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퀘어 더글로리 [씨네21] 올해의 시리즈 작가 '더 글로리' 김은숙 인터뷰
982 5
2023.12.15 19:20
982 5

27명의 영화 평론가와 기자 그리고 TV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시리즈 부문 작가로 <더 글로리>의 김은숙이 호명됐다. <파리의 연인> 이후 20년간 김은숙는 “대중들이 대사를 곱씹게 만드는 말맛”(진명현)으로 “작가의 워터마크가 박힌 모든 대사를 신드롬으로 만드는”(남지우) 장기를 증명했다. <더 글로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시청자의 결핍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기교가 절정에 달하고”(김소미) “사회와 인간에 대해 품은 의문이 시리즈 전체에 잘 녹아든”(김송희) 진일보한 스토리를 선보이며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 이런 장르도 무척이나 잘하는 작가라는 것을 입증”(김송희)해냈다. 그렇게 “김은숙이 못 다루는 장르가 없으리라는 굳은 신뢰를 하게 만든”(이다혜) <더 글로리>는 그가 “명실상부 대중의 작가”(김소미)임을 확고히 한 작품이다. 차기작 대본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김은숙 작가가 <씨네21> 시리즈 결산을 기념한 만남에 응했다. <더 글로리>를 포함한 그의 전작을 돌아봤던 대화를 소상히 옮긴다.



ZIBdpI



- 우선 <씨네21> 기자,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것을 축하드린다. 이에 대한 소감은.

=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기분이 너무 좋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많은 질문들을 받게 될지 몰라서 조금 괴롭기도 하다. 저 지금 되게 신나요~. 인터뷰하면서 천천히 말라죽어볼까요? (웃음)



- “엄마,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더 글로리>의 출발점이 됐다고 알려진 딸의 질문은 이후 대본을 쓸 때 어떤 역할을 했나.
=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했기에 주인공 캐릭터를 팔로할 수 있었다. 문동은(송혜교) 혹은 자료 조사를 하며 읽었던 실제 학교 폭력 피해자가 진짜 내 딸이라고 가정하며 대본을 썼다. 어떤 신을 쓸 때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이때는 시원한 쾌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이른바 ‘고구마’는 짧게 가고 빨리 반격하자는 등의 기준을 잡게 해줬다. 딸을 가진 엄마의 마음이 많이 들어가게 됐다.



- 어린 동은이 당했던 폭력이 ‘파트1’ 1회에서 충격적인 수위로 묘사된다.
= 폭력의 수위가 높을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방송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수위로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시청자들이 대리로나마 느끼며 함께 분통해야 이후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었다. 더 중요했던 것은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받기를 원하는지 괴롭지만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돌리지 않고, 소리로만 짐작하지 않게 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난 후에 드러난 실제 사례들이 훨씬 잔인해서 많이 놀랐다.



- 가해자 집단이 화려한 외모를 가진 부자들이라 자칫 이를 동경하는 시청자도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럴 여지와 ‘싹’을 잘라버린 듯한 인상도 받았다.
= 그렇기도 했고 시청자들의 안목과 신념을 믿었다. 가해자들의 옷과 아파트, 그들이 몰고 다니는 차를 동경할 수는 있지만 가해 행위 자체를 동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만약 그들을 동경했다면 가해자의 대표자인 연진(임지연)의 결말까지 동경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방송이 나간 후 결국 부와 권력을 선망하게끔 만든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더라. 좀더 세심하게 대본을 살폈어야 했나 생각했다.



