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theqoo.net/lgpQZ
난 결국 영도도 자기를 대신해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 엄마가 있는 납골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영도가 말하잖아. ‘그때는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엄마가 그랬던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는 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른이 되면서 영도는 점점 알게 되었을 거야. 형의 죽음은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때 엄마의 마음이 어땠건 엄마는 자기에게 그러면 안 됐다는 걸. 아마 그 누구보다 영도가 가장 뼈아프게 그 사실을 알았을 거야.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상처와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걸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영도는 계속 죄책감을 느꼈을 거야.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형은 죽었고 형의 죽음은 부모님에게 큰 슬픔이 되었고, 특히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자기의 손을 외면할 정도로 큰 상심에 빠진 모습을 보였으니까. 거기다 (정확한 이유와 때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영도에게 그런 기억을 남긴 채로 돌아가셨지. 엄마가 돌아가심으로써 영도의 마음은 갈 길을 잃었을 것 같아. 해소되지 않은 슬픔과 원망이 여전한데 그걸 풀 사람이 사라졌잖아. 슬픔도 원망도 죄책감도 무엇 하나 사라지지 않은 채 영도는 살아왔겠지. 마음 놓고 원망하기엔 죽은 엄마에게 미안해서, 또 여전히 엄마를 사랑해서, 엄마가 그리워서. 그러나 그립고 미안하고 사랑해도 슬프고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라서. 슬픔도 원망도 주인이 될 수 없는 얼굴, 어쩌면 그건 영도 자신의 얼굴일지도 몰라.
https://img.theqoo.net/KBTpK
차 안에서 다정이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하고 했던 말들이 나는 영도의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정이가 느끼는 속상함과 원망, 분노를 언젠가의 영도도 지나왔겠지. 그리고 여전히 그 속상함과 원망이 마음 한 켠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영도는 분노와 원망을 앞세워 엄마를 기억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영도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영도는 그런 사람이잖아. 세상에 빚을 많이 져서 그걸 갚으려고 자기를 갈아 열심히 사는 사람. 죽은 아이 엄마와 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남을 열심히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해서, 그래서 엄마를 구하지 못한 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된 사람. 영도는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원망과 슬픔으로 엄마를 기억하는 건 영도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뿐이니까. 영도는 엄마를 용서하고 싶었을 거야. 엄마를 안아 위로하고 싶었을 거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지. 아직 아물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선명하거든. 사라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러 인한 상처와 서글픔, 그러면서도 이제는 엄마를 안아주고 싶기도 한 그 복잡한 마음 속에서 영도는 수없이 갈팡질팡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차라리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려버린 거 아닐까.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치이는 감정을 자기만 보고 자기만 아프면 되니까.
https://img.theqoo.net/ZViLo
그러나 이제 영도에겐 다정이 있어. 11살의 자기 대신, 38살의 자기 대신 화를 내고 울어주는 다정이. 화를 내야할까 용서를 해야할까 답을 내릴 수 없어 질문을 계속 유보시키던 영도는 자기 대신 하나의 답을 내려주는 다정을 바라 봐. 그리고 다정이 내려준 그 답 덕분에 영도는 다른 하나의 답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됐어. 다정이 자기 대신 화를 내줘서. 이제는 자기 혼자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우는 게 아니라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주는 다정이 있어서. 갈 곳을 잃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슬픔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비로소 영도는 엄마를 안아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오래 미뤄온 포옹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https://img.theqoo.net/VfJfj
그래서 엄마를 안아주는 영도의 모습은 단순히 엄마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시절의 영도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의 영도를 안아주는 것 같기도 했어. 소매 아래 묻어둔 상처를 꺼내 끌어안는 것. 그로 인한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엄마와 포옹하는 영도의 얼굴이,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던 영도의 얼굴이, 납골당을 나와 멍하니 서있던 영도의 얼굴이 그렇게 복잡했던 것 아닐까. 오랜 시간 숨겨온 상처를 꺼냈으니까.
납골당에서의 그 순간만으로 영도의 상처가 모조리 극복되고 말끔해지진 않겠지. 모든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니까. 그래도 이제 영도는 괜찮을 거야. 상처를 꺼내놨으니까. 또 아프면 그땐 같이 끌어안고 울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다정이니까.
