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 소도시라는 공간적 요소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윤혜진이 ‘시골’ 마을로 갔다는 것이 부각되지만, 홍 반장과 윤혜진의 갈등은 시골 마을의 문화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홍 반장의 성격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설명된다.) <갯마을 차차차>는 강원도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윤혜진이라는 인물이 들어오면서 모든 사건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윤혜진이라는 인물이 서울에서 쫓겨나 지역 소도시에 치과를 개원하면서 지역 소도시에 정착해 나가는 과정의 우여곡절을 중심으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기에서 서울과 지역(윤혜진의 표현에 따르면 ‘시골’)의 차이가 대립적으로 그려지며 현재 우리 사회에 떠돌고 있는 ‘수도권 중심론/ 지역 소멸론’의 담론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 내고 있다.
서울과 지역의 대립은 처음에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으로 형상화된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윤혜진을 통해 그려지는 서울은 화려하고 편리한 고층 아파트, 레깅스 차림으로 자유롭게 조깅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공원, 원할 때마다 원하는 것을 심지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을 살 수 있는 쇼핑 공간 등으로 상징된다. 그에 반해 지역 소도시 공진시는 낡은 상가 건물과 단층 주택, 레깅스를 입고 조깅을 한다고 흉측하다고 타박하는 노인들의 시선, 백화점조차 없어서 필요한 물건을 모두 택배로 시켜야 하는 불편함 등으로 상징된다. 서울은 모든 것이 다 있고, 지역은 모든 것이 없거나 불편하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의 시선에 계속 노출되어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
-
이에 비하면 <갯마을 차차차>는 지역의 모습에 훨씬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도식적인 이항대립 구조를 넘어서서 서울과 지역의 차이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사회 담론이나 문화 재현 양상에서 보여주는 서울과 지역의 차이는 다분히 이항대립적이다. 서울에는 다 있고, 지역에는 모두 없다. 서울은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살기 힘들고, 지역에는 정이 남아 있어 함께 살기 좋다. 혹은 서울은 개인의 생활에 대한 존중이 있는데, 지역은 사생활 침해가 심하고 낯선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다.
하지만 <갯마을 차차차>에서 지역의 공존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윤혜진에게 공진이라는 지역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정확한 자격을 가진 전문가들이 서류에 기반하여 일을 처리하는 서울 방식에 익숙했던 윤혜진에게, 사람과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주선하여 부동산 계약이 이루어지고, 일이 처리가 되는 방식은,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이다. SNS를 통한 홍보가 아닌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떡을 돌려야 하는 홍보 방식, 반상회에 참가해서 동네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치과에 손님이 늘어나는 홍보 방식도 다 구닥다리, 비효율적 방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역 사회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던 윤혜진은 동네에서 거의 왕따가 된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문법상 남자 주인공인 홍 반장이 윤혜진을 철저하게 도와서 윤혜진이 지역 사회에 정착하도록 돕기 때문에 윤혜진의 시련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단지 홍 반장의 도움으로만 윤혜진이 이 시련을 극복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드라마는 윤혜진이 지역 주민들을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윤혜진이 얼마나 무례한 사람이었는지를 균형 있게 보여준다. 윤혜진 또한 자신이 서울 사람이고, 치과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동네 슈퍼 주인에게는 고급 샴푸는 아마 동네 슈퍼에는 없을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할머니가 손으로 찢어준 김치는 더러워서 먹지 않으며, 과거 가수 경력을 끊임없이 운운하는 카페 사장에게는 실패자의 열등감이라고 폭언한다. 이런 문제들을 겪으면서 윤혜진은 자신이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홍 반장의 도움을 받아 마을 주민들과 조금씩 어울리게 되면서, 자신이 상처 줬던 사람들에게 사과도 하고, 관심사가 유사한 중학생과 대화도 하며, 점점 자신을 열어 간다.
<갯마을 차차차>는 단지 서울과 지역의 차이를 대립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적 배경으로 인해 생겨난 삶의 방식의 차이가 어떤 인물형들을 탄생시켰는지를 그려낸다. 서울의 생존 경쟁에 익숙한 윤혜진은 위에서처럼 자신의 삶을 챙기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그러기 위해서 타인에게 예민하게 구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정해진 소수의 지역 사회 속에서 모두와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홍 반장은 마을의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며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자기가 나서서 처리하는 오지라퍼로 살아간다. 이 둘의 삶의 방식은 위계질서를 이루지 않고 각자 동등하다. 즉 이 드라마는 어떤 삶이 좋다, 나쁘다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장·단점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특히 윤혜진의 시선을 통해 생존 경쟁 중심의 서울의 삶과 공존 중심의 지역의 삶이 가진 다채로운 측면이 잘 그려진다. 윤혜진은 지역의 삶을 대표하는 홍 반장이라는 존재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음을 점점 깨닫게 된다. 홍 반장과 점점 썸을 타게 되면서, 윤혜진은 홍 반장이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윤혜진은 이를 믿을 수가 없다. 그 정도 스펙을 가졌으면, 이런 시골에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혜진은 홍 반장에게 수능 기출 문제를 내며 맞춰 보라고 한다. 홍 반장이 자신보다 뛰어난 수학 실력자임을 알게 되자 윤혜진은 홍 반장에게 말한다. 자신은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좋은 스펙을 낭비하고 있는 홍 반장이 이해가 한 된다고. 그러자 홍 반장이 말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훨씬 다양하다고.
<갯마을 차차차>가 서울과 지역의 삶을 보여주는 관점은 바로 이것이다. 서울의 생활환경과 지역의 생활환경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생활 방식의 다양함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홍 반장이 말한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단지 서울에서 훈련된 생존 경쟁의 방식 외에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하지 않아도, 서로 도와가면서, 서로를 믿어가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의 방식이 서울의 각자도생, 적자생존에 익숙한 윤혜진의 시선에서는 낯설고, 촌스럽고, 그래서 배타적인 방식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 서로 믿다가 배신당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의 삶의 방식만이 무조건 옳다, 라는 시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래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던 우리의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분명히 누군가를 믿고 함께 하는 삶이 가능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갯마을 차차차>는 서울과 지역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시야에 대한 확보를 통해서 서로의 삶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아직까지 6회까지밖에 전개되지 않았지만, 이 이후 그려지는 윤혜진과 홍 반장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줄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기대된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72
글이 좀 길긴한데 읽어보면 좋을거같아서 퍼왔엉 출처가서 전문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