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사랑에 쪼그려 앉아 울던 여인(<내 이름은 김삼순>)이기 한참 전에 배우 정려원은 동네 떡집의 막내딸(<색소폰과 찹쌀떡>)이었다. 막내딸 자남은 기록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서브 여주와는 전혀 다른 아침드라마의 작은 역할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내려온 걸 그룹 샤크라의 서브 보컬 ‘려원’은 ‘정려원’이란 본명을 되찾은 뒤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인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에피소드가 매번 바뀌는 시트콤에 출연해 별의별 얼굴을 보여줬다. <똑바로 살아라>의 새침데기 정 간호사와 <안녕, 프란체스카>의 유아독존 뱀파이어 엘리자베스는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에서 울고불고하다가도 까르르댔다. 기본기와 개인기를 고루 쌓는 현장을 데뷔 초에 경험한 정려원은 다중인격을 가진 여자(<두 얼굴의 여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히키코모리(<김씨표류기>), 안하무인의 대기업 손녀(<샐러리맨 초한지>)까지 캐릭터성이 강한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하는 주연배우로 성장한다. 또한 정려원은 풍부한 표현력의 소유자다. 기쁠 땐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짝팔짝 뛰어오르고 화날 땐 이마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보디랭귀지의 귀재로서 시선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결국엔 사랑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통증>의 씩씩한 희귀병 환자 동현은 그의 타고난 사랑스러움이 캐릭터를 비집고 나와 어두컴컴한 영화를 밝힌 경우다. 가녀린 체구를 가진 정려원은 자신을 유약한 이미지에 가두려는 업계와 대중에게 청순가련형이 아닌 캐릭터로 반기를 들어왔다. 그에게 <메디컬 탑팀>을 시작으로 ‘법조인 3부작’이라 불리는 <마녀의 법정> <검사내전>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를 선택한 지난 10년은 강단 있는 여성으로 이미지를 확실히 재정립하는 시간이었고 뒤틀린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회피적인 자신에게까지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마이듬과 차명주 검사, 노착희 변호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주었다.
<졸업>의 대치동 스타 강사 서혜진은 명성과 의욕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려원의 법조인 캐릭터들과 궤를 같이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서혜진은 사랑에 깊이 빠진 여자다. 옛 제자 준호(위하준)와의 관계가 사제에서 연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그에겐 알을 깨고 나오는 성장통과 같았다. 혜진이 마구 부서지고 흔들리는 동안 정려원도 그 진동을 함께 느꼈고 성장했다. 종영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졸업>을 운명과 분기점이란 단어로 자주 설명하곤 했다. <졸업>에 대해 더 많이 더 열성적으로 얘기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했다.
- <졸업>은 ‘드라마’를 봤다는 느낌을 제대로 안겨준 작품이었다. 16부작의 호흡으로 차곡차곡 빌드업되는 이야기, 자기 서사를 부여받은 주변 인물들, 시대가 반영된 문학적인 대사,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제거되지 않은 풍경 스케치까지. “드라마는 곧 문학”이라고 말하는 안판석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 우선 슬로 템포의 드라마를 여전히 고집스럽게 만드는 안판석 감독님은 앞으로도 작업을 계속하셔야 한다. 감독님은 내가 당장 이 신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물으면 배우의 자세에 대해 답하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에 적응할수록 뭐랄까, 이게 맞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근본에 대한 디렉션을 받고 이해한 뒤에 슛을 들어가니 대사를 어떻게 치고 어떤 표정을 짓든 내가 서혜진이라는 것에 흔들림이 없었다. 허투루 찍을 분도, 대충 넘어갈 분도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 하나하나가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매우 높여줬다.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은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믿어주셨고 그래서 끝난 뒤에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됐다. 여태껏 연기를 짝사랑한 게 아니라 이미 연기에게 사랑받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연기에 대한 불안을 완전히 해소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졸업>을 자신 있게 내 인생작, 분기점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졸업>이 안판석 감독의 연출작이라 대본도 안 보고 하겠다고 했다고. 원래 팬이었나.
= 작품은 물론이고 감독님에 대한 궁금증과 호감이 늘 있었다. 예전부터 “너는 안판석 감독님 작품을 하면 정말 잘 맞을 것 같아”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정확하게는 3월13일 일기에 작업하고 싶은 감독님과 작가님의 이름을 쭉 한번 써봤다. 물론 그 안엔 안판석 감독님도 있었다. 그러고 두달 뒤인 5월12일, 9월에 시작하는 멜로 대본이 하나 들어왔다는데 그게 <졸업>이었다. 거짓말 같았고, 운명이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랬다. “당장 <졸업> 제작사에 정려원 한다고 전화 좀 넣어줘!”
- 이후에 대본은 어떻게 읽었나. 대본에 대한 확신까지 들었기 때문에 출연을 최종 결정했을 것 같다.
= 내가 생각하는 좋은 대본의 기준이 있다. “이게 말이 돼?”라는 반문 없이 빠져드는 글, ‘나라면 이 캐릭터를 어떻게 살리지’라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배우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글. 박경화 작가님의 대본이 정확하게 그런 글이었고 이런 대본을 내가 받았다는 것에 감격해 당시에 대본 사진까지 찍어뒀다.
