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의 비]
“아, 웃겨서 눈물나네.”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눈물을 닦는데,
머리 위를 가려주고 있던 우산이 사라졌다.
옆에 앉은 최씅이 우산을 접어버린다.
쏟아지는 비가 나와 최씅의 몸을 때리고, 나는 의아해서 최씅을 보았다.
“뭐해? 비 맞잖아.”
“야, 너 하나만 해.”
“뭘?”
“억지로 웃지 말고, 그냥 하나만 하라고.”
안다.
최씅은 안다.
내 진짜 표정을. 진짜, 마음을.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이 비가 필요했는지를.
그 애의 눈이, 조용히 내게 말한다.
이제,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웃지 말라고.
이제는 속 시원하게 그냥.
울라고.
그애의 옆에서.
웃음과 함께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조금씩 실룩이다,
새어나온 한숨과 함께,
결국은 마음이 터져나오고 만다.
최씅,
사실, 사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비죽이며, 콧물을 흘리며,
사회척 체면이고, 책임감이고 아무 것도 없이 다 놓은 채
이 가슴 안을 꽉 채운 힘듦을, 슬픔을,
다 쏟아내고 싶었어.
그런데 엄마 아빠 앞에선 울 수가 없잖아.
내가 울면 엄마 아빠가 더 슬퍼할 거니까.
그런데 웃기게도 혼자 있을 때조차,
나는 제대로 울 수가 없었어.
혼자서 울면, 더 외로워졌으니까.
슬픔과 외로움에 짓눌려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 같아서.
내 웃는 가면 따위는 가볍게 씻어내려주고,
내가 슬픔을 쏟아낼 때 주변을 타닥이며
내 슬픔을 녹여줄 비가,
너라는 비가 내 옆에 있어서
외롭지 않게 슬플 수 있어서
좀 살 거 같아.
그래서 나는 돌아와야 했었나봐. 이 곳으로.
[미숙의 비]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2층으로 올라온다.
생각해보면
딸이 미국에서 들고 온 건, 이게 끝이었다.
고작 캐리어 하나.
그 아이는 그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내 상상 속의 아이는 늘 화려한 삶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삶이, 고작, 이 캐리어 하나에 담겨 왔다면.
내 딸은 미국에서, 그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던 것일까.
캐리어를 옮겨다놓고, 좁은 바닥에 꾸역꾸역 이불을 피는데,
호주머니에서 브로치가 툭, 떨어진다.
옛날에 석류가 사준 브로치.
이걸 살려고 불판을 수십 개를 닦았다고,
승효가 뒤늦게 귀띔을 해줬더랬다.
미국에서도 그 애는 좋다는 비싼 화장품을 때마다 보내주고,
그 애는 그런 애였다.
늘 어미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하던 아이.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었던 아이.
그런데 나는…
“….미친년. 천하에 못난 년.”
내 새끼가 울었다. 속이 시커멓게 곪아서 그렇게, 울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저 내 얄량한 자존심이 급해서
내 새끼한테 생채기를 냈다.
이불에 떨어진 금색 브로치를 다시 들어서
떨리는 손으로 딸아이가 내게 준 사랑을 가슴에 다시 꽂는다.
“어우…어어어…”
결국은 울음이 터진다.
어리석고, 못난 어미가
스스로가 미워서,
내 새끼에게 미안해서
한없이 비와 함께 울음이 내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