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살의 저주를 받은 아이.
뱃속에 있을적부터, 어미는 아이를 버리려했다.
결국은 아이를 버리지 못하자 제 목숨을 놓아버린,
죽은 어미의 차가운 몸에서 태어나,
아비의 싸늘한 눈빛 아래서 버림 받았고,
주변에 온갖 죽음을 몰고 다니며 경멸과 멸시를 받아
마침내 얼음 아래 깊은 호수에서 버려질뻔 했던 그 목숨을
한 따뜻한 여인의 품이, 구해주었다.
제 목숨을 버려서, 이름조차 없는 이 보잘것 없는 아이를,
구해주었다.
“안돼...안돼!!!”
배고플 때도, 얻어맞을 때도, 쓸쓸할 때도,
하물며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이들 앞에서도,
살려달란 그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던 아이의 입에서
드디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굳어버린 목구멍을 긁어내듯이
비통하고, 처절하고, 간절하게.
죽지 마시오. 이리 죽지 마시오.
하지만, 그 여인의 얼굴에서는 방금 보았던 신비로운 미소가 사라지고야 말았다.
버려져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던, 그 목숨.
하지만 누군가가, 목숨으로 살려준 목숨.
이대로 죽임당할 수 없었다. 살아야 했다. 살아야 했다.
온 몸으로 기어, 사람들 앞에 선 그를 바라본다.
고려의 장수, 단극.
그 곧고, 맑은 기개로 가득한 장수의 깊고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소.
나는, 살고 싶소.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활이다.
활.
나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붙여준 이도 없고, 불러줄 이도 없었기에.
하지만 오늘, 나에게 이름이 생겼다.
커다란 손이, 추위에 붉게 튼 작은 손을 잡아 끌어올린다.
아비마저 뿌리친 그 작은 손을.
누구보다도 뜨겁게, 단단하게.
눈으로 뜨거운 열기가 모여들었다.
활.
나의 이름은 활.
사람에게서 나, 여지껏 사람의 온기 한 번 받아보지 못했던 나는,
오늘, 처음으로 사람의 이름을 받고,
저주받은 괴물로 살았던 마을을, 그 시간을 떠난다.
다만,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눈에 담는다.
긴 머리에 별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이름도 없는, 본 적도 없는, 한 거지같은 아이를
온 목숨을 다해서 안아주었던 한 여인.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대를 만났을 때
나는 깨닫고 말았다.
너는, 나를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니가 나를 살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음마저 얼어붙을 그 연못 속에서 고요히 잠들었을 것을.
감히 저주받은 아이 주제에 사람같은 삶을 꿈꾸다,
따뜻한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내 아내를 잃고,
두려움에 손조차 한 번 잡아주지 못한 내 아들을 잃고,
결국은, 인간의 육신조차 잃고
삶의 시작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 끔찍한 이름,
불가살.
귀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하여,
우리는,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수많은 죽음이 피로 점철되어 불타는 영원한 삶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고 말았다.
인간과 괴물, 서로의 껍질을 뒤집어 쓴채로.
불가살.
니가 준 이 끔찍한 영생을 나는 살아가겠다.
이 땅의 귀물들을 죽이고 또 죽이며,
단 한 사람만을 쫓아,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내,
복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