- 남편과 딸은 <더 글로리>에 대한 반응이 어떤가.
= 남편은 “원래 이렇게 욕을 잘했냐?”고 묻고 딸은 자신의 지분을 요구했다. (웃음) 내가 <더 글로리>를 쓸 때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게 좋은 결과로 돌아온 것에 더 기뻐한다. 사실 <더 글로리>는 잘 안될 거라고 생각하며 쓴 드라마였다. 처음 쓰는 장르물이고 내가 잘 쓰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사전 제작이다 보니 시청자 반응도 알 수 없고 말이다. 송혜교씨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지만 드라마를 재미로만 소비하는 분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내게도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국 시청자들이 드라마 보는 안목이 뛰어난 것 같다. (웃음)



- 좋은 드라마라는 자부심과 애정을 갖고 썼던 <시티홀>은 작가주의가 아니냐는 공격까지 받은 적이 있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로맨스 드라마는 대중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건드렸다고 비판받았다. ‘잘 만든 드라마’와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드라마’ 사이의 고민이 작가에게 늘 있었을 것 같은데 <더 글로리>를 쓸 때는 어땠나.
= 예전엔 밤 10시에 지상파 3사 드라마가 동시에 방영돼 시청률을 줄 세우고 성패가 결정됐다. 요즘은 드라마 성공 기준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 시청층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드라마는 나올 수 없다. 전체 시청률만 보는 게 아니라 2049 시청률을 살피고 4%에서 10% 정도만 나와도 성공했다고들 한다. <시티홀>은 정치에 대한 사심도 많이 들어갔던, 내가 무척 좋아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김은숙 이제 망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작가주의’라는 표현을 돌려서 썼다. 사실 정답은 있다.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드라마를 잘 만들면 되는데 그게 정말 어렵다. 시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전에 정말 재밌게 본 드라마를 다시 보면 어떤 가치가 편향돼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지 않나. 그래서 ‘재미’와 ‘의미’ 중 하나라도 얻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더 글로리>는 흥행과 상관없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였다. 결과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작 결과가 좋아서 연연하게 됐다. 사람 일은 모른다, 진짜. (웃음)



- ‘나 이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야. 보여줄게’ 하는 마음으로 집필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웃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가져갈 수 있는 작품 아닌가.
= 그렇지는 않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부지런히 글을 쓰지 않으면 계약을 다 털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써야 할까. 사실 TV드라마를 하면서 시청률을 받아 보는 일이 그간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OTT에서 작품을 하게 된 거다. 칼을 갈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나는 욕심껏 무언가를 잘해내서 계속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던 작가다. 한번 잘하면 그다음 것을 더 잘해내야 하는 상황에 많이 지쳐 있었다. 어차피 이제 망한 것 같은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욕심 없이 써보고 싶었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플랫폼이라 오히려 부담을 버릴 수 있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내공이 있어야 한다. 대체로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가져가려고 의식하다 보면 오히려 대본이 밋밋해진다. <더 글로리>는 사회적 이슈도 있었고 여러모로 운이 좋아서 사람들이 좋게 봐준 작품이다. 그런데 작가가 매번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재미와 의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단연 드라마는 재미가 먼저다. 우리가 드라마 얘기를 할 때 “그 드라마 재미있지 않냐?”고 하지 “그 드라마 정말 의미 있지 않냐?”고는 안 하지 않나. 후배들에게도 “드라마는 문학이 아니라 수학이다. 섬세하게 계산해서 써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



- 전세계에 동시 공개되고 몰아보기가 가능한 OTT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TV드라마 대본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이 있었나.
= 없었다. 처음에는 넷플릭스에서 19금으로 찍을 수 있으니 더 높은 수위에 도전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나눴는데 어쨌든 한국 시청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여도 한국 시청자가 가장 많이 봐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다시 작업했다. 다만 몰아보기가 가능하다 보니 모험적인 캐스팅을 할 수 있었다. 원래 각인되어 있지 않은 배우라도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조연배우들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하도영 역의 정성일씨가 그중 하나다. 그리고 직접 경험해보니 나와 넷플릭스가 잘 맞는다. 주 2회씩 방송되던 드라마는 짧게는 두달, 길게는 세달 동안 매주 평가를 받으며 작가가 소환되어야 한다. 20년 동안 그런 부담을 짊어지다 보니 많이 지쳤다. 그런데 넷플릭스는 한번에 비판이든 찬양이든 관심이 집중됐다가 다른 신작이 공개되면 소강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힐 수 있어서 너무 좋다.



