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7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456억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목숨 걸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으로, <남한산성> <도가니>의 황동혁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정재는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은 성기훈을 연기한다. 세련되고 깔끔한 이미지의 이정재가 추레하게 등장해 벼랑 끝 인생의 절박한 상태를 연기하는 모습은 퍽 신선하다.
성기훈과 한동네에서 자란 ‘쌍문동의 자랑’ 조상우는 박해수가 연기한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 수석 입학한 뒤 증권사에 취직했지만 투자 실패로 거액의 빚더미에 앉은 조상우의 복잡미묘한 내면은 박해수의 섬세한 연기 덕에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도전적인 작품에 뛰어들어 과감한 연기를 선보인 이정재, 박해수 두 배우를 화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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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배우 이정재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관상> <암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2010년대에 그가 보여준 강렬한 에너지의 영화적 캐릭터들과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영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드라마 <느낌> <모래시계> 등 1990년대부터 이정재를 지켜봐온 팬들에게도 <오징어 게임>은 낯설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가 연기하는 성기훈은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는 인물이다. 성기훈의 사연에 마음을 열게 만드는 이정재의 노련하고도 본능적인 연기는 <오징어 게임>의 아이러니에 힘을 싣는다. 유연한 연기법에 관해 이정재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때 일본과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서바이벌 게임물은 한국에선 생소한 장르다. 돈 때문에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적인 상황, 한국적인 정서와 잘 맞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나.
=목숨을 건 서바이벌 콘텐츠들이 기존에 꽤 있었는데, 그것들과 <오징어 게임>은 차이점이 있다고 느꼈다. 서바이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을 이렇게 면밀하게, 설득력 있게 그린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으로 시작하지만 인물들의 애환을 잘 드러내면서 그들의 사연을 깊게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 그런 점이 여타 서바이벌 액션 장르물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또 황동혁 감독의 영화를 모두 재밌게 봤기 때문에 언젠가 감독님과 꼭 한번 같이 작품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제안이 와서 너무 반가웠다.
-<마이 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 <오징어 게임>까지 황동혁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겹치는 장르가 없다.
=매번 새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해온 감독이다. <오징어 게임>은 지금까지 황동혁 감독이 했던 작품들을 총망라한 게 아닌가 싶다. <마이 파더>처럼 개인 대 개인의 감정을 터치하는 부분도 있고, <도가니>같이 섬뜩하고 날카로운 이야기와 장르 연출도 있고, <수상한 그녀> 같은 재밌고 유쾌한 부분도 있고, <남한산성>처럼 깊은 주제의식을 담은 부분도 있고. <오징어 게임>이라는 하나의 그릇 안에서 자신의 장기를 다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와 욕심이 보였다.
-성기훈 캐릭터는 정리해고, 사업 실패, 이혼, 도박, 사채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생계 문제가 절박한 소시민 캐릭터를 연기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다보니 주로 극의 분위기를 무겁게 조성하거나 압박하는 강렬한 영화적 캐릭터들이 주로 들어오더라. <오징어 게임>의 기훈처럼 실생활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역할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낯설어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봐주실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성기훈은 초중반까지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게임을 거듭할수록 자기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에 절박함을 깨닫는 캐릭터라, 캐릭터가 변화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설계해야 했다. 그런 다음엔 감독님을 믿고 따라갔다.
-배우 이정재가 가진 세련되고 깔끔한 이미지, 차갑고 뜨거운 카리스마가 있다. 더군다나 최근작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잔인한 킬러 레이였고. <오징어 게임>에선 기존의 이미지를 지우는 작업이 필요했을 텐데, 후줄근한 소시민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나갔나.
=어릴 땐 그렇게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가난을 이겨나가야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을 최대한 끌어다 활용하려 했다. 황동혁 감독님도 비슷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기훈처럼 쌍문동에서 사셨고. 감독님이 효자인 게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까지 가셨다. (웃음) 본인의 기억과 주변에서 보고 들은 모습들을 참고해 성기훈이란 인물을 만드신 것 같고, 감독님과 과거의 개인적 기억들을 나누면서 ‘맞아, 나도 그때 저랬었는데’ 하며 캐릭터 작업을 했다.
-기훈은 어떤 외형의 인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작품이 많아질수록 ‘그때와 비슷한 거 아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매번 다른 모습, 다른 캐릭터를 보여드리려 노력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이번에도 최대한 이정재가 아닌 성기훈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감독님이 생각한 성기훈의 모습은 잠잘 때 입는 옷과 밖에 나갈 때 입는 옷에 큰 차별성이 없는, 잠잘 때 머리랑 외출할 때 머리가 별 차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웃음)
-특유의 눈웃음이 <오징어 게임>에선 유독 짠해 보일 때가 많았다. 오랜 기간 서서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중년 남자의 웃픈 얼굴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는지.
