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생일이라는 이유로 마흔두 살에 가죽바지를 사고 체인을 걸었다. 신나서 제 옷장에 한 번도 걸려본 적 없을 법한 옷들을 쇼핑하고 혼자였다면 죽어도 안 했을 락 스피릿 충만한 액세서리도 샀다. 실력 있는 의사, 훌륭한 스승, 책임의 무게를 아는 어른이라는 수식어도 잠시 내려놓는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하루만큼은 가죽바지를 입은 록 밴드의 멤버가 된다.
스무 살에 만나 스무 해 넘게 추억을 공유했다. 함께 꿈을 꿨고, 함께 성장했고, 함께 꿈을 이뤘다. 덜컹거리는 창고 문을 열었던 날, 밴드를 만들었던 날, 의사 가운을 처음 입고, 처음으로 환자를 잃었던 날, 처음 사망선고를 했던 날. 평생을 쥐고 갈 특별한 기억들 속에 그들은 항상 함께였다.
그렇게 함께 쌓아온 시간이 그들이 처음 만나 수줍게 인사를 나눴던 그때의 그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살기 바빠 생겼던 추억 사이의 짧은 공백은 아무런 힘이 없다. 잠깐 눈을 감는다고 삶이 멈추는 건 아니니까. 그 바쁜 순간들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같이 놀다 보니까 얼레벌레 30년이 지났네요
어우 지겨워
밴드를 만들었다. 베이스도, 드럼도, 키보드도 칠 줄 몰랐지만 열심히 배웠다. 바쁜 시간을 쪼개 석형의 집으로 모여 악기를 잡았다. 가끔 노래방도 갔다. 순서를 정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곡은 다 같이 합창하기도 했다. 막 끓인 라면을 뺏어 먹고 키보드를 칠 줄 안다는 거짓말이 들통나 머리가 쥐어뜯기기도 했다.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고, 서로의 흑역사를 지켜봐왔다. 등산을 좋아하는 정원의 추진으로 공룡능선에 가기로 해놓고 설악산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온 게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그렇게 같이 놀다 보니 얼레벌레 20년이 지났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같이 밴드를 하고 술에 취해 노래방에 몰려간다. 라면 먹을 때 냄비 뚜껑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과자 때문에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며 리모컨 쟁탈전을 벌인다. 몰래 케이크와 샴페인을 사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고, 생일자의 특권으로 생일의 주인공이 원하는 노래를 선곡해 밴드를 준비한다. 오늘도 정원은 친구들과 공룡능선에 함께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친구들은 올라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제자들에겐 슈퍼 히어로보다 멋진 교수님이자 좋은 사람 다섯이 떼로 몰려다니는, 마치 성숙한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우정의 이데아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함께일 때 여전히 구구즈는 못 말려 우당탕탕 시트콤을 찍는 낡아빠진 창고 속 청춘들일 뿐이다.
근데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시게 된 거예요?
보면은 성격도 완전히 다르신데.
안 맞는 성격, 이해 안 되는 습관을 맞부딪히고 티격태격하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 술잔을 부딪히지도 않았고, 서로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에 깊은 감동을 나누며 우정을 쌓은 것도 아니다. 딱히 거창한 일은 없었다. 그저 좋은 사람들이 만나 좋은 친구가 되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진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도 특별한 우정이 된다.
이 나이에 뭐 하는 짓이야, 그게.
그럴 시간 있으면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지.
니들을 왜 만나.
나도 바빠. 시간 없어. 못해
이 나이에 그 짓을 한다.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지트에 모여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먹고 티격태격하며 논다. 병원 일 때문에 바쁘고 시간도 없는데 밴드까지 한다.
얘 없으면 말년에 누구하고 놀아요
얘 죽으면 같이 놀 사람도 없고...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요
성격도, 취향도 안 맞고 이해 안 되는 습관도 한가득이지만, 같이 노는 게 즐겁고, 같이 있으면 심심할 틈 없는 친구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넷씩이나 있다. 이 나이를 먹고도 가죽바지를 입고 체인을 걸고 하루만큼은 함께 록 밴드의 멤버가 되어줄 친구들이, 앞으로도 함께 추억을 만들어갈 소중한 인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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