- 과거 인터뷰에서 캐릭터를 그리는 철칙을 묻자 “범법자가 주인공인 것은 싫다”고 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복수를 위해 법을 어기는 인물이 주인공이 됐다. 철칙을 어긴 이유는 무엇인가. (웃음)
= 내가 그때 어려서 한치 앞을 못 봤다. (웃음) 시대가 변하고 가치가 달라지면서 ‘안티 히어로’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어떤 인물을 범법자라는 테두리에 가두지 않고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 잘 설명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대중도 학습하게 된 거다. 지상파가 아닌 OTT로 간 데에는 <더 글로리>가 사적 복수를 다룬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과거의 내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웃음)



- 가해자들은 과거의 잘못이 아닌 현재의 잘못으로 벌을 받는다. 문동은의 복수는 다른 사람의 힘을 동반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반격하지만 여전히 이 드라마가 권력을 욕망한다고 읽힐 수 있는 지점이다.
= 일단 가해자들은 현재의 잘못으로 벌을 받았다기보다는 반성하지 않고 삶의 태도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여 있던 악행이 현 시점에 터지게 된 것이다. 반대로 동은은 공장에서 만난 동료, 양호 선생님, 집주인 할머니, 현남(염혜란)과 그 딸, 그를 배신한 친구 경란까지 켜켜이 쌓여 있던 선의와 선행이 복수를 실현시켜준다. 착한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일 하면 벌을 받는다는 심플한 권선징악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권력은 마당히 피해자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고,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여정(이도현)과 하도영의 도움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게 아니라 권력이 잘 쓰인 결과다. 사실 현실에서 문동은의 복수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동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가해자들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글로리>를 쓰면서 이 작품이야말로 내가 쓴 가장 판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 <파리의 연인> 때부터 당신이 다뤘던 계급 이야기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기에 판타지로만 가능하다는 역설을 담고 있지 않나. <시크릿 가든> 17회 충격적인 엔딩이 떠오른다. 혼수상태에 빠진 길라임(하지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주기로 결심한 재벌 김주원(현빈)이 빗속으로 질주하지 않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은 육체를 내어주는 기적을 동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 아니겠나. 개인적으로 “여기서 드라마가 끝나면 <시크릿 가든>은 걸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웃음)
= 눈치 챈 분들도 많더라. 사실 <시크릿 가든>의 원래 엔딩은 그게 맞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파리의 연인2>냐면서 나를 뜯어 말렸다. 작가가 작업에 몰두하면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리뷰를 받았더니 모두가 안된다고, 지금 작가만 주인공을 죽이고 싶어 한다며 나를 설득했다.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캐릭터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무책임한 엔딩을 내면 안 된다는 말에 나도 마음이 바뀌었다. 대중들은 함께 웃고 울고 응원했던 캐릭터들이 행복해지는 결말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해피 엔딩을 썼다. 지금도 내가 결말을 바꾼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 <발리에서 생긴 일> 마지막 회 같지 않았을까. 계급과 구조는 결국 죽음이 아니고선 극복될 수 없다는 서늘한 엔딩이 됐겠지.
= 사실 나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엔딩을 좋아하는데, 주변에 얘기조차 꺼내지 못했다.



- <파리의 연인>은 어떤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엔딩은 아니다. 신데렐라 판타지는 ‘꿈’에서나 가능하다는 냉소를 담고 싶었던 걸까 짐작했다.
= 그보다는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한 평행 세계를 설득해내지 못한 거였다. 어느 세계에 사는 강태영(김정은)과 한기주(박신양)는 행복하게 살았고, 다른 세계에 있는 강태영와 한기주는 다시 또 만난다는 구상이었는데 그렇게 반발이 심할 줄 몰랐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이건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선택을 반성한다는 인터뷰까지 했었다.



