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덕현] “어떤 관계에서도 난 한 번도 먼저 떠난 적 없어. 늘 상대가 먼저 떠났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한테 문제를 찾는 게 너무 괴로우니까. 다 개새끼로 만들었던 거야.”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김지원)은 줄곧 ‘소울리스’ 표정이다. 매일 말도 안되는 걸로 시비를 거는 팀장이 빈정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표정이 없다. 또 부서 직원들이 뭐라 뒤에서 수군거려도 최대한 표정을 숨긴다. 그리고 내뱉는 말도 감정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건 그가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저 감정을 꾹꾹 누르고 숨겨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상황들이 연달아 벌어져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떠나고 심지어 빌린 돈도 갚지 않은 채 결혼을 하려는 전 남자친구를 겪으며 혹시 자신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너무 괴로운 일이라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바뀐 건 구씨(손석구)를 통해서였다. 그는 구씨를 일종의 ‘성역’으로 만들고 더 이상 ‘개새끼 수집’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를 그냥 추앙(사랑으로는 부족해)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채우겠다고 마음먹은 것.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마음을 먹으면서 그는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가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구씨 역시 염미정을 만나기 전까지 무표정한 ‘소울리스’ 그 자체였다. 말조차 없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혐오가 깊었다. 그래서 맨 정신으로 버티지 못하고 술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조차도 환멸하고 적대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왔던 길을 다섯 걸음 되돌아가는 것조차 힘들어 우산도 찾으러 가지 않고 비를 맞고 걷는다. 그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구씨에게 염미정은 몇 초씩을 모아 하루 몇 분이라도 행복한 순간을 갖는 것으로 자신이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면서 구씨에게 시시각각 찾아드는 환멸과 적대를 웃으며 ‘환대’하라고 말한다. 사랑으론 부족해 ‘추앙’이라는 말을 썼듯이 염미정은 아마도 그런 고통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말로는 부족해 ‘환대’라는 말을 썼을 게다. 소울리스 커플에서 추앙커플로 그리고 이제는 환대커플로 그들을 바뀌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간 클럽의 형에게 그는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맨 정신일 때 우르르 찾아오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 아침부터 쌍욕하게 만드는 인간 중에 형도 있는데,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 집을 나서면서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한 아이를 보며 몇 초, 주머니에서 떨어진 500원짜리 동전이 맨홀에 가까스로 걸려있는 걸 발견하곤 또 몇 초. 그렇게 구씨는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염미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알코올에서, 또 인간에 대한 환멸과 적대로부터 해방되어.
창희(이민기)는 자동차에 대한 집착에서도 드러나듯이 경기도 ‘흰자의 삶’을 사는 이의 ‘노른자의 삶’에 대한 동경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구씨를 만난 후 조금씩 이런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 현아(전혜진)가 병간호하던 암 투병하는 전 남자친구가 이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됐을 때 창희는 그의 옆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벌인 사업의 대박기회를 버린다. 그는 죽어가는 자의 옆을 지켜주며 이렇게 말해준다. “형. 내가 3명 보내봐서 아는데, 갈 때 엄청 편해진다. 얼굴들이 그래. 그러니까 형 겁먹지 말고 편하게 가. 가볍게. 나 여깄어.”
평소 같으면 이런 자신의 대단함을 친구들에게 애써 떠벌였을 창희지만 그는 성장해 있었다. 하고픈 말들을 자신만의 비밀로 꾹꾹 눌러 놓을 수 있게 된 창희는 이제 그 많던 욕망들을 쉴 새 없는 수다로 쏟아내던 강박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꼭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내가 이걸 삼키다니. 자기한테 반하면서.”
기정(이엘)과 태훈(이기우)도 서로를 해방시켰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것만 같아 차라리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던 기정에게 태훈은 그러지 말라고 말해줬고, 늘 연민 받는 듯한 시선 때문에 오히려 버거워하며 자신이 “약한 남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고팠던 태훈에게 기정은 연민과 사랑과 존경이 따로 끊어진 감정이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 “불쌍해서 끌리면 안되요? 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 이건 존경, 이건 사랑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어 난 안 그렇던데? 다 덩어리로 있던데? 나 태훈씨 존경해요. 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 다 해요.”
기정은 태훈이 기분 좋게 술 취해 가져다 준 ‘목이 부러진’ 장미의 머리를 소중히 가져와 물 담은 간장종지에 놓고 태훈의 사랑을 확인하고, 태훈은 전화로 외투의 단추가 잘못 채워져 있다는 기정의 말에 짐짓 단추를 다시 채우려다 잘못 채워진 채로 내버려둔다. 어떤 집착으로부터 이들은 한 발 씩 벗어나고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굉장히 드라마틱한 엔딩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들에게 벌어진 작은 변화들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다시 모인 해방클럽 모임에서 “출발은 했는데 뭐가 없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 “힘겨움의 원인을 짚었고”, “문제점을 짚었다”는 것이 사실은 전부라는 이야기는 박해영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 무얼 얘기하려 한 것인가를 분명히 했다. 저마다 힘들지만 왜 힘든지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문제를 한번쯤 짚어보라는 것. 거기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 그 방법으로는 추앙과 환대가 있다는 걸 박해영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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