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할게요! 수혈하면 살 수 있죠? 제발"
펄럭이는 커튼 사이 언뜻 비치는 솔
문 앞을 막고 서 있는 하얀 가운을 밀치고 들어가 솔의 손을 잡는다
힘없이 툭 떨어진다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듯한 포효같은 절규가 복도를 짓누른다
내가 내가 그자리에 서 있었어야해
솔이 아니라 내가 ........
선재의 자책감이 절규를 일으키고 걷잡을 수 없는 어둠이 휘감는다
붉은 꽃이 점 점이 모여서 퍼져나가고
그 위로 선재의 눈물이 멍울져 올라앉는다
피묻은 솔의 옷을 부여잡고......
선재의 울부짖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뒤에서 꽉 안아주며 귓가에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이것들이 엄연히 건물이 나뉜 고유영역을 이리도 막 넘나들어? 지난번엔 쟤가 남고로 오더니 이번엔 네가 여고로 오냐? 이리컴 이리컴"
"샘 지금 그게 중요하냐구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선생님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솔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감에 확 풀려버린 다리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솔의 팔만 부여잡고 울었다
한번도 반항조차 해본 적 없는 선재의 날이 선 목소리에 잠시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불호령이 내린다
" 축구공에 맞아서 코피 좀 난다고 사람 안 죽어. 쟤 봐봐 코만 골며 잘 잔다 "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인혁과 현주
점심시간 짧은 틈을 타고 일심관 뒤뜰에서 꽁냥거리던 선재와 솔의 사이를 질투하듯
어디선가 날아온 축구공에 솔이 정면으로 맞아 쓰러지면서 흘린 코피에 저 난리다
오늘도 두 마리 바퀴벌레의 애정은 현재 진행중이다
솔의 오른팔이 점점 차가워진다
손가락의 감각도 차츰 둔해지고 묵직함이 느껴졌다
가늘게 뜬 솔의 눈에 들어오는 건
얼마나 울었는지 실금만 그어진 것 같은 퉁퉁 부은 선재의 눈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솔의 오른팔을 붙잡은 선재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아있다
".....선재야......"
"나 보여? 솔아!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여기 어디야?"
"양호실 난 너 죽는 줄 알고 미칠뻔 했어"
꺽꺽대는 울음소리에 섞여 들릴락 말락한 선재의 중얼거림이 솔의 마음에 닿았다
다행이다 선재는 안다쳐서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져버린 선재를 다독이며 솔은 안심했다
"다 울었어?"
"흑끅끅 응...."
"그럼 가자"
솔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순간 온몸이 붕하고 떠올랐다
"아픈 애가 어딜 걸어가 업혀"
넓찍한 선재의 등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 박동의 강렬함이 자장가처럼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좀 전까지 잠 들어 있었던 것은 다 잊은 듯 선재의 포근함에 얼굴을 맞대어 또 한 번 꿈길을 달린다
솔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귓가에 전해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쉰다
자식의 생채기에 부모 가슴은 단장지애(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 를 느낀다는데 이런 걸까
노을지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지는 햇살이 솔의 눈에 닿을까 뒷걸음으로 건물 그늘 틈을 걷는다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선재의 발걸음은 천천히 더욱 천천히 내딛고 있다
민들레 홀씨가 살포시 날아오듯 귓가를 간지럽히는 솔의 숨소리가 듣기 좋다
조금이라도 더 솔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져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골목을 빠져 나간다
놀이터를 지나 버스 정류장, 그리고 산성 입구 돌길, 공원, 수영장 앞 화단
한 곳 한 곳 모두 솔과의 추억이 담뿍 담겨 있는 곳들만 가득하다
솔을 만나기 전에 일상적으로 스쳐가던 공간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선재에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행복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간다
등 뒤의 꼬물거림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솔이 깼나보다
에이 조금만 더 있다가 깨지 아쉽다
솔을 품 안에 담고 있는 느낌과는 또다른 몽글거림을 놓치고 싶지 않다
"무거워 내려줘"
솔의 잠투정 섞인 목소리가 들리지만 선재는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계속 채근하는 솔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놓으면서도 다치지 않을까 온통 뒷통수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살포시 등에서 내려 잡는 순간
솜사탕 달큰함,
섬광이 내리꽂힌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오늘도 나만 아는 입맞춤
*
"오늘이 무슨 날이게?"
꼬리 붕붕 날아오는 리트리버가 버거울만큼 확 안겨온다
얼굴이 상기된 것을 보면 종일 퇴근할 나를 기다리며 수시간을 뛰어다녔을 선재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오늘? 오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솔의 머리속에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데
수십번 반복되는 과거여행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본다
이내 양쪽 눈이 축 쳐지며 입술이 대한민국을 다 담을만큼 튀어나온다
하..이번 삐침은 일주일짜리다
남들은 넓은 마음의 온화한 사람이라 칭찬하지만
솔 앞에서의 선재는 떼쟁이 세살배기 아가다
삐침 토라짐 떼쓰기 투덜거리기 도저히 34세 남성의 모습이라곤 1도 찾을 수 없지만 그게 선재의 매력인걸
이세상 누구도 보지 못한 솔만이 아는 매력이라 독점권을 가진 기세등등함이 양어깨를 단단하게 세운다
"미안....무슨 날인데?"
"진짜 기억 못하는거? 나만 나만 이렇게 애닳아하는거지ㅠㅠ"
"진짜 미안해 말해주면 다음엔 안까먹을게 무슨 날이야?"
"우리 두 번째 입맞춤한 날"
으잉? 두번째 입맞춤? 내 기억엔 여름쯤인데? 지금은 안덥잖아
순간 솔의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며 안고 있던 선재를 밀어 버렸다
"누구냐? 그 여자는? 나랑은 여름 아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안겨오는 선재의 가슴팍을 두 팔 뻗어 탁탁 밀치고있다
"이래서 내가 억울해 아무리 싹 지웠다고해도 그날까지 지우냐고 ㅠㅠ 이세상 술은 다 없애버려야해 필름끊긴..... 내 키스 내놔 두번이나 두번씩이나 ㅠㅠ"
바닥에 주저 앉아 두발 동동거리며 징징대는 모습을 보면서 작게 내쉰 한숨
두 번? 왜 두 번이지?
내가 기억 못하는 키스가 두번이나 있다고?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언제 언젠데?"
"피~ 말해도 기억도 못할거면서 말 안해"
"알았어 어떻게 하면 화 풀래?"
선재 품을 파고 들며 방긋 웃었다
삐죽이던 선재 입술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면서 도저히 참을 수없는 행복이 터져나온다
"대신 오늘은 뽀뽀 백만번"
말랑했던 첫키스
매콤 쌉싸름한 두번째 키스
수없이 숨쉬는 순간마다 나눌 너와의 키스가 기대되는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만 사랑할게
내일은 항상 내일이니까
영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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