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습실 앞에서 서성이길 몇시간인지 다리도 아프고 키득거리면서 힐끔 쳐다보는 시선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버티기 어렵지만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매번 1분도 안되는 찰나의 스침에도 기다리는 고통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인기 많은 태성이를 한 번 보려면 어쩔 수 없지
연습은 이미 끝났는데 태성이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혹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안나오는건가?
오늘은 꼭 얼굴 보고 싶은데.....
손에 든 편지만 만지작거리면서 아픈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을 일부러 외면하면서
태성이를 만나러 오는 날이면 꼭 보였던 수영부 남학생
오늘도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고 있다
네가 그렇게 안 봐도 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태어나지 않은이상 창피한 건 안다고 ㅠㅠ
"야 여기있으면 안돼"
"이것만 전해주고 가면 안돼?"
"가"
"으 응....."
매정하기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돌아서는 양 어깨가 바닥에 들러붙은 것 같아서 천천히 더 천천히 이 핑계로 시간을 더 끌어보고 싶다
수영부 쟤만 안보이게 숨어있을까?
숨어 있을만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 그거 내가 대신 전해줄게"
"정말? 고마워"
생긴 건 꽁꽁 얼은 한강 얼음판 위로 고양이가 걸어가도 흠집하나 나지 않게 생겼는데 그래선가 마음이 넓네
갑자기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라 폴짝거리며 달려갔다
"난 임솔이야 내 이름 꼭 말해줘"
한참을 올라가도 안보일 정도로 큰 키에 겨우 시선이 얼굴에 닿았는데
사람이 말을 하는데 왜 눈도 안마주치고 손만 쑥 내밀어서 편지를 획 소리나게 채간다
"아야"
"괜찮....."
뭐야 괜찮냐고 물어볼라면 확실히 말을 하던가 무시할라면 아에 모른채 하거나하지 뭐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편지에 베었는지 따끔하다.
"이거 붙여 물 닿으면 아파"
주머니에서 나온 아쿠아 밴드. 수영부라 이런것도 가지고 다니나보네
섬세하기는 ~
우리 태성이가 반에 반만큼만 다정했으면 좋겠다
2
일 주일째 태성이 얼굴도 못보고 또 허탕이다
이정도면 포기해야하나? 이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너무 매달리는 건가 자존심도 상하고 이젠 더이상 기다릴 기운도 없다
"태성이 아까 갔어"
수영부 남학생이 연습실 기둥 뒤에서 인기척도 없이 걸어나왔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 앞에서 혼자 기다릴 뻔 했네.
허탈한 마음으로 버릇처럼 입술을 쭉 내밀며 돌아서는데
"이거 받어"
파란 편지 봉투가 수영부 남학생 손에 들려있었다
"혹시 태성이가? 답장이야? "
아무말 없이 돌아서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에 왜 짜증이 보이는 거지?
지금은 그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우리 태성이가 답장을 했다구!!
설레는 맘으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안녕 나 태성이야 답장은 처음이지? 그동안 답장 못해서 미안>
.......뭐지? 이 낯섦은? 김태성이 미안이라는 말을 할 줄 안다고?
읽고 또 읽어 보았다 그동안 태성이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다정함이 담겨있었다
이거 이상한데......
3
오늘은 절대 연습실에 안 갈거다 이젠 자존심도 너무 상하고 편지 한 통에 혼자 북치고 장구친거 이제 그만할란다
그러나 나 임솔 오늘부터 김유신 말 할란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다시 연습실로 ㅠㅠ
"여기"
파란 봉투가 불쑥 머리위에서 내려온다
봉투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수영부 남학생의 뚱한 얼굴이 보인다
고맙다는 말도 마치기 전에 찬바람 불며 돌아서는 뒷통수를 보면서 한대 콱 쥐어박고싶었다
불끈 쥐어 든 주먹 사이로 김태성이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다는 저 표정은 뭐지?
"임솔 이제 그만 따라다닐때도 되지 않았냐? 그래서 그런가 왜 편지 안쓰냐? 어차피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내 편지를 읽은 적도 없다는 말
그럼 그동안 내가 받았던 답장들은 다 어떻게 된거지
이 순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파란 편지 봉투는 또 뭐고?
집으로 가는 내내 편지를 열어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누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것일까?
고이 담아놓은 상자 속 편지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았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투박하지만 담박한 표현들이 담겨 있었다
길지도 않은 단 몇 줄 안에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스치는 얼굴 하나
수영부 남학생
매번 태성이의 편지를 전해주던
설마 .......
확인해보고 싶었다
늦은시간인건 알지만 수영장으로 갔다
입구에 서서 수영장 안에 귀를 기울였다
첨벙버리는 물소리가 바깥까지 크게 울렸다
정말일까?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편지를 써 준걸까
내가 불쌍해서?
하늘도 내맘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
온 몸이 흠뻑 젖어가고 있었으나 하나도 춥지 않았다
물소리가 멈추고 빗소리만 가득했다
"뭐야? 너? 언제부터 있었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큼 다가와 물었다
저 표정 이었구나
항상 나를 보던 표정
짜증이 아니였다
퉁명스러움이 아니었다
안쓰러움과 속상함, 그리고 따뜻함이 뒤섞여 나를 보고 있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
흐르는 빗물에 감추려 했다
왜 못봤을까
양 눈 한 가득 나만 담고 있는 애절한 눈빛을 ......
계속 차오르는 눈물에 출렁거리는 그아이의 눈빛을...
"왜 이시간까지 여기 있었냐? 여기 밤엔 우리도 무서워 할 정도로 사람 안다니는데"
"그게~ 네잎 클로버가 수영장 화단에 많다길래"
거짓말로 둘러댔다 네잎클로바가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냥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주절거리고 있었다
"있어봐"
화단으로 걸어가서 비를 맞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그아이 양 손에 흙이 잔뜩 묻은 클로버가 담겨 있었다
에잇거리면서 불빛에 하나씩 비춰보고 바닥으로 던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하나씩 떨어져 내리는 클로버
툭 내뱉어버린 나의 말에
클로버 비가 발 밑으로 내리고 있다
클로버 비를 따라 올려다 본 불빛 속엔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화단으로 뛰어가는 그아이의 뒷모습만 보였다
나는 그동안 헛된 꿈을 꿨었다
행운을 쫓다가 행복을 잃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나에게 행복은 저 아이였을까
태성이의 답장인 줄 알았던 모든 편지는 저 아이의 마음이었다
"세잎 클로버 꽃말이 행복이래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찾다가 행복을 짓밟아 놓쳐버리지 말라구
행복하라구 너"
그리고 나도 행복하고 싶어졌다
너와 함께라면.........
5.
류선재
선재
이름도 잘생겼다
그날이후 선재 얼굴을 보러 연습실로 갔다
오늘도 연습실 앞 기둥에 기대어 서있다
역시 기럭지가 길어서 멋있네
"교실 안들어가고 여기있어? 누구 기다려? 나 기다려?"
반가운 마음에 인사도 하지 않고 달려가 얼굴부터 들이밀었다
가까이 보니 더 잘생겼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더 다르다
앙다문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내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태성이가 너 주래"
행복과 행운을 담은 클로버가 담긴 편지봉투
별 생각없이 내뱉은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얼마나 오랜시간 클로버를 찾아 헤맸을까?
태성이 이름 뒤에 숨어서 류선재 마음을 감춘 채
언제까지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나를 걱정하고 안아주려할까?
그날처럼 하늘에서 클로버 비가 내렸다
행복을 찾은
내 19살 봄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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