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애쓴다.
경전 같았던 부모의 말들은 모두 시시해지고
부모 영향보다는 또래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 혼란의 파도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 선생님, 친구 등의
여러 가치관을 의심하고 믿고 섞고 새로이 세우면서
부모를 넘어서고 건강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며 어른이 된다.
사춘기란 윗세대에게 반항하는 시기가 아니라
윗세대를 넘어서는 과정을 거치는 시기다.
가치관과 호르몬과 감정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어른이 된다.
지환은 아버지 없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고 다만 외로운 현우로 살다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엄마를 잃고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에게 키워진 사람이다.
지환에게 아버지란 "네 애비는 나다, 중요한건 네가 나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때려 눕혀라"
라는 말로 아들이 아닌 제 후계자를 기르는 조직의 보스일 뿐이다.
어른이 된 지환에게 남은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끝없는 다짐과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감.
은하 역시 비슷하다. 빚쟁이 조폭들에게 시달린 어린 시절,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한 부모,
부모 이혼 후 열두살 이후로 뿔뿔이 흩어져 혼자 삶을 지탱해야 했을 것이다.
어른 은하에게 남은것은 어릴 적 자신이 기댔던 현우오빠의 추억과
그 추억의 연장선인 '아이들과 놀기'.
지환의 유난스럽고 호들갑스러운 연애 초반은
그래서 나에겐 딱 초등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천방지축 좌충우돌 연애 모습이었다.
가스라이팅과 후회와 죄책감만으로 지내온 세월 속에 겪지 못했던 사춘기의 뒤늦은 습격.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고 어쩔 줄 모르면서 뚝딱거리는 모습.
뜬금없는 타이밍에 터져나오는 '내가 많이 좋아합니다' 고백.
중2병인가 싶은 '애기야 가자!'라던 허세
'다른 남자랑 있는거 싫습니다 나만 봐요' 라던 수줍은 키스.
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한번씩은 거쳐왔을 사춘기 시절의 연애가
지환에겐 모두 한번에 몰려 온 것으로 보였다.
그에 비해 그나마 은하가 지환과 달리 연애에 있어 단단하고 솔직했던 것은
18년지기 미호 가정의 보살핌 덕이 아니었을까
외롭기가 지환 못지 않았겠지만
그 와중에도 강단있고 자존감 있고 밝게 자란 은하의 뒤에는
직접 낳은 외동딸만큼이나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고 잘 보살펴줬을 미호 부모님이 있었을거다.
지환과 은하는 늘 마음이 허기졌겠지
그래서 생애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기댔던 현우오빠와 꼬맹이 은하를 잊지 못했을게지.
구멍 난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동전으론 놀면 된다고 가르쳐줬던 현우오빠.
오빠가 어디 있어도 찾을 수 있을거라고 환히 웃던 꼬맹이 은하.
오랜 세월 잊을수 없도록 헤어짐 마저도 비극적이었던 아이들.
은하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며 제설함에 숨겼던 어린 현우.
알보고니 자신때문에 인사도 못하고 끌려가야했던 현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은하.
서른여섯 서지환과 서른 은하는
겉모습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잠시나마 좋았던 시절을 느닷없이 뺏겨버린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지환은 '검사 현우'를 기대했던 은하 앞에서
자신을 알아볼까 두렵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다.
그때의 현우와는 너무 멀리 와버린 지환이라서.
은하가 함께 묻어둔 타임캡슐을 꺼내들고
'현우오빠'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는 말만으로 안도했던 것은
사라지지 않은 여전한 죄책감 한 조각쯤은 내려놓고 싶어서였을거다.
어른이 되어 만나 어느 순간 반하고 마음을 기대고 어린애처럼 놀이터를 뛰면서 같이 놀고 많이 행복하고.
'예쁘네 우리 은하'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고
'말 안하면 내가 평생 모를줄 알았냐'고 울먹이며 현우오빠를 찾아냈지만..
그 시절의 추억만큼이나 트라우마는 남아있다.
아들을 제 소유물인양 구는 서태평 앞에서
이 둘은 23년 전 그때처럼 아슬아슬하다.
아이를 아이답게 키워내지 못한 어른 때문에
헤어질수도 그렇다고 같이 있기도 힘들다.
여전히 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은
지환을 열 여섯 현우로 만들고 회의실에서 울게 만든다.
그때처럼 행복한 시절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느닷없이 끝나는걸까.
그렇게 어린시절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은하를 안전한 곳에 두고
무엇이든 어떻게든 은하를 보호하겠다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열 세살 현우를 가슴에 품은 서른 여섯 지환이 있을 뿐이다.
현우 오빠가 나만 숨겨둔 다음 인사도 없이 영영 사라질까 두려운
서른 살 외양을 가진 일곱살 은하가 있을 뿐이다.
만일 은하가 '안전한 곳에 있고 싶은게 아니라 오빠랑 함께 있고 싶은거다'라고
입밖에 내지 않았더라면
지환은 무모하게 상남주류로 향하지 못했을거다.
만일 지환이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입니다'를
뼈에 새기며 살지 않았다면 서태평 대신 칼을 맞지는 않았을 거다.
은하를 안전하게. 내 삶은 내 의지대로.
지환은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날려 아버지를 보호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지환이 자기 아버지를 넘어섬으로써
그래서 아버지와 다른 사람임을 증명함으로써
드디어 현우의 사춘기는 끝났다.
제 청소년기를 지배했던 아버지, 늘 끌려가야만 했던 두려운 존재,
서른 여섯이 되도록 어찌할 수 없던 존재에게
내가 옳았다 나의 세계가 굳건하다 선언한다.
은하는 드디어 나를 찾으러 온 현우오빠를 맞아
다시는 나를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사라지는 현우 오빠는 없을 것을 확신한다.
이제 늘 곁에 함께 할 지환이 있다.
과장된 코미디 장면과
우스꽝스레 뚝딱거리는 지환의 연애를 보다보면 이들의 사춘기가 가려져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새 어릴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어른으로 성장한 지환과 은하를 보며 눈물이 울컥,
마음이 따스해진다.
세상 이곳저곳에 아직도 사춘기를 제대로 갈무리 못해
마음이 힘들 어린마음의 어른들에게
이 드라마가 선물이 될까.
언젠가 당신들도 사춘기를 갈무리하고 단단한 마음의 어른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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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초반부터 은하가 찾는 현우가 지환이라고 짐작했고
그래서인지 내내 지환에게 이입해서 드라마를 봤어.
그리고 드라마 보는 내내 이 극이야말로 성장 이야기구나 중얼거렸어.
어른 지환과 은하의 이야기 뿐 아니라
전과자는 평생 나쁜 사람이며 바뀌지 않는다고 믿던 검사 현우의 변화과정 (극초반 자베르 경감인줄)
지환의 돌봄을 받은 보육원 출신 일영이 드디어 가족을 이루는 과정
서태평이 소유물이 아닌 한 주체로서 지환을 인정하는 과정
동희와 피해자 가족이 상처를 도닥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그 모든 것이 다.
후기 비스무리한걸 몇 번 끄적이다가 그만두길 반복하다가
(나는 엄청난 양은냄비라 언제 식을지 몰라서)
오늘 유난히 마음이 울렁여서 휘갈려봐.
아직은 지환은하를 보낼 마음이 들지 않네. ㅠㅠ
**더쿠에서 글쓰면서 길어져서 죄송, 매우 미숙한 점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