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정의 날.
검은 무장의 복장을 한 나는
새하얀 대제관의 복장을 한 너에게로 걸어올라간다.
너의 앞에, 무릎을 꿇고
너의 손이 나에게 내릴, 신성의 축복을 기다린다.
너의 손이 붉은 염료를 가득 묻히고,
염료처럼 붉은 입술이 열리며 그 사이로 햇살같은 너의 목소리가 퍼져나온다.
-이것은 나의 피이니 이로써 그대는 피흘리지 않을 것이오.
이로써 그대의 군대는 흩어지지 않을 것이오.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루즈시여, 우리의 모든 전사를..지켜주소서.
너의 말에서 흔들림이 느껴진다.
나만이 알 수 있는, 그 작은 틈새.
너를 올려다보는 나의 얼굴에 작은 손이 닿는다.
너의 온기가 나의 얼굴에 붉은 자국으로 남고.
이번에는 대제관이 아닌, 탄야, 너의 말이 들려온다,
-살아서 돌아와. 사야야.
니가 나의 이름을 이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데,
왜 나는 그럴 때 너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 걸까.
-은섬이는?
-살려줘. 니 배냇벗이야.
내 배냇벗이라서?
아니면,
니가 이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는.
신보다도 더 강하게 너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너의…사람이라서.
마음 속에 묻어놓았던 연심이, 어지럽게 타올랐다.
너의 곁에 있어도.
니가 내 말에 웃으며 대답을 해도.
어쩌면 니가 보는 건 내가 아니라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그 배냇벗.
은섬이인걸까.
아스달의 총군장.
기를 쓰고 오르고, 또 올라왔는데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이리도 긴 세월동안 나는
너의 마음 하나를 가지지 못해
매일 매일 패전하는 기분인걸까.
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같은 얼굴을 가진 낯모를 사내를 향한 질투와,
그럼에도 한 자락이라도 너의 마음을 갖고 싶은 연심이
마음 속에서 태풍처럼 부딪힌다.
너의 축복의 자국을 얼굴에 그린 채 나는 일어난다.
그리고 나의 부하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올린다.
와아!
전쟁을 앞둔 그들의 함성 속에 광기가 섞여 있다.
탄야. 너는 너의 축복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너의 축복은 누군가에게는 저주가 된다는 걸.
아이루즈가 우리의 전사를 지켜준다면
그건 우리의 전사가 다른 신을 믿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거겠지.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너의 시선을 마주한다.
걱정스런 표정.
너의 마음에 적어도 한 자리는 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러면서 너의 걱정이 또다른 곳을 향하는 건, 왜 이렇게 참기 힘든걸까.
탄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한 약속은 지켜왔지.
그런데, 이번에는 모르겠어.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끝은 늘 너라는 거야.
나의 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