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은 왜 기문을 뚫고 싶어했을까?
그것은 술사가 되어 아버지 장강의 칼을 보란듯이 뽑고, 자신의 어머니가 사통을 하였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장욱에게 어머니의 초상화와 아버지의 칼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세자가 찾아와 낙수의 칼 뿐 아니라 장강의 칼마저 내놓으라 하였을 때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었고
송림에서 장 100대를 맞고 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뒤에도
장강의 칼을 뽑았다며 다시 그 칼을 들고 송림을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욱에게는 또 다른 꿈도 있었다.
자신의 정신적인 아버지였던 박진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그것을 위해 그는 송림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정진각에서 수련을 하고, 자신의 친구들처럼 술사가 되어 송림에서 활약하는 것. 그것이 그의 또 다른 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장강의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 후 그는 칼을 의미를 잃어버렸고
송림에 들어간 후 그는 송림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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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장욱의 술사로서의 성장과정을 보여주지만
그가 꿈을 이룰 때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목표를 하나씩 잃어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우리는 '꿈을 가지라'고 쉽게 말하지만 꿈을 이룬다는 것은 동시에 꿈을 잃는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뒤에 찾아올 허무함에 대하여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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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등, 많은 억압받는 상황에 처한 이들은 살고 싶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벗어나는 수단으로 죽음을 택하는 일이 많고
역설적으로 이것은 그가 그만큼 살고 싶어한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의 자살은 주저함과 망설임이 동반되며 성공 확률이 낮아지는 결과를 보인다.
문제는 그 환경에서 벗어난 직후 찾아온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폭력적인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맞춰 왔던 탓에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비로소 텅 빈 자아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매를 맞지 않는 것 외엔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에 맞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게 되고
깊은 허무함에 빠져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죽음은 매우 높은 확률로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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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사라진다는 것도 이와 비슷할 때가 있다.
꿈을 향해 달려갈 때는 모든 것이 거기에 맞춰져 있어 다른 문제들을 덮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꿈을 이루고 난 뒤에는 그 동안 가려졌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고 정작 내 안은 텅 비어버린다.
장욱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중요하지 않으며
장강의 칼 역시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송림에 들어가는 것, 술사로서의 명예도 그에게는 의미가 사라졌고
마지막에 이르면 그토록 갈망했던 술력조차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이제 남은 꿈은 스승이자 연인인 한 사람을 지켜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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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뤘기에 사라지는 꿈과 혹은 실패하였기에 사라지는 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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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1에서 장욱은 꿈을 이루거나 혹은 실패하면서 계속해서 꿈을 잃어갔다.
그러나 장욱이 허무함에 빠지지 않고 오래 멈추지 않았던 건 그의 스승이
그 때마다 다음 목표를 만들어 장욱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화에 이르면
장욱은 마지막으로 가진 꿈마저 잃게 된다.
스승을 잃었고, 연인을 잃었으며, 평온한 삶과 미래에 대한 꿈과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후 장욱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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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3년 후의 장욱은 더 이상 잃을 것도 꿈꿀 것도 없어진 사람의 모습이었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인 자의 얼굴이었다.
그가 죽음을 향해 걷던 걸음을 멈춘 건 갇혀있던 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를 돌려세운 건 '쉴 수 있게 해줄게' 라던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자신을 안아주는 온기와 울 수 있도록 내어주는 어깨,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는 마음
그는 그곳에서 평안함을 느꼈고, 자신에게 살고싶어하는 마음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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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면 죽어버리라던 말이 사실은 살아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라는 격려였다는 거'
장욱은 저 말을 무엇이든 해보라는 격려로 받아들이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건 내가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3년 전 기억을 비로소 꺼내고, 그 때 하지 못한 슬픔과 그리움을 마주보는 것.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그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기에 가능한 행동들이다.
이뤄야 할 꿈이 있어서도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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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꿈이 있던 20대와 목표가 있던 30대를 지나며
실패와 포기를 거듭한 끝에 꿈은 잃었고 목표는 사라졌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살아가는 것 외에 달리 다른 게 없는 지금
나는 꽤 자주 허무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사는 건, 노을을 보는 게 좋아서이기도 하고 문득 내려다 본 창밖 풍경이 예뻐서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산책길 공기가 좋아서 살기도 한다.
내 거북이를 버려서 진무를 버리는 것처럼
단향곡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풍경 때문에 살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
내가 이 드라마에 마음이 쓰인 건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짤 출처: https://record-445.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