난 결국 영도도 자기를 대신해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 엄마가 있는 납골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영도가 말하잖아. ‘그때는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엄마가 그랬던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는 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른이 되면서 영도는 점점 알게 되었을 거야. 형의 죽음은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때 엄마의 마음이 어땠건 엄마는 자기에게 그러면 안 됐다는 걸. 아마 그 누구보다 영도가 가장 뼈아프게 그 사실을 알았을 거야.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상처와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걸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영도는 계속 죄책감을 느꼈을 거야.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형은 죽었고 형의 죽음은 부모님에게 큰 슬픔이 되었고, 특히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자기의 손을 외면할 정도로 큰 상심에 빠진 모습을 보였으니까. 거기다 (정확한 이유와 때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영도에게 그런 기억을 남긴 채로 돌아가셨지. 엄마가 돌아가심으로써 영도의 마음은 갈 길을 잃었을 것 같아. 해소되지 않은 슬픔과 원망이 여전한데 그걸 풀 사람이 사라졌잖아. 슬픔도 원망도 죄책감도 무엇 하나 사라지지 않은 채 영도는 살아왔겠지. 마음 놓고 원망하기엔 죽은 엄마에게 미안해서, 또 여전히 엄마를 사랑해서, 엄마가 그리워서. 그러나 그립고 미안하고 사랑해도 슬프고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라서. 슬픔도 원망도 주인이 될 수 없는 얼굴, 어쩌면 그건 영도 자신의 얼굴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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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다정이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하고 했던 말들이 나는 영도의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정이가 느끼는 속상함과 원망, 분노를 언젠가의 영도도 지나왔겠지. 그리고 여전히 그 속상함과 원망이 마음 한 켠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영도는 분노와 원망을 앞세워 엄마를 기억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건 영도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영도는 그런 사람이잖아. 세상에 빚을 많이 져서 그걸 갚으려고 자기를 갈아 열심히 사는 사람. 죽은 아이 엄마와 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남을 열심히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해서, 그래서 엄마를 구하지 못한 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된 사람. 영도는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원망과 슬픔으로 엄마를 기억하는 건 영도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뿐이니까. 영도는 엄마를 용서하고 싶었을 거야. 엄마를 안아 위로하고 싶었을 거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지. 아직 아물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선명하거든. 사라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러 인한 상처와 서글픔, 그러면서도 이제는 엄마를 안아주고 싶기도 한 그 복잡한 마음 속에서 영도는 수없이 갈팡질팡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차라리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려버린 거 아닐까.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치이는 감정을 자기만 보고 자기만 아프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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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영도에겐 다정이 있어. 11살의 자기 대신, 38살의 자기 대신 화를 내고 울어주는 다정이. 화를 내야할까 용서를 해야할까 답을 내릴 수 없어 질문을 계속 유보시키던 영도는 자기 대신 하나의 답을 내려주는 다정을 바라 봐. 그리고 다정이 내려준 그 답 덕분에 영도는 다른 하나의 답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됐어. 다정이 자기 대신 화를 내줘서. 이제는 자기 혼자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우는 게 아니라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주는 다정이 있어서. 갈 곳을 잃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슬픔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비로소 영도는 엄마를 안아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오래 미뤄온 포옹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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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마를 안아주는 영도의 모습은 단순히 엄마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시절의 영도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의 영도를 안아주는 것 같기도 했어. 소매 아래 묻어둔 상처를 꺼내 끌어안는 것. 그로 인한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엄마와 포옹하는 영도의 얼굴이,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던 영도의 얼굴이, 납골당을 나와 멍하니 서있던 영도의 얼굴이 그렇게 복잡했던 것 아닐까. 오랜 시간 숨겨온 상처를 꺼냈으니까.
납골당에서의 그 순간만으로 영도의 상처가 모조리 극복되고 말끔해지진 않겠지. 모든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니까. 그래도 이제 영도는 괜찮을 거야. 상처를 꺼내놨으니까. 또 아프면 그땐 같이 끌어안고 울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다정이니까.