uEAQDU



- 동은과 현남, 동은과 경란 등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의 관계성도 눈에 띈다. 남성의 구원 없이도 서로를 도울 수 있는 현실적인 여성 연대를 보여준다. 심지어 동은과 현남이 가까워지는 과정은 로맨틱 코미디 뺨치는 재미도 자랑한다. (웃음)

=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오래 쓰다 보니 ‘샤랄라’한 이미지가 있나 보다. 하지만 내 인생이 어떻게 ‘샤랄라’ 하기만 했겠나. <더 글로리>에 담긴 여성 연대는 내가 살면서 직접 겪고, 듣고, 보고, 혹은 읽었던 글 안에 다 들어 있던 것이었다. 여자 김은숙과 성공한 작가 김은숙이 어떤 접점에서 만난 결과물이다.



- 극 중 문동은과 이성적 텐션을 만드는 캐릭터는 주여정(이도현)과 하도영, 두명으로 설정돼 있다. 사실 과거 한국 드라마의 남성주인공 클리셰에 가까운 쪽은 하도영 같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화양연화>를 연상시키는 신도 있지 않았나. (웃음) <더 글로리>를 구상할 때 두 인물에게 부여한 롤이 각각 어떤 것이었나.
= 주여정은 명확했다. 동은의 복수를 응원하며 피해자의 연대를 보여준다. 그의 과거를 숨기다가 반전 포인트로 쓰려고 했다. 하도영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3의 시선을 담기 위해 탄생한 캐릭터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땐 복수를 멈추라는 입바른 소리도 하지만 본인이 피해자가 됐을 때는 다른 선택을 한다. 두 인물 모두 힘을 갖고 있지만 각자 다른 곳에 권력을 쓰는 모습을 대비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도영의 ‘화양연화’가 너무 부각됐다. (웃음)



- 문동은과 하도영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폭로하는 신이 중간 중간 심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 나도 그런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웃음)



- 그런데 멋진 남자에 열광하는 반응 때문에 빚어지는 딜레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파리의 연인>, <인어공주>의 재해석이었던 <시크릿 가든> 등 전작에서도 늘 존재했다. 혹자는 계급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권력을 가진 남자의 구원으로 이를 극복해가는 서사가 가진 한계와 남성 숭배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시에 멋진 남자주인공이 만드는 판타지는 당신의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김은숙 월드의 남성 캐릭터가 가진 명암 사이에서 당신은 어떻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 내가 올해로 드라마 작가가 된 지 20년째다. 강산이 두번은 변했을 시간인데 아마 요즘은 더 빠르게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 드라마 작가를 시작했을 때는 작가가 시청률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여성 시청자들을 유입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 남자주인공을 부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나는 ‘줄 타기’를 잘해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웃음) 나는 항상 내가 만드는 이야기들이 ‘쌍방 구원 서사’라고 생각했다. 권력은 가졌지만 다른 것은 갖지 못한 남자주인공이, 가진 것은 없지만 자존심 세고 영리하고 자신의 일과 꿈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을 만난다. 그리고 권력을 옳은 방향으로 쓰는 법을 배우고 같이 구원받는다. 내가 쓴 드라마가 남성을 숭배한다는 지적은 늘 따라왔고 역으로 그 덕분에 내가 영광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양날의 검’인 것이다.



- 사실 <파리의 연인>과 <시크릿 가든>을 다시 보면서 당시 여성 캐릭터와 배우 김정은, 하지원의 성취가 상대적으로 지워졌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김태리)이 보여준 진취성과 그 의미가 대중에게도 충분히 조명받은 점이 좋았다. 시대가 바뀌었다.
= 예전에도 여성 캐릭터를 놓치지 않고 잘 만들기 위해 늘 노력했는데 대중에게 반응이 더 오는 쪽은 남자주인공이었다. <더 글로리>는 여자주인공이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었지만 앞으로 할 작품에서 남성과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여전히 헷갈린다. 내가 쓴 대사와 상황들이 요즘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지 점검하기 위해서 젊은 작가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 가령 남자가 먼저 키스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면, 그건 ‘폭력’이라는 지적이 회의 시간에 나온다. 그런데 여전히 남자가 키스를 리드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시청자가 존재하고 그들의 선호를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시대에 맞는 기준이 무엇일까 매일 공부하고 있다.