=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동작이나 표정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 연기를 오래할수록 집중해야 할 건 캐릭터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표정 생각하고 몸동작 생각하면 정작 감정에 집중을 못할 수도 있어서 이제는 눈꼬리가 요만큼 처졌는지 이만큼 처졌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캐릭터에 집중하면 표정과 동작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결국 캐릭터와 감독을 믿고 따라가는 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같은 경우는 스타일이 꽤 중요한 작품이라 판단돼서 신경을 많이 썼지만, 보통 캐릭터 스타일링에는 개인적인 의사를 많이 반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상상력이 무한할 수 없다. 작품이 달라지면 스탭도 달라진다. 달라진 스탭들이 내는 아이디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돌입하기 전인 초반 1, 2화에선 기훈의 개인사가 드라마의 주축이 된다. 저마다의 사연과 동기는 다르지만 왜 이 사람들이 목숨 걸고 게임에 참여하는지 기훈이 초반에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게임 자체가 황당무계하다. 이런 게 영화적인 설정이고. 결국 판타지를 얼마나 믿게끔 하느냐, 얼마나 빨리 몰입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초반부는 그래서 늘 중요하다. 기훈의 가정사라든가, 저런 애라면 저런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성격적인 면들을 쌓아가면서 시청자들이 ‘어, 내가 언제부터 믿기 시작했지?’ 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은 가상적인 공간과 가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라 초반부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멀티 캐스팅 작품이고 조·단역도 많이 투입된 현장이었다. 주연배우로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나.
=책임감, 부담감은 시나리오를 읽고 결정할 때 제일 크게 느낀다. 그다음엔 촬영 전 준비할 때. 막상 촬영할 땐 부담감이나 책임감을 못 느낀다. 오늘 이 신을 찍어야만 하는 연기자로서는 그 감정에 몰입해야 하니까 다른 생각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촬영장에서 나는 대체로 말이 없다. 동료들끼리 개인적인 이야기 같은 것도 못 나눈다. 연기에 집중하느라 잠깐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배우도 많다. 전환이 빨리빨리 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이번 작품에서의 부담감은 시청자들이 새로운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거였고,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해내야만 하는 몫에만 신경 썼다. 촬영할 때는 촬영에만 집중하고. 그래도 이번 작품은 동료 연기자들이 다들 성격이 밝아서 즐겁게 촬영했다. 동료들이 먼저 말도 걸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더라. (웃음)
-<오징어 게임> 촬영을 마치고 감독 데뷔작인 <헌트>를 찍었다. 연출과 주연을 맡은 <헌트> 촬영은 잘 마무리되어가고 있나.
=연출이 처음이라 많이 힘들다. 그만큼 재미도 크지만. 촬영은 80% 정도 진행했다. 스파이물이라 이야기가 촘촘해서 어렵지 않게 잘 찍어야 하는데, 새로운 걸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촬영의 난이도가 꽤 높은 작업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스탭들이 나보다 더 욕심을 내고 있다. (웃음) 당분간은 <헌트>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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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사회적 위상이 계급을 결정짓는 사회에서, 조상우는 가장 극단적인 낙차를 경험했을 캐릭터다. 기훈(이정재)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상우(박해수)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 수석 입학한 쌍문동의 자랑이었다. 졸업 후 여의도 증권가에 입성한 그는 고객 예치금을 무단으로 빼돌려 주식 파생 상품과 선물 옵션에 투자했다가 실패해 빚더미에 올랐다. 집과 어머니의 가게까지 무모하게 끌어들이는 바람에 실제 손실액만 60억원에 이른다. 가족도 속인 채 경찰의 추격을 받던 중 의문의 남자에게 초대받아 합류한 서바이벌 게임은 상우가 몸담았던 세계와 닮았다. 오로지 돈을 위해 움직이고 확률과 통계를 통해 사고하며 필연적으로 도덕성까지 내던지는 현실을 잔혹한 게임으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황동혁 감독은 “게임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인물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 배우”로 박해수를 떠올렸다.
-<오징어 게임>에는 70~80년대 어린이들이 많이 했던 게임들이 등장한다. 배우 나이(1981년생)를 생각하면 실제 어렸을 때 이 게임들을 해봤을 것 같은데.
=지금이야 어린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많이 하지만 우리 때는 몸으로 쓰는 게임을 주로 했다. ‘오징어 게임’도 했고 작품에 나오는 모든 게임을 섭렵하며 자랐다.