- 그런데 현장에 대본을 들고 간 적이 없다고. <졸업>은 대화가 요체인 드라마지 않나.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
= 딱 봐도 대사량이 역대급으로 많을 것 같은 <졸업> 대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의사 하고, 검사 하고, 변호사 해둬서 다행이다. 어렵겠지만 할 수 있겠다.’ (웃음)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연습이었다. 직접 대본을 녹음한 파일을 매일 차 안에서 들었다. 상대방 대사가 나오면 맞춰서 내 대사 해보고. ‘(상섭이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간다)’ 이런 지문까지도 다 녹음해서 달달 외웠더니 현장에 가져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 혜진은 상대와 붙는 신이 워낙 많아 혼자 대본을 보면서 준비하기에 어려운 역할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현장에서 배우들과 리허설을 해보는 게 중요했을 것 같은데.
= <졸업> 현장이 참 재밌고 어려웠던 게 감독님이 한번에 오케이하고 “우리 배우들 정말 천재야!”라고 외치는 걸 정말 좋아하셨다. 그러니 어떡하겠나. 배우들끼리 촬영 전에 줌으로 만나서 합을 맞췄다. (웃음) 그러고 나서 현장에서는 연습 한번 안 한 척하고 그랬다.
- 준호는 물론, 김현탁(김종태)과 최형선(서정연) 원장. 표상섭(김송일)과 남청미(소주연) 선생님, 친구 소영(황은후)까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혜진의 태도와 온도가 다 다르다. 사람의 다면적인 면이 반영된 캐릭터를 배우가 알맞게 살려 혜진이 좀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 잘 닦인 글을 받은 배우만이 받을 수 있을 칭찬이다. 내가 뭘 더 얹을 것 없이 대본에 있는 그대로를 살리려고 했다. 참 신기한 게 박경화 작가님의 글은 읽는 순간 그 글이 내 안에 들어와 흘렸고 그 흐름에 맞춰 입을 떼니 헤진이 되었다. 이 흐른다는 감각을 현장에서도 많이 느꼈다. 내가 손을 워낙 많이 쓰다 보니 보통의 현장에서는 여러 숏을 딸 때마다 손이 묶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안판석 감독님은 한번만 가니까 정말 편했다. 신이 아무리 길어도 그 한번에 집중해서 몸을 맡긴 뒤 그 신을 흘려보내는 과정이 내겐 신비롭고 좋았다.
- 학원 강사 혜진이 되기 위해 했던 첫 단계를 기억하나. 분필과 칠판을 집에 들이는 것이 시작이었을까.
= 그건 물론이었다. 요즘에 깔끔하게 판서한 내용을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핸드폰이 그 내용을 인식해 디지털화되고, 그게 필기본을 대신한다고 하더라. 세어보니 사진 찍기 딱 좋은 판서 분량이 11줄이라 그 분량에 맞춰 연습했다. 선생님들의 강의 톤, 애드리브를 던질 때의 일상 톤을 캐치하기 위해 인터넷 강의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들 각각의 개성을 한데 모으는 일이 어려웠고 단일한 상이 잡히질 않았다. 이럴 바에야 자문 주신 선생님 한분을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 그분의 강의 녹화본을 계속 돌려보고 실제로도 선생님에게 많이 물어봤다.
- 혜진을 볼 때마다 나의 옛 선생님이 떠오른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상담하고 달래온 사람 특유의 말투와 화법을 혜진이 구사할 때마다 소름 돋는 면이 있었다.
= 그랬다면 안심이다. 사실 나는 학교든 학원이든 한국 입시제도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서혜진 강사는 상상의 영역이었다.
-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호주에서 생활했지 않나. 대학입시라는, 전 국민 공통의 감각의 부재가 배우에겐 큰 불안 요소로 작용했겠다.
= 그게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언급한 대로 모두가 알고 있는 걸 나만 모르는 상황인데, 거기다 전문가가 돼야 한다니. 심지어 영어도 아니고 국어 강사를! (웃음) 초반에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어 겁이 밀려왔다. 그런데 결국 운명으로 돌아가더라. <졸업>이 내게 정말 운명처럼 온 거라면 나는 이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의 파도가 곧 밀려와 불안을 덮어버렸다. 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
- 앞선 얘기로 돌아가자면 혜진의 선생 말투와 화법이 연인인 준호를 대할 때도 그대로라는 점이 재밌었다. 혜진은 늘 준호에게 잘 따르라는 듯이 말한다. 준호를 “얘!”라고 소리치는 대사에선 웃음이 터졌다. 의도적으로 살린 것인가.
= 염두에 두긴 했다. 준호와의 대화 신을 찍을 땐 13살 차이가 나는 친동생과 나의 관계를 많이 떠올렸다. 동생도 이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데도 나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면 자꾸만 이 친구를 인생 선배로서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웃음) 혜진이 준호 앞에서 자꾸 ‘꼰대’가 되는 건 그가 지금 가려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준호가 무턱대고 덤볐다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그런 거다. 나이스하게 말하면 준호가 저돌적으로 나올 걸 또 잘 아니까 “애!”라는 말로 문 앞을 딱 막아선 거고. 아, 이 대사는 대본에 있던 대사다.