- <상속자들>만 해도 안하무인 유라헬(김지원)을 좋아하는 시청자들도 많지 않았나. 여성 캐릭터가 마냥 착하기만 한 게 아니어도 시청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 그건 유라헬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예전에는 착하지 않은 여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무결하고 순결하고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되지만 돋보여야 한다. 그래서 악역을 그리는 게 훨씬 수월하고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 땐 움직임에 한계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런 아쉬움이 든다.



- 요즘 사람들은 피해자의 사연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창작자가 진심과 진정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어려운 과제를 해냈다는 점에서 당신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게 아닐까. 작가의 기술이 무척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휘된 사례로 보였다. 사람들이 더이상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발휘한 테크닉은 무엇이었나.
= 엄마들의 레시피를 보면 “소금 약간, 마늘 적당히”라고 하는데 그건 감으로 하는 거지 숟가락 몇 스푼이라고 정량화하면 그 맛이 안 나지 않나. 드라마도 똑같다. 후배 작가들에게 “끔찍한 신일수록 깜찍하게 써라.”, “한보 말고 반보만 신선하게 써라”라고 조언한다. 일단은 사람을 홀려놓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끔 써야 한다.



- 틱톡과 유튜브 쇼츠를 통해 <더 글로리>는 더 유명해졌다. <파리의 연인>과 <시크릿 가든> 시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드라마가 중요한 트렌드로 잡아가는 풍경이 작가에게도 신선할 것 같다.
= 딸 때문에 틱톡을 알게 됐다. “너는 책도 안 읽고 커서 뭐가 될래?” “엄마! 이 안에도 세상이 있어.” 그렇게 딸과 대판 붙었다. (웃음) 심지어 나에게 직접 “유튜브 쇼츠로 드라마를 다 봤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다. 유튜브 쇼츠에 들어가봤더니 자꾸 나한테는 <미스터 선샤인> 영상을 보여준다. 재방료가 나오지 않는 방송이라니 신선했다. (웃음) 숏폼으로 보고 재밌다고 느끼셨다면 의리로 1~2회 정도는 풀버전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드라마는 대본, 배우, 음악, 미술, 편집 등 모든 것이 합쳐진 종합예술인데 쇼츠로만 보면 누군가의 수고는 지워질 수 있다. 비행기에서 목격한 어떤 승객은 <더 글로리>를 10초씩 스킵하며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드라마를 넘기면서 보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까먹고 나도 모르게 10분 동안 서 있었다. (웃음) 어쨌든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어서 작가로서 고민이 많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에서 흥행하고 젊은 층이 숏폼 플랫폼에 패러디 영상을 올리며 열광했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겠다며 작가가 틱톡의 세계를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웃음)
= 나도 아직 이유를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젊은 층을 사로잡겠다는 사심 없이 써서 그런 걸까. <더 글로리>는 연출과 연기, 음악, 미술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진 작업이었다. 그 덕분인 것 같다.



jjEVPP



- <더 글로리>를 두고,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김은숙 드라마 같지 않다는 평도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분들은 내 전작을 보지 않은 게 아닐까. (웃음) 송혜교씨가 내레이션을 잘해줘서 그렇지 보통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이런 표현은 나만 쓴다. 아무튼 최고의 칭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냥 얼떨떨하고 좋다. 뭐가 됐든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 당신의 작품에선 늘 ‘유행어’와 ‘밈’이 탄생한다. 대사뿐만 아니라 기획 의도도 한편의 문학처럼 잘 쓴다. 문장을 잘 쓰는 비결이 있나.
= 20년째 받고 있는 질문인데, 솔직히 타고난 게 있긴 하다. 지금까지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더니 주변 후배 작가들이 약오른다고 해서 최근에 수긍하게 됐다. (웃음) 회의를 하다가 내림을 받은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재미있는 대사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작가도 타고나긴 해야 하는 것 같다. 8살 때부터 미술 실력을 뽐내는 친구들이 있는 것처럼 글도 타고나는 재능 중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글쓰기에 천재가 존재할 수 있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긴 한다.