-당시에 어떤 어린이였나. 주도하는 타입이었나.
=조상우처럼 2인자에 가까웠다. 워낙 개인적이고 낯을 많이 가려서 같이 놀자면서 사람을 불러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몸 쓰는 건 잘해서, 그때는 그랬는데(웃음), 1인자였던 동네 형들이 꼭 불러줬던 기억이 난다.
-작품에 접근할 때 학도처럼 공부하고 철학자처럼 사유하며 파고드는 타입의 연기자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오징어 게임>은 어떻게 준비했나.
=감독님에게 이 작품은 논문감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각 캐릭터가 갖고 있는 전사, 선택의 방향성, 인물간 관계성, 심리 변화가 단계별로 나와 있다. 그래서 조상우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도 부단히 노력을 많이 했다. 원래 다같이 잘 살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승자가 아니면 힘들어하는 감정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다. 조상우가 1등이 아닌 2등이 됐을 때 갖는 자격지심과 박탈감을 이해하기 위해 실제 서울대학교 캠퍼스에 가서 내 신분을 노출하고 학생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여긴 모두 1등을 하던 사람들만 오지 않느냐, 그러다 2등을 하면 어떤 마음이냐” 같은 것을 물어봤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감독님이 대본에서 준 순간순간의 힌트들을 보면서 캐릭터를 구축해나갔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입학 후 가능한 진로는 아주 다양하다. 상우가 그중 증권회사에 취직하게 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나.
=상우의 엄마를 보면 알 수 있다. 상우가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을 하고 증권회사 투자 팀장으로 있는데도 아직 엄마는 생선 가게를 하고 있다. 상우 입장에서는 성기훈을 포함한 과거의 가난했던 모습을 모두 잊고 쌍문동에서 벗어나 그 상황을 탈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성공은 돈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곳에 들어간다. 증권가는 자본주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업계다.
-이미 회사를 잘린 이후에도 양복을 입고 다닌다. 처음엔 안경을 썼다가 어느 신을 분기점으로 안경을 쓰지 않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상우는 자신이 갖고 있는 위상을 지키고 싶어 한다.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무언가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도 자기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깔끔한 양복을 입는 것이다. 그 뒤로 안경도 벗고 점점 거칠어지고 괴물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외형적으로 변화를 줬다.
-그런 과정을 거쳐 조상우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조상우는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경쟁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사느라 일찍 찌들었다. 게임 안에서도 그만의 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 간다. 아주 천천히 변하는 것 같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 캐릭터라 매력적이기도, 연기하기에 고민이 많이 되기도 했다.
-황동혁 감독은 기훈과 상우를 “하나의 뿌리와 추억을 공유한 이란성쌍둥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점에서 닮고 또 다른 캐릭터일까.
=가장 순수했던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기 때문에 조상우에게도 순수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멀리 갈라졌다가 다시 게임에서 재회하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가치관 자체가 달라진다. 조상우는 승자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훈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패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게 두 사람의 가장 큰 갈등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후반부에 상우 캐릭터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겠다.
=원래 상우는 스스로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는 알리(아누팜 트리파티)의 차비를 먼저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벼랑 끝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상우의 심리 변화가 증폭되고 그게 행동으로 표출된다. 위험할 땐 군중 속에 숨어 있기도, 군중 속에서 1인자가 돼서 이끌기도 하는데 연기하면서 그가 꼭 악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상우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그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야기를 한다. 조상우의 합리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숫자로 보는 시선이다. 누군가가 없어져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아주 단순한 확률로 생각한다. 두 번째 게임에서 기훈에게 자신이 추측한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도 그가 나빠서라기보다는 그냥 확률 때문이다. 감독님과 표현의 정도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눴는데, 조상우는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선을 잘 타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합리성이 꼭 도덕성과 함께 가지는 않는다. 그런 딜레마를 보여주는 인물일 테다.
=본인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합리화다. 합리화가 계속 이어지면 나중에 도덕성과 양심을 잃는 일이 생긴다. 합리성의 기준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게 아니라 나만을 위한 것이 됐을 때 도덕성이 결여되고, 그게 멀리 보면 결국 악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456명 중 255명이 사망한다. 상우가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은 중단된다”는 계약서 조항을 언급하면서 게임 지속 여부를 투표에 부치게 되는데, 이때 상우는 놀랍게도 게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쪽에 표를 던진다.
=게임을 중단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는 아직 주최측이 상금 액수를 알려주지 않았다. 한 사람에 1억원씩, 첫 번째 게임 종료 후 255억원 상금이 적립됐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상우의 선택은 분명해진다. 밖은 더 지옥이고 어차피 목숨을 걸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사실 그 장면은 게임을 계속한다, 게임을 중단한다는 두 가지 선택 모두를 촬영했다. 감독님은 후반 전개를 생각했을 때 상우가 전자를 선택하는 게 더 맞다고 나중에 판단하신 거다.
