다. 지욱의 머릿속에 피팅 후 커피숍에서, 그리고 프로포즈 후 해영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지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릴때, 아주아주 어릴 때, 결혼해서 캐나다에 간 할머니 딸이에요. 미모 때문에 팔자가 사나워진."
"할머니 딸이면.. 고모?.. 이모?... 혹시 엄마?"
엄마라는 단어가 나온 뒤에서야 비로소 지욱이 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한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 쓸쓸한 얼굴을 하고.
"근데 왜?"
"할머니, 유언이었어요. 그집에선 내가 있는 걸 모르는데, 내가 가면.. 곤란해진다고. 키워준 할머니 위해서라도, 그냥 혼자살라고. 보통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던데, 할머니한테는 엄마만 아픈 손가락이었나봐. 나는 그냥.. 한 치 건너 두 치인 손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무슨 사연이 있겠다는 짐작은 했지만, 이건 좀 세네. 괜히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셈이 되어버렸네. 해영은 착찹한 마음으로 지욱을 바라보았다. 자기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쓸쓸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담담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지욱이 안쓰럽기도 했다. 분명 울 것 같은 눈인데도 이미 오래전에 눈물샘은 말라버린 듯, 메마른 얼굴로 쑥쓰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결국 해영은 충동적으로 지욱의 얼굴에 입바람을 불었다.
"뭐..뭐해요?"
"아니.. 울어야 할 것 같은데 안 울어서."
"아, 뭘 울어요. 내가 애에요?"
"영원히 애지, 엄마 얘기 할때는."
뜻밖의 말에 놀란 지욱이 해영을 바라보았다. 해영은 엄마를, 할머니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지욱을 가엾다 하지도 않았다.
"말해줘서 고마워. 하기 힘든 얘기였을 텐데."
그저 해영은 지욱이 아픈 이야기를 해준 것에 대해 담백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머리가 하얗게 된 지욱이 더듬거리며 해명했다.
"그러니까 난 그냥, 이거 그.. 돈 안 훔친다고요. 돈"
그 삐걱거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해영은 살풋 웃었다.
늦은 밤, 마침내 해영이 잠들었다. 침대 맞은 편 책상에서 편지를 쓰던 지욱은 해영이 뒤척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축의금 명단을 작성하던 태블릿을 품에 안고 침대 위에 널린 축의금 봉투와 함께 잠든 해영을 보며 지욱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해영이 깨지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레 침대 위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해영의 가슴께로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반지 낀 해영의 손 옆에 가만히 자신의 손을 댔다. 둘의 손에 끼워진 한 쌍의 반지가 예쁘게 반짝거렸다.
원칙대로라면, 이 반지를 나눠 낀 두 사람이 서로의 것이 되는 것이겠지.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평생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만들 날이 올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욱은 이렇게 해영과 손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지욱은 시선을 돌려 해영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든 해영의 모습이 예뻐보여서 지욱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손님, 늘 행복해야 돼.
지욱의 시선이 다시 해영과 자신의 손에 머물렀다. 가짜이고, 임시이긴 하지만, 둘의 첫날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