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재금(김정영)의 삶은 ‘우리 이경이’로 충만하다. 딸 서현(하영)을 독립시킨 후 혼자 사는 재금의 집엔 온통 트로트 가수 이이경(이이경)의 굿즈로 빽빽하고, 서현의 상견례 자리에서도 예비 사돈에게 이이경을 전도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 엄마가 창피한 서현은 상견례가 끝난 후 아빠 없이 단둘이 살았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재금에게 느꼈던 원망을 쏟아붓는다. 어느 날 이이경 팬클럽의 회장 미숙(배해선)이 서현을 찾아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팬클럽 총무인 재금이 공금 5천만원을 횡령했고, 재금이 연락두절됐다는 것. 서현은 사회부 기자다운 취재력으로 엄마가 있을 법한 장소를 한곳씩 찾아 나서며 몰랐던 엄마의 세월을 들여다본다.
<덕후의 딸>은 가장 가깝고도 먼 모녀 사이를 딸의 시점에서 이해해가는 이야기다. 일견 익숙한 구성의 단막극이지만 <덕후의 딸>은 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에 추리 플롯을 씌워 흥미를 더하고, 유쾌하고 활기찬 작품의 톤 앤드 매너를 작중 여러 사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올곧게 유지하며 자신만의 독자성을 발휘한다.
- 장년층 사이에서 트로트 신드롬이 꾸준히 지속 중이다. 트로트 팬덤과 모녀 드라마 중 무엇이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나.
= 김민영_모녀 서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평생 엄마를 이해하려 했지만, 오해만 쌓은 채 성인이 된 딸이 이제야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을 이야기의 가장 큰 기조로 두었다. 작품을 쓰며 젊게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이상의 한국 여성들이 살아온 삶을 생각해봤다.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고, 삶에 치여 생계에 전념하다 소진했던 열정이 트로트 가수에 의해 살아나는 분들이 많지 않나. 이런 방식의 덕질은 건강한 열정 발산이다.
- 극 중 이이경의 팬덤 컬러가 노랑이어서 그런지 엄마의 이불, 한복 등을 포함한 작품 전반의 톤이 노란색에 맞춰져 있다.
= 김나경_엄마가 이이경에게 빠진 이유가 노래 <해뜰날>이라 가사를 기준으로 컨셉을 일원화했다. 우리 작품은 러닝타임이 60분인 단막극이라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작품을 떠올렸을 때 명확히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고단한 삶 끝에 이이경 덕질을 통해 인생의 2막을 맞이하는 재금의 삶을 무채색 인생에 원색이 들어오는 느낌으로 표현하면 좋겠다 싶었다. 이 발상에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라는 <해뜰날>의 가사가 명료하게 얹혔고 햇빛의 속성에 맞춰 컬러를 정했다. 장소 헌팅을 할 때도 어린이 보호구역 등 가급적 노란 포인트가 있는 곳을 주로 찾아냈다. 광기의 노랑이다. (웃음)
- 재금과 서현 역의 두 배우는 어떻게 떠올려 캐스팅했나.
= 김나경_김정영 배우가 그간 분한 어머니 역이 어둡고 무거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밝은 역할을 향한 갈증이 있을 것 같았다. 김정영 배우와 미팅 당시 시청자들에게 평소 이미지와 정반대의 무언가를 보여주자고 말했고 김정영 배우도 흔쾌히 응했다. 하영 배우는 처음 만난 순간 바로 이목이 쏠렸다. 60분간 시청자가 딸을 쫓아가야 하는 이야기라 기꺼이 캐릭터를 따르고 싶은 이미지의 배우가 필요했는데, 하영 배우는 절로 집중하게 만드는 마스크의 소유자라 제격이었다.
- 사회부 기자인 딸과 경찰인 예비 사위가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함께 취재, 수사를 벌이는 이야기가 작품 중반에 등장한다. 기자와 경찰이 공조하는 이야기가 언론 스릴러가 아닌 휴먼 코미디 장르에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 김민영_딸의 직업은 처음부터 사회부 기자로 정해두었다. 재금을 찾기 위해 취재를 다녀야 하고, 냉철하고 정확한 시야로 세상을 직시할 수 있어야 했다. 작품에 드러나진 않지만, 서현이 출입하는 경찰서의 서장이 자신의 경찰 아들을 서현에게 소개해줬다는 비하인드도 써두었다. 또 대대로 경찰을 배출한 엘리트 집안이 예비 시댁이어야만 서현이 사기 혐의가 있는 엄마를 추적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 작품 속 재금은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엄마다. 대개 한번은 신산한 지난 삶에 대해 화를 내는 등 감정을 분출하는 순간이 있을 법한데, 재금은 서현이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줄곧 담담한 반응을 보이거나 웃음으로 무마한다. 동요(動搖)가 무의미하다는 걸 진작 깨우친 사람 같기도 하다.
= 김민영_재금은 속에 문드러지는 사연이 있대도 현재를 긍정하며 햇살 같은 오지랖을 부린다. 딸이 왜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는지 알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한 엄마다. 그래서 재금은 딸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인생을 즐겁게 살길 택한다.
= 김나경_재금이 비호감으로 비치는 연출을 가장 우려했다. 재금이 보이는 여러 행동은 결국 딸을 사랑하는 재금만의 방식이다. 살면서 부모에게 서운한 순간이 와도 막상 진위를 살피면 그들의 헤아림이 나의 감정보다 더 크고 깊다는 것을 깨닫지 않나. 서현도 그 너른 마음을 깨닫기를 바랐다.
- 작업 시 나의 필수템
= 김민영_메모장과 볼펜. 무얼 계속 낙서하듯 써야 머리가 돌아간다.
= 김나경_연남동 소품 숍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노랑 곱창머리끈. 다만 이걸로 머리를 묶진 않았고 <덕후의 딸> 촬영 내내 손목에 끼워두었다. 후반작업을 마칠 때까지 이 머리끈을 보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
- 나를 자극한 다른 작품
= 김민영_<미스터 션샤인>(2018)의 모든 순간. 애신(김태리)이 이완익에게 “하루에 하루를 보태는 것이다”라고 일갈할 때. 애신이 위험에 처한 게이샤를 구한 후 “언젠가 저 여인이 내가 될 수도 있다”라고 읊조릴 때가 특히 생생하다. 작가가 뿌린 떡밥을 모두 회수할 때 오는 쾌감도 남다른 작품이다.
= 김나경_프로듀서이자 후반 조연출로 참여한 <나빌레라>(2021). 덕출(박인환)이 호범(김권)에게 “살아보니까 완벽하게 준비되는 순간은 안 오더라고. 그냥 지금 시작하면서 채워”라며 조언을 건넨다. 좌절한 청년에게 건네는 대사가 당시 자기 의심에 사로잡힌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큰 동기부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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