- 절묘한 단어를 골라 내기 위해 유의어 사전을 옆에 끼고 산다거나.
= 전혀. 오타 점검할 때만 쓴다.



- 의식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다거나.
= 의식적으로 사기만 한다. 책이 쌓여 있으면 일단 기분이 좋다. 사실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을 읽고 오정희, 신경숙 작가를 좋아했던 그때가 내가 ‘독자’였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드라마 작가가 된 이후 읽은 책은 대부분 자료 조사를 위한 것이다. 일단 소재가 겹친다 싶으면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해외 드라마 등을 가리지 않고 다 찾아봐야 한다. 내가 그 작품을 보지 않았는데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지만 혹시 모를 표절 시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지쳐서 잠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펼쳐서 ‘작가의 말’을 읽는 정도로 책을 읽는다. (웃음) 지금 구독하는 OTT가 7개인데 어디서 신작이 나왔다고 하면 1~2회는 대부분 시청한다. 그렇게 시간을 쏟아 붓느라 정작 독자인 나는 사라지게 됐다.



- 어렸을 때 읽은 책이나 영화가 평생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독자였던 시절 읽었던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오정희와 신경숙 작가의 책이 이후 당신의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나. 신춘문예에 지원하던, 책을 좋아하던 김은숙의 자아가 드라마 작가 김은숙에도 남아 있다면.
= 좋은 문장을 가진 글을 좋아한다. 화려한 문체를 좋아해서 시집을 읽게 됐고, 시를 읽다 보면 어느 한줄에 꽂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 하나를 찾아냈던 기억이 이후 내가 대사를 쓸 때 영향을 많이 줬다. 그래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당선되기 전에 책을 많이 읽어두라고 조언한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있을 때 읽은 책들을 평생 뽑아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웃음)



-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
= 진지한 정통 사극을 작업하다 잠시 멈춰놓았다. 언젠가 다시 꺼내보고 싶다. 가상의 인물이 실제 역사의 어떤 시간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남녀주인공은 있지만 로맨스보다는 구국에 가깝다. <더 글로리>를 포함해 계속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내 자신이 너무 다운되더라. 내가 쓰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아닌지 판단이 잘 안됐다. 작가가 우울한 분위기에 취하면 글도 그렇게 달려간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밝은 현대극을 먼저 하기로 결심했다.(<다 이루어질지니>는 이병헌 감독이 연출하고 김우빈, 수지가 주연을 맡았다.- 편집자)



- <씨네21>과 김은숙 작가의 중요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 강릉 가구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던 시절,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가고 홀로 지방에 남아 책만 읽고 있었다. 친구가 가게를 새로 오픈해 놀러갔는데 거기에 <씨네21> 잡지가 놓여 있었다.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모집 공고가 실려 있었다. 어? 내가 좋아하는 신경숙 작가가 나온 학교인데? 나 이 학교를 가야겠어! 접수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원서를 준비했다. 부모님에게는 서울 본사로 발령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 27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9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https://naver.me/F1eTuy9N