- 혜진은 준호뿐만 아니라 상섭의 학원행도 극구 말린다. 혜진은 학원강사라는 자기 직업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를 느끼다가도 직업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직업에 대한 혜진의 생각은 무엇이라고 봤나.
= 혜진이 좋아하는 건 유능하게 일하는 자신이고 불만족스러운 건 가르치는 내용이다. 학생들에게 달달 외우라고 하는 그 내용을 모른 척한 채 돈 잘 벌고 주변에서 너도나도 모셔가려는 스타 강사 서혜진만 보고 싶은 거다. 그동안의 혜진은 그게 가능했는데 준호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강남에 빌딩을 사고 싶으면서도 예전 자기가 그랬듯 본질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준호는 혜진이 그토록 싫어하는 양가적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준호가 양쪽으로 찔러대니 혜진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 혜진이 학원을 그만두고 중단했던 법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결말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 학원을 그만두는 것이 혜진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준호는 학원강사로서 잘할 것이다. 혜진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혜진 밑에 있는 한 준호는 평생 2인자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고 홀로 서는 법도 구축할 수 없다. 준호를 오롯이 성장할 수 있게 두는 것이 서혜진의 졸업이었다. 혜진이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내린 결정이기도 한 만큼 이견이 없었다. 혜진이 학원강사로서 완벽했기에 방점이 ‘학원을 떠났다’에 찍히는데 사실 혜진은 본업으로 돌아간 거다.
- “국어는 준비가 완벽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불안하”단 얘길 시우가 한다. 시우 같은 불안을 배우들도 느끼지 않나. 대본 해석이 충분했는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작품을 들어갈 때마다 고민할 것 같다.
= 감사하게도 내가 행간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편이라 그런 불안은 잘 느끼지 않는다. 내 MBTI의 추천 직업에 작가가 있는데 아마 타고난 모양이다. 그래서 <졸업> 대본을 읽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대사와 대사 사이의 숨은 의미, 글에 깊게 스며든 뉘앙스를 찾아내고 이해하는 과정이 내겐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 <내 이름은 김삼순>은 단편을 제외하면 6번째 출연작이지만 정려원 배우의 데뷔작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주목받으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작은 역할부터 차근차근히 올라왔다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 전혀 없다. 물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지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가치를 스스로 충분히 인지한 뒤부터는 누군가를 그렇게 집요하게 설득하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이젠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게 중요할 뿐이다.
- 패셔니스타란 수식이 배우 정려원을 크게 잡아먹던 시기도 있었다. 예전에 했던 작품 종영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연기가 아닌 몸매 관리, 옷 잘 입는 법에 관한 질문이 주였더라.
= 질문 받을 때마다 속상했지만 그것 역시 관심이니 그런 질문은 말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패셔니스타란 타이틀이 대문짝만하게 붙는 시기가 오래가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그래서 빨리 떨쳐버리자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붙여주시는 동안 잘 들고 있다가 놓아주자고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이젠 패셔니스타 대신 ‘정려원 연기의 재발견’ 타이틀이 계속 붙고 있는데 언제까지 재발견될지는 모르겠으나 잘 붙들고 있어보겠다.
- 배우 정려원을 <김씨표류기>의 여자 김씨로 처음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청순가련형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히키코모리 역할을 맡게 한 이유였을까.
= 그저 시나리오가 너무 재밌었다. 앞뒤 스케줄 다 빼서라도 출연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역할이 워낙 세다 보니 주위에서 다 말렸지만 그때도 지금도 후회 없고 여전히 내 첫 번째 인생작이다. 내친김에 나의 두 번째 인생작은 <검사내전>이다. 전작(<마녀의 법정>)도 검사 드라마였어서 잠시 고민했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할 만큼 글이 좋았다. 세 번째 인생작은… 인터뷰 시작할 때 이미 말했다. (웃음)
- <마녀의 법정> <검사내전>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졸업>까지. 자기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여성들을 맡아왔다. 왜 최근 들어 이런 역할들에 끌린다고 생각하나.
= 내가 워낙 걱정이 많고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렇게 프로페서널하게 말하는 역할이 주로 법조인, 전문직이었다 보니 지금과 같은 필모그래피가 만들어졌다. 마이듬, 차명주, 노착희, 서혜진까지 그 친구들 덕분에 이젠 나도 내 의견을 어느 정도 제대로 정리해서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이 생겼다. 정려원이라는 민나무에 수많은 나이테를 그려준, 그래서 정려원을 풍부하게 만들고 변화하게 해준 나의 역할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정려원이 말하는 <졸업>의 이 대사, 이 장면
혜진이 소영에게 “준호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있다. 전체를 통틀어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하고 그만큼 신경 써서 준비했다. 이 말을 뱉음으로써 준호에 대한 혜진의 긴가민가한 마음이 확실해지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나가듯 처리하지 않고 천천히 뜸을 들이듯 신중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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