-드라마에서 투표 결과가 거의 반반으로 나와서 놀랐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나.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벼랑 끝에 내몰린 최악의 상황에 있다. 실제 우리 사회도 치열한 경쟁사회이고 행복 지수가 그렇게 높지도 않을 거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실제 배우들에게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지 않고 각자 선택하게 됐는데, 그게 누르다보니 거의 반반이 나왔다. 이게 진짜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중에 나온 최종 결과는 드라마적으로 맞춘 것이지만 자유 선택에 맡겼을 때도 거의 비등비등한 결과가 나와서 굉장히 놀랐고 무서웠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이어 단벌 신세로 어딘가 갇혀 있는 연기를 또 했다.
=이제는 단벌 촬영이 익숙하다. 편하고 좋다. 그리고 옷이 여러 벌이면 스타일리스트가 힘들어한다. (웃음) 단벌 트레이닝이지만 잘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옷도 많이 변한다. 살짝 내려갔다 올라갔다가, 캐릭터마다 다른 변화도 있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신기하게도 같이 작품을 해본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낯선 느낌도 받았는데 촬영하면서 점점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신이 워낙 밀도가 높고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혼자 해결하기 어려울 때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눈 현장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팀보다도 연락을 많이 하는 관계가 됐다.
-무대에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갈매기>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맥베스> 등 고전과 인연이 깊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를 모두 경험한 배우! (웃음) 고전을 통해 성장하고 연기를 배운 경험이 매체 연기 진출 이후 어떤 영향을 줬나.
=고전은 평행구조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신과 나의 갈등, 사람간의 갈등 등 여러 구도의 갈등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며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많다. 그런 작품을 경험하며 여러 선생님들에게 많이 배우다 보니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에 접근할 때 좀더 재밌어하는 것 같다.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기로 발현할 때 조금이나마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걸 또 이용하고 싶기도 하고. 사실 <오징어 게임> 시나리오를 봤을 때도 고전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소재는 굉장히 신선하고 특별하지만 캐릭터들 사이에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감정, 그들의 선택이 고전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크고 다부진 몸, 선 굵은 얼굴 때문인지 강인한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은 창작자들의 선택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첫 매체 연기였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후 <푸른 바다의 전설> <마스터> <슬기로운 감빵생활>, 영화 <사냥의 시간> <양자물리학> 등을 거치며 박해수의 연기는 어떻게 확장되어왔나.
=감사하게도 계속 손을 내밀어주셔서 계속 작품을 하고 있다. 선 굵은 캐릭터를 내게 많이 주시는 것도 이미지적으로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일 텐데, 캐릭터 변신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계속 배우는 단계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내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아 자학도 많이 했는데, 이제 조금씩 매체 연기 공부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질 수 있는 역할 또는 친근한 캐릭터도 접하려고 한다.
-<슬기로운 감빵생활> 이후 정말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그 와중에 두편의 연극 무대에도 섰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나를 더 단련해야 하는 신념 같은 거였나.
=내가 무대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무대에 섰을 때 생기는 에너지, 관객에게 받는 에너지가 있다. 앞으로도 계속 무대에 설 것이다. 연극만의 매력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시절에도 연극만 스무편을 했다고 하고, 지금 영화와 드라마도 쉴 새 없이 하고 있고,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오나.
=솔직히 말하면 난 정말 게으른 사람이다. (웃음) 어려운 시기에 일을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이렇게 일을 주셨을 때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밌게 즐기면서 하려고 한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있으면 주변이 힘들어할 수 있으니까. (웃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연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차기작들이 많다. 하나씩 소개해줄 수 있나.
=넷플릭스 <종이의 집>에서는 베를린 역할을 맡았다. 캐릭터가 가진 전사가 원작과는 조금 다르다. 넷플릭스 <수리남>에서는 마약왕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국정원 요원 역할을 맡았다. 영화 <야차>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 해외 비밀 공작을 전담하는 블랙팀으로 파견됐다가 악명 높은 팀의 수장 강인(설경구)을 만나 어떤 큰 사건을 같이 겪는 검사 역을 맡았다. 영화 <유령>은 촬영을 마치고 현재 편집 중이다. 일제강점기의 두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나는 지독한 일본 순경으로 나온다. 이렇게 짧은 소개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내가 가진 애정만큼 말을 잘 못한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나중에는 꼭 한편 한편 소중하게 잘 설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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