https://naver.me/FQRwJv28

목록 스크랩 (1)
댓글 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프리메라 X 더쿠💛] 비타민C + 레티놀의 혁신적인 결합! #투명모공세럼 <비타티놀 세럼> 체험 이벤트 405 06.03 13,248
공지 공지접기 기능 개선안내 [📢4월 1일 부로 공지 접힘 기능의 공지 읽음 여부 저장방식이 변경되어서 새로 읽어줘야 접힙니다.📢] 23.11.01 4,134,610
공지 비밀번호 초기화 관련 안내 23.06.25 4,836,957
공지 ◤더쿠 이용 규칙◢ 20.04.29 21,303,936
공지 성별관련 공지 (언급금지단어 필수!! 확인) 16.05.21 22,485,222
공지 알림/결과 📺 2024 방영 예정 드라마📱 86 02.08 637,397
공지 잡담 📢📢📢그니까 자꾸 정병정병 하면서 복기하지 말고 존나 앓는글 써대야함📢📢📢 14 01.31 648,754
공지 잡담 (핫게나 슼 대상으로) 저런기사 왜끌고오냐 저런글 왜올리냐 댓글 정병천국이다 댓글 썅내난다 12 23.10.14 1,024,420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라마 시청 가능 플랫폼 현황 (1971~2014년 / 2023.03.25 update) 15 22.12.07 1,920,433
공지 알림/결과 ゚・* 【:.。. ⭐️ (੭ ᐕ)੭*⁾⁾ 뎡 배 카 테 진 입 문 🎟 ⭐️ .。.:】 *・゚ 151 22.03.12 2,925,898
공지 알림/결과 블루레이&디비디 Q&A 총정리 (21.04.26.) 2 21.04.26 2,169,454
공지 스퀘어 차기작 2개 이상인 배우들 정리 (4/4 ver.) 156 21.01.19 2,330,705
공지 알림/결과 OTT 플랫폼 한드 목록 (웨이브, 왓챠, 넷플릭스, 티빙) -2022.05.09 237 20.10.01 2,341,549
공지 알림/결과 만능 남여주 나이별 정리 241 19.02.22 2,371,549
공지 알림/결과 ★☆ 작품내 여성캐릭터 도구화/수동적/소모적/여캐민폐 타령 및 관련 언급 금지, 언급시 차단 주의 ☆★ 103 17.08.24 2,351,229
공지 알림/결과 한국 드영배방(국내 드라마 / 영화/ 배우 및 연예계 토크방 : 드영배) 62 15.04.06 2,578,166
모든 공지 확인하기()
298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편집본 재기차 8 04.04 648
297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편집본 재기차 19 03.13 868
296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여정시점 편집본 19 02.26 827
» 스퀘어 더글로리 [씨네21] 올해의 시리즈 작가 '더 글로리' 김은숙 인터뷰 5 23.12.15 982
294 스퀘어 더글로리 임지연 인스 백상 더글로리 배우들 2 23.04.30 2,475
293 스퀘어 더글로리 여정본 일본행사에서 말해준 동은여정 등대신 비하인드 2 23.04.15 1,084
292 스퀘어 더글로리 컬러로 알아보는 더글로리 리뷰 1 23.04.13 529
291 스퀘어 더글로리 넷플공계가 올려준 배우들 감사인사 (좀더 고화질) 5 23.04.04 975
290 스퀘어 더글로리 더글로리 기말고사 개최 1 23.04.03 1,206
289 스퀘어 더글로리 더글로리 오스트 작곡가님이 직접 커버한 경음악 후회 피아노&기타버전 2 23.04.01 721
288 스퀘어 더글로리 [씨네21] '더 글로리' 임지연 인터뷰 1 23.03.31 1,373
287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금소니짤2 7 23.03.30 781
286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금소니 짤 7 23.03.29 995
285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의 미친 사랑.gif 4 23.03.27 1,234
284 스퀘어 더글로리 동은여정 팬뮤비 모음 4 23.03.27 439
283 스퀘어 더글로리 넷플릭스 스페셜 MV '폴킴 - 너는 기억한다' 1 23.03.27 439
282 스퀘어 더글로리 '박연진 엄마' 손지나 "'더 글로리' 중 부모님 소천…평생 잊지 못할 작품" 2 23.03.27 1,712
281 스퀘어 더글로리 임지연 뉴스룸 인터뷰 영상 2 23.03.26 612
280 스퀘어 더글로리 은숙작가 피셜 동은여정 해석 7 23.03.26 1,924
279 스퀘어 더글로리 정신과의사도 경악한 최악의 가스라이팅 TOP 3 와 그 안에 숨은 심리분석 1 23.03.26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