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훌륭한 왕도, 그렇지 않은 왕도 많았지만 내게는 정조가 늘 특별한데, 그건 정조가 왕 중에서 보기 드물게, 상처를 잘 극복하고 앞으로 나간 왕이기 때문인 것 같아.
정조와 함께 대표적으로 성군으로 꼽히고 훌륭한 왕이신(새삼 한글만세!) 세종과 비교해도 그런데, 세종에게는 세종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아버지가 계셨지.
태종은 본인은 욕을 먹었을지언정, 아들 세종 앞길에 거칠 것 없이 왕권이 단단해지라고 본인 처가만이 아니라 세종의 처가까지 미리 다 숙청해버려. 세종은 장자가 아니고 셋째였는데도, 아버지가 저렇게 쎈 캐인 덕분인지 세자 자리 뺏긴 큰 형도(물론 양녕은 본인이 자처한 길이기도 하지만), 순서로는 자기 차례다 싶었던 둘째형도 세종이 후계자가 되는 거에 꼬투리 달지 못하고 복종함. 심지어 태종은 본인이 미리 상왕으로 물러나기까지 하면서 살아생전에 세종이 왕으로 자리잡는 걸 확인하고자 했었지. 거기에 태종은 아들의 처가는 날리지만 세종과 금슬좋던 며느리 소헌왕후는 그대로 자리를 보전하게 해 줘서, 세종은 본인 처자식 문제로도 크게 고민하실 필요 없이, 정비에게도(소헌왕후 소생만 8남 2녀임) 후궁에게도 자식을 여럿 봐서 다복했었고.
그에 비해 정조...우리의 이산은 막장극 많았던 조선왕조에서도 가장 큰 비극을 겪어낸 왕임.
영조에게 유일한 왕자였던 세자의 적장자이니(형은 일찍 죽었으니) 정통성이야 더할 나위 없었지만, 아버지가 워낙...좋은 아버지기는 커녕 평생의 약점이자 한이 되는 아버지였지. 사도세자의 광증 원인이야 유전이건 환경이건 아버지 영조가 제공한 바 크지만, 임오화변 무렵 사도세자가 제대로 미래의 왕 노릇을 하기에는 어려운 상태였던 건 사실인 걸로 보여. 요새 진단으로 하면 심각한 조울증이었는데, 세자이다 보니 그 때문에 아랫사람을 여럿 상하게 했던..
하지만 어린 이산에게는 그래도 아버지였던 그가 할아버지의 손에 가장 괴롭게 죽었고(역사상 자식을 죽인 군주는 여럿이지만 저렇게 괴롭게 굶겨 죽인 경우는 극히 드물지..),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어.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 애원하다 실패하고,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던 며칠 동안 어린 이산의 마음이 어땠을까. 정말로 오래 트라우마로 남을 사건이고, 실제로도 그랬던 거 같지만 정조는 그걸 극복해내고(어찌 보면 정신병력이 있던 유전조차 극복해내고) 그 울분을 오히려 훌륭한 왕, 흠없는 왕이 되기 위해 쏟았던 거 같아. 그 까다로운 영조한테도 한 번도 큰 나무람을 받지 않고 늘 애정만 받을 정도로. 그 부분이 내가 정조에게 가장 감탄하는 부분이고. 하지만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는 걸 잊을 수는 없었을테니 그 마음이 또 어땠을까 싶기도 함.
가장 존귀한 자리에서 태어났지만 타고 난 가정환경이 행복하지 않았으니 정조가 만든 가족이라도 행복했으면 좋았겠지만, 내내 후계자가 없다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을거고, 그 고민마저 해결해준 가장 사랑하는 여인, 성덕임과의 시간은 너무 짧았고.
이제까지 정조를 다룬 작품은 많았지만, 나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이런 정조의 모습을 잘 보여줘서 참 좋아. 덕임이가 읽는 소설의 짧은 구절에서도 본인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너는 책을 읽지 마라 강요하는 상처많은 인간이지만, 한편으로 또 늘 이 나라의 세자가, 미래의 왕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여서. 부디 이 드라마가 오래오래 우리가 정조를, 그리고 정조가 사랑한 의빈을 기억하며 같이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되어주길 바라고, 그러리라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