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 기자]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 같다.”
“진짜 현직 교사 아냐?”
배우 김송일은 지난 달 30일 종영한 tvN 드라마 ‘졸업’이 발굴한 최고의 ‘원석’으로 꼽힌다. ‘졸업’에서 ‘공교육의 표상’ 표상섭 선생을 연기한 그는 ‘철밥통 교육공무원’에서 정글같은 학원가로 나선 현직 교사의 고뇌를 온몸으로 표현해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최선국어 부원장으로 옮긴 표상섭이 첫 관문인 무료 강의를 하는 장면은 유튜브에서 20~30만뷰를 기록하며 입소문을 모았다.
“그 장면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어요. 모두 안판석PD님과 박경화 작가님 덕분이죠.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의 연기를 그렇게 길게 보여준 건 안판석PD님의 용기 덕분이에요. 박경화 작가님은 대치동 학원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세심하게 고증해주셔서 애드리브를 꾹 참았죠.”
문예사조를 강의하는 장면이었다. 강단에 선 표상섭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로 시작하는 ‘집 보는 아기의 노래’다.
“TV도 없던 시절,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의 눈에 고추와 곰방대가 들어왔다.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아이는 고추를 먹고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웠다.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이라며 가사 속 달래의 원가사가 담배라고 귀띔한다. 표상섭의 강의에 고개를 갸웃하는 학생들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검색은 나중에 해봐도 돼, 지금 해야 할 일은 상상이다”라고 알려준다.
4지 선다형 객관식 문항에서 정답 고르기 기술만 알려주는 기존의 학원강의와 현저히 다른, 문학의 원류를 설명하는 강의에 시청자들은 즉각 열광했다. 표상섭은 “문학은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그걸 섬세하게 풀어내는 일기장과 같다”고 했다. 일타강사로 잘 알려진 사회탐구 이지영 강사는 드라마 시청 뒤 자신의 SNS에 “아침부터 더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멋진 수업이었다”라고 적기도 했다.
“다행히 지문에 ‘노래를 멈춘다’는 표현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표상섭이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잖아요. ‘맴맴’이라는 표현도 ‘맴맴 돈다’는 의미지만 ‘고추 먹고 매워매워’라는 중의적 의미로 풀어봤죠. 현직 강사들의 인터넷 강의는 전혀 보지 않았어요. 대본을 읽고 제 나름대로 정보를 찾아봤죠.”
촬영 전 동료 배우인 아내와 4살 딸 앞에서 먼저 시연하기도 했다. 그는 “원래 아내와 아이 앞에서 절대 연기하지 않는데 표상섭은 너무 능수능란하면 안되겠다 싶어 먼저 해봤다. 다행히 아이는 좋아했다. 아내는 ‘연기 잘하는 연극배우같다’고 지적해 ‘아차’하고 표상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10여 분간의 롱테이크신으로 빛을 발했다.
경남 창원에서 창원고를 졸업한 김송일은 표상섭 역을 맡은 뒤 고교시절 은사를 떠올리기도 했다.
“철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죠. 어느 날 저희 반 학생들이 유난히 떠들었어요. 선생님이 여러 번 조용히 하라고 경고하셨는데 듣지 않았죠. 결국 분필을 쥔 채 수업 도중 나가셨어요. 이후 저희 반은 자율학습만 했어요. 어느 날 제가 선생님께 여쭤봤어요. ‘왜 학생들을 바로 잡아주지 않나요’라는 질문이었는데 ‘선생님! 왜 교사...’까지만 말한 뒤 선생님께 멱살이 잡혔죠. 선생님이 ‘내가 교사라고?’라며 엄청 화를 내셨어요. ‘나는 부처나 페스탈로치가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요.”
90년 중반 지방 고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은사보다 더 나이를 먹은 김송일은 “당시 선생님들은 지식적인 부분만 알려주던 분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기에 선생님이라 불릴 수 있었다”며 “표상섭은 ‘교사’보다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선생님’이라는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라고 여겼다. 좋게 말하면 신념, 나쁘게 말하면 외골수지만 이런 중심을 가져야 표상섭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본에 은사님 이름을 적어놓고 잊지 않으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학로 지켰던 20년차 연극배우, 안판석의 남자로 우뚝
대중에게는 ‘졸업’이라는 드라마 한편으로 각인됐지만 실상 김송일은 20년차 연극배우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는 한 기업의 중국 주재원으로 1년 6개월간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했다.
“중국에 있을 때였어요. 10년 뒤 내 모습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빠듯하게 회사를 다니고 승진을 위해 애쓰거나 퇴사하고 다른 일을 하지 않을까 싶었죠.”
2003년, 미련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대학로로 향했다.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며 배우로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 연기만 하는 배우에서 연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단 한 번도 연극무대에 선걸 후회하지 않았다.
안판석PD와 인연은 JTBC 드라마 ‘아내의 자격’(2012)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작고한 한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안PD를 만났다. 극 중 장소연이 연기한 윤미래의 남자친구인 경찰 역할이다.
안PD는 역할이 크든 작든 김송일을 기용했다. JTBC ‘세계의 끝’에서는 다소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는데 안타깝게도 드라마가 조기종영했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경찰, MBC ‘봄밤’의 방송국PD역으로,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가사 도우미로 얼굴을 비쳤다. JTBC‘밀회’를 촬영할 때도 안PD의 부름을 받았지만 당시 공연 중이던 연극 때문에 김송일 자신이 출연을 고사하기도 했다.
‘졸업’은 김송일의 드라마 출연작 중 가장 비중이 크다. 그의 아내도 잠시 출연했다. 2회에서 주인공 서혜진(정려원 분)에게 상담하는 엄마 역할이다.
김송일은 “‘졸업’을 하며 처음으로 드라마 톡방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일부 시청자분들은 안PD님이 매 번 같은 배우만 캐스팅한다고 지적하지만 안PD님은 새로운 배우를 쓰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는 분이다. 무명 배우라도 늘 존중해주시곤 한다”고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졸업’으로 얼굴을 알린 김송일은 새 얼굴을 찾는 방송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는 “나는 재미없고 심심한 사람이라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보는 상황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지가 숙제”라며 웃었다.
“작업을 같이 하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감사해요. 이제 표상섭에 갇히지 않고 그를 보내주려 해요. 좋아하는 연기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소극장 공연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배우니 새로운 역할을 향해 나아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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