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덕현] 3천 vs 40만.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꺼내놓은 흥화진 전투는 마치 영화 <300>을 연상케 한다.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켜 페르시아 100만 대군을 막아 세운 것처럼, 흥화진 전투는 40만 거란군들이 압록강 방면 요충지인 이곳을 선점하려 했을 때 도순검사 양규(지승현)가 이끄는 3천명의 고려군사들이 이에 맞서 싸워 적을 물리쳤던 전투기 때문이다.
전투 자체가 극적이기 때문에,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사극이 그 초반 기세를 잡는데는 이만한 소재가 없다. 그래서일까. <고려 거란 전쟁>이 그리는 흥화진 전투는 과거의 KBS 대하사극과는 사뭇 차별화된 전투신들이 등장했다. 투석기를 활용한 공성전이 그것이다. 주로 KBS 대하사극에서 오랑캐들과의 전투 신들은 말 달리는 기병 전투가 대부분이었고, 공성전도 군사들이 우 몰려가 사다리를 놓고 오르면 이를 막기 위해 뜨거운 기름을 붓거나 나무를 굴리는 그런 방식들이었다.
거란군이 성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투석기의 등장은 그래서 좀더 전투신을 디테일하게 만든다. 다수의 군사들이 달라붙어 줄을 잡아당겨 쏘는 방식의 투석기는 인원 수를 늘리고 줄여가며 목표지점을 맞춰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맞서 성을 지키려는 양규는 불화살을 쏘아 적의 위치를 지정해 놓고 투석기로 맹화유(맹렬히 타오르는 기름)가 든 항아리를 쏴 맞대응한다.
또 숲으로 숨어 성에 접근하는 거란군들을 막기 위해 미리 함마갱(인마살상용 함정)을 파놓고 적들이 다가오자 '효시'를 날려 그 소리를 향해 군사들이 활을 쏘게 함으로써 적들을 섬멸시킨다. 하지만 거란군의 반격도 만만찮다. 시체가 쌓이면서도 모래주머니를 가져와 함마갱을 막아가며 조금씩 진군하고 급기야 포로로 잡은 고려 백성들을 맨 앞으로 내세우며 진군해온다. 주저하던 양규는 결국 피눈물을 흘려가며 활 시위를 당긴다. 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려 백성들까지 포기하게 된 것.
흥화진 전투는 초반 거란군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이 전쟁의 향방을 가른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는 끝내 양규가 저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켜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 거란 전쟁>이 이 승리의 순간들을 얼마나 실감나게 다채로운 전술과 전략을 보여주며 담아낼 것인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사실 지금껏 KBS 대하사극은 그 제목으로 <태조 왕건>이나 <대조영>, <장영실>, <대왕 세종> 등등 인물을 세워왔던 면이 있다. 그건 아무래도 특정 역사적 인물을 통한 영웅 서사가 시청자들에게 보다 강렬한 집중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제목은 어딘가 특이하게 보인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사극이 그려내는 전쟁의 양상과 흥화진 전투를 통해 이를 재연해내는 연출을 보면,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가 드러난다.
우선은 흥화진 전투신들의 디테일과 차별성에서 보여지듯, 보다 '전쟁'의 양상에 집중하겠다는 뜻일 게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그래서 이 전쟁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전투들과 거기 활용되는 전략과 전술들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실감나게 연출된 전쟁신의 CG들은 과거의 KBS 대하사극들과는 사뭇 차별화되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특히 당시 제작비가 없어 장수들이 죽 서서 전쟁 과정을 설명하곤 했던 걸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총 27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고려 거란 전쟁>의 전투신들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려 거란 전쟁>이 이 힘겨운 전쟁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다.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건 고려와 거란이 가진 너무나 다른 '전쟁의 이유'다. 거란이 전쟁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강감찬(최수종)은 현종(김동준)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란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약탈을 하기 위해서이옵니다." 거란군은 최소한의 보급품만 갖고 들어와 필요한 건 모두 전장에서 약탈로 충당한다는 것. 또 값비싼 것들은 전리품으로 챙겨가는데, 그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탐내는 약탈품은 '사람'이라고 한다. 고려 백성들을 노예로 잡아간다는 이야기다.
저들의 전쟁의 이유가 약탈이고 그것도 사람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은, 고려가 하려는 전쟁의 정반대 이유가 된다. 그건 지키려는 전쟁이다. 애초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현종도 거란의 사신에게 말했고, 또 이 전쟁의 빌미가 된 강조(이원종)는 자신의 목을 가져가라고까지 했지만 끝내 거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그래서 백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려는 전쟁이 됐다. 흥화진 전투는 바로 그 상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저들의 공성과 고려군의 수성이 그것이다.
<고려거란전쟁>은 물론 현종이나 강감찬, 양규 같은 전쟁의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이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건 단순한 영웅서사가 아니라 전쟁의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이 난세의 영웅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려 하는 것일까가 바로 그것이다. 그 질문에 답을 주는 첫 번째 포문은 흥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 양규가 열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이끌 초반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대하사극의 기세가 만만찮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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