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은 문득, 그 날을 떠올렸다.
행선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행선이 진짜,
엄마가 되었던 그 날을.
해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한창 장사를 하고 있다가, 하원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앞치마를 푸는 것도 까먹은 채, 헐레벌떡 길을 달려갔다.
행선이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사오오 즐겁게 떠들면서 가고 있었다.
늦었어. 어떡해. 너무 늦었어.
해이가 기다릴텐데.
어느새 조용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미친듯이 달렸다.
들어선 정문에는 해이가 혼자, 선생님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 하나, 표정 하나 없이.
화났구나. 우리 해이
-미안해, 미안해, 해이야. 이모 많이 기다렸지.
아니 시간 맞춰서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님이 막 몰려 가지고...해이야!
해이의 작은 몸이 행선을 지나쳐 자박자박 걸어갔다.
노란 가방에 달린 남해이 이름표가 달랑 달랑 흔들렸다.
선생님께 급하게 인사를 하고는 해이를 쫓아갔다.
해이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 조그만 앵두같은 입술을 열지도 않고 총총, 그저 앞으로만 걸어갔다.
해이의 화난 얼굴을 보기가 미안해서,
행선은 그저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말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야 남해이 삐졌냐? 이모가 늦어서 그래?
여전히 대답이 없다.
-좀 봐주라. 이모도 먹고 살기 진짜 힘들다.
이만하면 대답을 한 번 할뻔도 한데. 우리 해이 진짜 화났나 보네.
그럼...
-남해이,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 퍼먹는 거 있잖아. 비싼 거. 이모가 사줄게.
-이모...
돌아보는 해이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는 순간, 행선은 철렁했다.
엄마 손에 붙들려, 생전 처음보는 할머니와 이모의 가게에 맡겨지면서도
울음 하나 보이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 해이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눈도 발갛게, 토끼눈이 되어 있었다.
-해이야, 왜 그래!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누구야. 누가 우리 해이를 속상하게 했어.
-나 이모한테 그냥 엄마라고 그러면 안 돼?
아.
햇살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사락, 흔들렸다.
처음으로, 해이의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그 작고 작은 마음이, 행선의 마음에 톡 떨어졌다.
동심원처럼, 마음에 잔잔하게 파동이 퍼져나갔다.
어쩌면, 행선은 이 말을 기다린걸까.
-그래라. 안 될 게 뭐가 있어. 울지 말구.
그래서.
붉은 감이 주렁주렁 익어가는 가을 햇살 아래서
행선이 ‘해이야’를 외쳤을 때,
해이가 행선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왔을 때,
행선은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직은 너무 가벼운 해이를 안아올리며,
해이의 뒤로 비치는 석양지는 이쁜 하늘과,
그 하늘보다 명랑하게 울려퍼지는 해이의 웃음을 보면서
행선은 그저, 해이가 자신에게 온 순간에 감사하는 거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마 행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모가 아니라,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딸의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