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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 '리볼버'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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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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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의 종결부에서 오승욱 감독은 스스로 “1990년대 중반 연출부 일을 할 때 최대의 관심사”였다고 밝힌 충무로의 선대 감독 김기영의 한 장면에 접근한다. 하수영(전도연)이 한손에 돈가방을 들고 결말의 무대인 화종사를 내려갈 때, 그녀 옆에선 그레이스(전혜진)가 앤디(지창욱)의 휠체어를 힘겹게 밀고 있다. 하수영이 휠체어에 탄 앤디를 산 위에 올려둔 것처럼 그레이스도 방향을 뒤집어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절 앞마당에 깔린 파쇄석 때문에 잘 밀리지 않는다. 휠체어 바퀴가 자꾸만 헛돌고 그레이스의 하이힐은 돌밭 사이에 박혀버린다. 그 와중에 그레이스와 앤디가 실은 모자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범죄영화의 클라이맥스라기엔 좀 황당한 광경이다. 돈을 건네받은 쪽의 정서는 생각보다 건조하고, 돈을 넘겨준 쪽은 엉뚱한 곳에 힘을 쏟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여자는 지금 손에 인생의 무거운 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리볼버>에 깃든 김기영의 흔적은 <고려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승욱은 늙은 어머니를 둘러업고 산에 오르는 김기영의 <고려장>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어머니를 버리기 위해 산 위로 향하는 장성한 아들의 모습은, 몸만 자란 유아기적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산을 찾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뒤바뀐다(그러고 보면 두 영화는 무속인의 말을 따라 산 위로 오른다는 접점도 공유한다). 오승욱은 이 모습이 한국영화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족의 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 같다. 가뭄에 시달리는 마을에 사는 가난한 가족의 비극(<고려장>)이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는 막대한 권력자들의 희극(<리볼버>)으로 바뀌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가족은 지긋지긋한 것이다.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떼어낼 수 없이 질척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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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모자 관계의 지긋지긋하고 질척거리는 정념은 이 영화 속 결말의 가장 강렬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상한 지점은 그 정념의 주인공들이 정작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볼버>의 주인공은 하수영이다. 그녀는 미련 없이 그레이스와 앤디를 두고 떠난다. 오승욱은 범죄영화가 요구하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거나 장르 특유의 짜릿한 마무리를 세공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가족의 우스운 광경을 전시한다. 하수영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고 떠나갈 뿐이다. 이렇게 허무하고 힘 빠지는 장르영화의 결말이 또 있을까? 하수영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일까?


오승욱은 적지 않은 인터뷰에서 하수영을 ‘투명인간’에 빗댄 바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죗값을 치르고 교도소를 나왔을 때 수영은 투명인간과 다름없었다. (…) 말하자면 <리볼버>는 투명인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신의 승리를 향해 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리볼버>의 결말은 투명인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전형적인 대단원과는 거리가 멀다. 하수영은 거주지 없이 범죄로 얼룩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 원하던 돈을 얻고 나온다. 그런데 그녀가 통과한 세계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별로 바뀐 것은 없어 보인다. 하수영은 처음과 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투명한 인간이다. 결말에 관해 연출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전도연 배우 역시 인터뷰에서 비슷한 감상을 남겼다.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는 했는데. 뭔가를 받으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달라진 게 없지 않나? 허탈할 것 같다. 받은 것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이걸로 다른 삶을 살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쓸쓸함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여기엔 한 가지 누락된 것도 있다. 하수영은 약속된 돈을 받는다. 그런데 그녀가 입주하려던 아파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영화는 왜 서울로 돌아와 아파트에 입성하는 하수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2년 전 과거에서 하수영이 적극적으로 욕망하던 것은 돈이 아니라 아파트였다. 출소한 하수영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은 비어 있는 아파트 내부의 신호들 덕분이었다. <리볼버>는 하수영이 마침내 얻어낸 7억원이 핵심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한 가지 다른 핵심을 은폐한다. 이 영화는 아파트를 돌려받으려는 자의 이야기였고, 그녀가 결국 아파트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파트는 한국영화의 모더니티를 형성한 기반이면서 오승욱이 그리는 비극의 전제이기도 했다. <초록물고기>(오승욱은 이 영화의 각본과 조연출로 참여했다)의 결말에서 아파트 공사 현장에 파묻힌 막동이의 시체, <무뢰한>의 도입부에서 아파트 건설 현장 아래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떠올려보자. 오승욱의 영화는 아파트라는 안정된 거주 공간과 그 밑바닥에서 우글거리는 범죄적 세계로 분할된다. 그러므로 오승욱의 인물들은 아파트를 욕망하는 자들이고, 그 공간에 새겨진 평범한 가정의 이미지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리볼버>는 전문가들이 나오는 세련된 범죄영화가 아니다. <리볼버>에 나오는 인간들은,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찌끄레기나 받아먹는 좆밥’이고 시원찮은 ‘아마추어’이며 ‘병신’들이다. 하수영은 이 무대를 통과하면서 범죄의 세계가 담보하는 유혹이 닿을 수 없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무엇을 통해? 그녀가 바라보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하수영은 전남편 때문에 형사와 조폭 사이를 맴돌며 시키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정 마담(임지연)을 지켜본다. 사고 치는 아들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한탄하는 그레이스를 지켜본다. 돈 때문에 죽어버린 황정미의 행적을 지켜본다. 이런 세계에서 추락한다면 정 마담이고 상승한다면 그레이스다. 아파트 단지에 입성한 그녀가 꿈꾸었을 아늑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죽은 임석용(이정재)이 약속한 아파트에는 세명의 여성(하수영, 정윤선, 황정미)이 겹쳐 있다. 거기엔 실현되지 못할 욕망이 너무 많다.


우스꽝스럽게 휠체어를 미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하수영이 직시하는 것은 이런 믿음의 파괴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하지만 반복건대 그녀는 아파트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선다 해도 그녀가 꿈꾸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와 <무뢰한>에서 오승욱은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남자들의 최후를 강렬한 비애감과 비장미로 묘사해왔다. <리볼버>는 같은 성격의 결말이지만, 정반대의 의미로 향한다. 거주지가 없는 하수영은 자신이 꿈꾸던 미래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비장한 최후가 아니라 차라리 오승욱이 구축한 남성적 세계를 향한 작별이다. 아파트와 밑바닥으로 분할된 범죄 세계의 약속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자의 탈선이다. <리볼버>의 결말에서 하수영은 오승욱의 세계에서 그런 헛된 믿음을 간직하고 죽어간 남자들을 향해 소금을 뿌린다. 아직 새로운 길을 확신할 순 없지만, <리볼버>는 비로소 오승욱의 두 번째 챕터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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