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에 이르는 모든 이야기가 완성되고서야 드라마의 제목이 왜 '졸업'인지를 깨닫게 했다.
안판석 감독이 연출하고 신인 박경화 작가가 집필한 tvN 드라마 '졸업'이 지난 30일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사교육을 상징하는 대치동 학원가를 배경으로 국어과 스타 강사인 서혜진(정려원)과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에서 연인이 되는 후배 강사 이준호(위하준)의 사랑은 여러 위기를 겪은 끝에 '탈 대치동'과 '프러포즈'로 막을 내렸다.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작품이 내세운 로맨스는 사실 외피일 뿐이다. '졸업'은 원한다고 발을 디딜 수 없는 사교육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명석한' 이들이 벌이는 치열한 수 싸움에 방점을 찍었다.
물론 성공을 위해 먹고 먹히는 대결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흡사 '전쟁터'에 비유되는 사교육 무대에서는 더욱 '진부한' 가치로 치부되는 교육과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작품을 완성했다. 출제 유형을 기민하게 분석하고, 지문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요령을 익히도록 돕는 성적 향상의 '지름길'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신 문학 지문이 담은 진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탐구하듯 '정공법'을 택한 드라마다.
● 한 수 던지고 한 수 받는...'정답 찾아가는' 싸움
'졸업'은 대치동의 불이 꺼치면 시작하는 미드나잇 로맨스를 내세웠다. 손예진·정해인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7년)부터 한지민·정해인의 '봄밤'(2019년)까지 일상의 편견을 딛고 사랑을 키우는 커플의 달달하고 설레는 로맨스에 집중한 안판석 감독의 신작이란 사실은 시청자를 기대케 했다. 앞선 두 편의 로맨스를 기억하는 팬들도 한껏 고무됐다.
하지만 '졸업'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혜진, 이준호의 러브스토리를 기다리던 팬들의 기대를 '배신'했다. 처음부터 둘의 사랑에 집중할 의도가 없다는 듯, 혹은 로맨스는 잠시 뒤로 미루겠다는 듯, 서혜진이 몸담은 학원 대치체이스와 그 학원이 자리한 대치동의 세계를 조망하는 데 주력했다.
대치체이스에서 살아가는 각양각색 사람들은 각각의 서사를 쌓고 거미줄 같은 관계를 맺으면서 서혜진, 이준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 됐다. 수강생 인원이 곧 강사의 위치를 증명하는 대치동 학원가에서 이해 관계가 엇갈린 강사 개개인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정치가 맞물려 '졸업'이 완성됐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과 권력을 향한 집요함을 뒤섞어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안판석 감독의 2007년 연출작 MBC '하얀거탑'의 대치동 버전으로도 읽힌다.
안판석 감독은 '하얀거탑'은 물론 JTBC '밀회'(2014년)와 SBS '풍문으로 들었소'(2015년) 등 작품을 통해 먹고 먹히는 사슬의 세계를 다루는 솜씨를 증명했고, 그 감각은 이번 '졸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입시'를 다루는 소재인 만큼 앞선 드라마들처럼 요란하게 갈등을 부각하는 대신 내밀하고 조용한 수 싸움에 집중했다.
주인공 서혜진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 강사. 인근 고등학교에서 매년 전교 1등을 배출하면서 명성을 쌓은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만든 인물이 '제자' 이준호라는 사실은 대치동에서 꽤 유명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신 8등급이던 이준호는 서혜진을 만나 성적이 거듭 상승해 명문대에 입학한 '기적의 주인공'으로 불린다.
사제 지간으로 출발한 둘은 고교 시절부터 서혜진을 첫사랑으로 마음에 품은 이준호의 적극적인 고백으로 연인으로 발전한다. '말 많은' 대치동에서 연상 연하 학원 강사들의 연애는 곧 지저분한 스캔들로 비화하고, 때마침 수업 스타일까지 바꾼 서혜진을 향해 학부모의 반발은 극에 달한다. 결국 둘이 몸담은 학원에서 수강생들은 물밀듯이 빠져나가고, 때마침 부원장 우승희(김정영)까지 나서서 스캔들이 기름을 붓더니 불법 행위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강사들을 선동해 경쟁 학원으로 이적을 시도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격랑 속인데, 정작 서혜진이 찾는 길을 '본질'을 향해 있다. 주변으로부터 "어줍 잖은 스승 흉내"를 낸다고 비난을 받아도, "아이들 성적은 무조건 올려준다"던 약속을 더는 하지 않으면서 학부모들을 기함하게 하면서 그가 택한 길은 신의를 지키고 신념을 지키는 일이다.
거액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흔들리던 찰라, 국어를 두려워하는 전교 1등 이시우(차강윤)가 "국어는 저에게 3월 새학기에 맞는 첫 번째 점심시간처럼 낯설고 어색하다"고 꺼낸 말은 서혜진의 마음을 돌려놓은 동시에, '졸업'이 사교육 전쟁터에서 찾으려는 교육의 진심과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안판석 감독과 박경화 작가가 단단한 토대를 만들고 배우 정려원의 완성한 '졸업'의 세계는 그래서 더 가치있다.
●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들...'안판석 캐릭터' 특징
안판석 감독은 배우들에게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기 보다 그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마음껏 표현하도록 맡기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가 연출한 이전 작품들처럼 이번 '졸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역시 마치 그 세계에서 진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생생한 표현이 가능한 이유다.
서혜진의 실력에 큰 빚을 졌으면서도 그를 내치려고 머리를 쓰다가 수 싸움에서 밀려 한껏 꼬리를 내리는 대치체이스의 김현탁 원장 역의 김종태, 대치동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어 학원을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최선국어의 최형선 원장 역의 서정연, 소위 '비 스카이 출신'이자 강북권 학원에서 대치동에 입성해 누구보다 성공하길 원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국어강사 남청미 역의 소주연까지. 사교육을 경계하던 현직 교사였다가 최선국어 부원장으로 스카우트된 표상섭 역의 김송일은 또 어떤가. 누구 한 명 빠짐 없이 '졸업'에 출연한 배우 모두 '국가대표 연기 올림픽'을 치른다.
그 중심에 있는 정려원은 이번 '졸업'으로 배우 인생에 오래 남을 대표작을 얻었다.
서혜진은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은 대치동의 한 복판에서 '돈'과 '성공'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는 인물로서 '졸업'이라는 작품 전체를 상징한다. 실제 대치동 학원 강사인줄 착각하게 만드는 연기는 시작일 뿐이다. 제자 이준호의 고백을 듣고 고민하던 찰라,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어떻게 준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며 오열하는 모습에서는 로맨스 그 이상을 표현하는 배우의 깊은 내공도 느껴진다.
다만 '졸업'은 시청자가 한껏 기대한 연상 연하 커플의 달짝지근한 로맨스에 주력하지 않은 탓에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작품에 깊이 몰입한 마니아 팬층은 확보했지만, 사랑 이야기가 지닌 확장성은 보여주지 못했다는 의미다. 지난 5월11일 첫 방송에서 5.1%(닐슨코리아·전국 기준)으로 출발한 '졸업'은 최종회인 30일 6.6%로 막을 내렸다.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짠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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