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와 빈센조는 같은 나이었다 부터 소름이 돋기 시작하더니
베아트리체도 그렇고 ㅎ
이탈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La Commedia, 코미디)>, 그 첫머리처럼 주인공 빈센조는 이탈리아를 떠난 시점에서 이미 ‘캄캄한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번뇌의 기폭제는 수개월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악몽의 어떤 계기였을 것이고, 까사노 패밀리 내부의 신물 나는 파벌싸움도 있었던 데다, 마침 눈먼 황금이 더러운 돈 냄새 잘 맡는 그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는 것이 방랑을 선택한 표면적 이유겠지만, 미워하면서도 평생을 기다려왔던 어머니와의 재회야말로 단단한 갑각 속에 숨겨둔 진심이지 않을까. 인생의 반 고비,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양심과 신앙이 흔들려 자신이 걸어온 길이 맞는지 고민하면서 유랑의 길을 떠났던 당시의 단테와 빈센조는 같은 나이.
“앞으로 찾아올 사람 없다는 거 말하러 온 것뿐이니까.” 남편도, 자식도, 아무도 없다고 답하는 오경자의 서글픈 고집.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주위에 아무도 없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핑계만 대는 인생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겠죠. 정말 사과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면서 여생을 보내세요.” 자식이 부모에게 쏜 화살은 한 발도 예외 없이 후회가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원망과 서러움을 참지 못해 쏴붙일 수밖에 없었던 애증의 어머니. “전 여길 떠날 예정입니다. 여긴 제 나라가 아니라서요.”
입양아를 다른 무엇보다 괴롭히는 건,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아이’라는 비참한 자기인식. 꽤 늦은 나이에 해외로 입양된 박주형 또한 “엄마 없이는 어딜 가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어리고 나약한 몸을 의탁한 곳은 악명 높은 마피아 가문 까사노 패밀리. 덩치 큰 인종주의자 백인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무력뿐. 그렇게 체득한 힘의 논리.
모정의 상실 이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발자취를 후회하지 않는 경지가 되었다고는 해도 악의 영역에서 인생 대부분을 살아왔다는 것은 희망 없이 우아한 무간지옥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뜻. 악을 저지른 순간부터 인간에겐 돌이킬 수 없이 황폐한 공허가 생겨버리고, 근원적 허무와 고독을 안고 사는 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단테는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며 비로소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결론 내렸다. “악당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했던 빈센조의 결론은 무엇이 될지, 한국에서 찾아낸 어머니에 대한 진실과 우정과 애정이 변화를 이끌어낼지, 과연 홍차영이 운명의 베아트리체인지도 관전 포인트. 중요한 것은 결실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
빈센조 까사노는 이탈리아노다. 그러나 태생은 한국인. 취향부터 사고/행동방식까지 이태리 마피아다운 태도가 몸에 배어있지만 8세까지 형성된 애기입맛-떡볶이, 믹스커피, 요구르트, 군고구마, 계란말이, 김치볶음밥, 붕어빵-은 버리지 못한다. 외지인 또는 타인종에 배타적인 이탈리아 사회, 중세 봉건적 전통이 남아있는 마피아 집단, 동양의 낯선 나라 한국 출신 입양아. 과거 이탈리아에서는 힘없는 이방인 소년 주형이었을 그가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아주 위험한 이방인이다.
굳이 영어식으로 편하게 불러달라고 덧붙여야 하는, 한국인들에겐 발음조차 낯선 이름 ‘빈첸죠’. 빈센 조까사노, 빈센조 까사노바, 빙신조, 빈변이었다가 까변이었다가. 그 어느 곳에서든 어느 때든 범주에서 벗어난 외인(外人)이었던 자, 고국이 없는 남자, 송곳처럼 돌출되는 이단아.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적응해 첫 번째 패밀리의 중추가 되었듯, 동틀 때까지 번뇌와 싸워 승리하며 두 번째 패밀리를 얻게 되는 이야기. 빈센조의 Veni, Vidi, Vi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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